죽음을 눈 앞에 두고 신체적 고통을 느끼면서 과연 이렇게 여유로운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혹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하더라도 상대방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우측 강도는 예수의 십자가형 처벌이 일반적인 범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와 그가 유대인의 왕을 자처하는 죄라는 아주 피상적인 정도 밖에 알지 못하였을 것이지만, 곧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 같은 처지의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그의 양심이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는 말은 죽음 이후에 닥치게 될 심판을 가상하는 양심의 소리다. 사람은 누구나 임박한 죽음의 상태에서는 지푸라기도 잡으려고 허우적거린다. 그는 정확한 것을 모르더라도 그것의 정확성을 따질 여유가 없다 지푸라기인지 진짜 구조의 손길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말은 인간 본능에 가까운 소리이며, 좌측 강도에게 "너는 어떻게 죽음을 앞에 두고 같은 처지의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이 양심의 가책이 되지 않느냐"고 예수를 두둔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 하셨다. 그의 말씀은 먼 훗날 언젠가 복을 받을 수 있으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우리에게 발생하는 미래가 바로 너의 희망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사실 죽은 자가 , "언제 나는 다시 살아 무덤 밖으로 나갈 수 있겠나" 하면서 시간을 느끼지 않는다. 그가 부활된다면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수만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죽은 그 순간에 부활된 것이지, 한참 기다렸다가 "아 지겨워 이제 내 차례구나"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입장에서는 눈 깜박할 사이에 부활되어 그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모든 사람이 그를 판단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오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그에게서 자신이 변호 받은 것처럼 그를 변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임박한 당신이라면,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불문하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예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간청하라, 그러면 그분은 미래에 내가 너를 기억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 말씀하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