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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기도)
주님,
4월의 첫날을 시작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유다서를 묵상합니다.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5.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본문 주해)
1~2절 : 유다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동생이다.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그리고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하며 인사말을 한다.
여기서 야고보는 시도 야고보가 아니라, 역시 예수님의 육신적인 동생으로서 초대교회 때에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행15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유다는 이 편지의 대상자들을 부르심을 입은 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얻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 표현한다.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 나타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다는 그들에게 긍휼과 평강과 사랑을 기원한다.
3~4절 : 유다는 일반으로 얻는 구원에 대하여 편지를 쓰려고 하였다.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란 인간의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을 말한다. 이런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그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편지를 쓰려던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이런 은혜를 색욕거리고 바꾸는 자들이 나타났기에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편지를 한 것이다.
죄 사함과 거룩함과 영생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일어난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믿음의 도를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거짓 선생들의 유혹이 있었다.
오직 은혜라고 주장하는 곳에서는 은혜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을 정당화 하는 일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은혜만이 아니라 행함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가리는 일인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구원이지, 자기 구원에 만족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라는 구원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구원받은 것이다.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단번에 얻은 이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울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5~7절 : ‘범사를 알았다’는 것은 그들의 구원이 은혜로 된 것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이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기에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듣고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거짓 선생들이 들어오니 흔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어떻게 심판받는 것인가를 구약의 세 가지 예를 들어 증거한다.
첫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40년을 말하며 믿음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킨 내용이다.(5절)
둘째, 천사(사단)조차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였을 때에 하나님께 심판하신다는 것이다.(6절)
셋째, 소돔과 고모라성의 불의 형벌이다.(7절)
‘저희와 같이’의 ‘저희’는 거짓 선생들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 자들을 가리킨다.
8~11절 : ‘꿈꾸는 사람들’에서 꿈을 꾼다는 것을 공동번역에서는 ‘제 정신을 잃고’, 현대인에서는 ‘이성을 잃고 ’로 번역한다.
이들은 성전 된 육체를 음행으로 채우고, 정당한 권위마저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영광마저 비방하면서도 자신들은 진리를 알기에 자유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천사의 예를 말한다.
미가엘과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두고서 다투었다는 내용은 유대인들의 전승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유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본다. 어쨌든 천사장 미가엘조차 함부로 훼방이나 비방의 말을 못하는데 이들 꿈꾸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조차 함부로 비방하는 안하무인인 자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자들이 어떤 멸망을 당하는지 또다시 구약의 세 인물을 예로 들어서 말씀한다.
짐승 같은 본능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가인과 삯을 위하여 일하는 발람과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권위에 대하여 대항하는 고라가 그들이다.
12~13절 : 거짓 선생들의 허망함을 여섯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한다.
첫째, 그들은 애찬의 암초이다.
초대교회 때에 성도의 공동식사는 아주 중요한 교제였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단지 식사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을 기념하는 성찬식의 뜻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식사에 거짓 선생들이 거리낌 없이 들어와서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이다.
새번역에는 이들을 ‘자기 배만 불리면서 겁 없이 먹어대므로’ 라고 표현한다.
셋째,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다.
이스라엘 땅은 비를 흡수하는 땅이어서 제 때에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그런데 구름만 일고서 비가 오지 않으면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거짓 선생들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에 뛰어들어서는 자기들이 모든 진리를 아는 것인 양 큰소리를 치지만 빈말이라는 것이다.
넷째, 그들은 죽은 나무이다. 어느 정도로 죽은 상태인가 하면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는 것이다. 이런 나무는 그저 비바람에 썩어져갈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거짓 선생들은 생명 없이, 자신들의 본능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다섯째, 바다의 거품이다.
거짓 선생들은 우선 바다처럼 거대한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수치의 거품만 내는 거친 물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원의 빛에 비추이면 그들은 곧 사라지고 말 한낱 거품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여섯째, 유리하는 별들이다.
별들은 각기 제 길이 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제 길이 없어서 유리하는 별들이라는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유성이요, 영원한 흑암에 갇힐 운명이 거짓 선생들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비유들은 결국 거짓 선생들의 허망함을 알고 그들을 분별하여 싸우라는 것이다.
14~16절 : 이와 같은 경고가 이미 아담의 칠대 손 에녹 때부터 있었다.
“보아라, 주님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서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단죄하시려는 것이다.”(새번역)
창세기에는 에녹의 예언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기록이 있을까?
에녹은 자기 아들(므두셀라, 창의 사람의 뜻, 창이 던져지면 심판이 온다.)이 죽으면 심판이 올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기에 늘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갔다. 그런 시대에 에녹이 예언을 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신약의 이 유다가 증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에녹 당시에나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는 지금이나 다 해당되는 예언이라는 것이다. 즉 범죄 한 인간의 특징이란 언제나 같은 모습인 것이다.
“이들은 불만에 싸여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요, 자기들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입으로 허풍을 떨다가도,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남에게 아첨을 합니다.”(16절, 새번역)
(나의 묵상)
성령께서 내게 은혜 주시기만을 기도하면서 길고 긴 주해를 정리하였다.
긴 내용이지만 유다가 하고 싶은 말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3절)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단번에 이루신 그 구원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늘 일어나는 일이다.
구원은 은혜로 받고 그 다음 성화는 우리의 노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런 것이다.
구원이 주님께서 주신 은혜인 것은 알지만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은혜를 갚아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들에게 각인되고 또 각인된 세상 원리 때문이다.
단번에 주신 그 믿음의 도, 그 은혜는 받고 또 받는 것이다.
단번에 받았다고 내가 단번에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 것인지 그것을 알아가기에는 내 평생을 다 써도 모자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다 이루심을 믿는다.
그것은 이전의 모든 죄를 다 사하여 주심을 믿는 것이요, 현재의 삶에서도 끝없이 짓는 모든 죄를 고백할 때마다 정결케 해 주심을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곁에서 도와주시며 이루실 것을 믿는다.
그 과정 속에서 비틀거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베드로를 중보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심을 믿기에 아주 쓰러지지는 않는 것이다.
나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붙들 수 있도록 기도할 뿐이다.
그러므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는 것 역시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요, 한결같이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생각한다.
십자가를 붙들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의 빛을 통해 보이는 내 죄를 확인하고 주님께 고백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일이다.
그럴 때 주님은 내 죄만 알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알게 하셔서, 기쁨으로 십자가로 달려가게 하신다. 그리고 그 길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속과 연결된다.
이렇게 살아가니 어떻게 은혜받았다고 함부로 몸을 굴리며 함부로 생각하겠는가? 이 좋은 것을 알았는데 어찌 그 토한 것에 가서 몸을 다시 굴리겠는가?
성령께서 매일 새벽마다 몸을 일으켜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신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도록 오늘도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이 땅에서의 제 모습은 부족함과 연약함뿐입니다.
그 앞에 ‘아직, 여전히’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눅들기도 하고, 낙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다 이루심을 믿기에
이미 하늘에 앉히운 자(엡2:6)임을 기억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받고 또 받는 은혜입니다.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저를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영원한 아들의 나라를 향해 가는
이 땅의 나라의 삶을 믿음으로 완주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