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복음화 과업의 원칙, 엔진, 방향 그리고 시사점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
사도 13,26-33; 요한 14,1-6 / 부활 제4주간 금요일; 2024.4.26
오늘 복음에서는 생애 최후의 순간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음이 산란해지신 심경을 토로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2-3)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의 정치와 종교 그리고 여론을 주도하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죽이려는 사악한 음모가 진행되어 가던 이 긴박한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하신 이 말씀을 곰곰이 곱씹어보면, 실상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고 가까이 다가가는 길에는 매우 다양한 길이 있으며, 세상의 죄악에 대항하여 선을 실천하는 길에도 아주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너무나 급격한 변화의 물결이 밀려와서 새로운 가능성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밝은 미래의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 주신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도 매우 비복음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소아시아 내륙 한가운데에 있는 피시디아주(州)의 안티오키아 – 스테파노에 대한 박해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를 세운 시리아주(州)의 안티오키아와 이름은 같지만, 속한 주(州)가 다릅니다 - 에 있는 한 유다인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바오로는 디아스포라에서 그리스의 사고방식과 로마의 통치행태에 적응해 가면서도 아직 조상들이 겪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동족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새로이 해석하는 강론을 행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러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시며 다시 살아나셨고 자신들은 그분 부활의 증인들이라는 것”과, 그래서 “이 부활 신앙으로 우리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기쁜 소식을 땅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적 노력의 결과,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 회당에서 얻은 협조자들의 도움으로 복음을 서방으로 전하는 길을 열었고 이 노력은 로마제국이 박해를 멈추고 신앙을 공인함으로써 열매를 맺었습니다. 열성적인 바리사이였던 바오로가 사도가 된 후에는 바리사이들의 구약성경의 두 기둥 가운데 유독 율법에만 몰두했던 것과 달리, 예언자들이 남겨 놓은 예언에 주목한 태도가 돋보입니다.
그 후 2천 년이 흐른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에서도 비복음적 상황은 여전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지난 세기의 냉전적 구도 즉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결하고 있는가 하면, 정치적으로도 군부 독재나 신정 체제 또는 전제 왕정 등이 남아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인구의 대부분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인간화의 나락에 머물고 있어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제가 절실한 실정입니다. 이 대륙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요한 14,6)의 복음을 전하려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가톨릭 사회교리에 담겨 있고 그 목표는 ‘사랑의 문명’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한 복음화 과제는 아시아 대륙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돕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으로 삼고자 하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기준은 인격성과 공공성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이 조화와 균형은 ‘전인적이고 보편적인 인도주의’라는 지평 위에서 펼쳐집니다. 육신의 필요를 채우려는 경제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정신와 영혼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문화적이고 영적인 차원도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미 기득권을 누리며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엘리트 계층뿐만 아니라 기득권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사회적 공동선의 혜택이 고르게 미쳐야 한다는 조화와 균형의 요청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중의 조화와 균형이 아시아 복음화 과업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상 출현했던 협동조합과 이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사회체제의 목표도 이와 같은 기준이었습니다, 인격성과 공공성의 조화와 균형. 그래서 전세계에 있는 모든 협동조합 운동의 목표는 이것입니다, “일인(一人)은 만인(萬人)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그래서 이것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사도직 활동의 복음적 표상으로서 협동조합 운동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협동조합 공동체가 부활 신앙의 사회적 투영으로서 나타나야 할 공동체의 모델로서 세상에 제시해야 할 파스카 과업의 엔진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또한 아시아 대륙에서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그리스도 신앙이 주체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사유되는 형태로 복음이 전해진 역사적 사례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이는 복음 전파의 방향이 모처럼 동방으로 향하던 흐름의 끝이었습니다.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믿음으로 나아가게 된 이 오묘한 섭리 또한 우리 겨레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예수 부활의 은총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겨레가 복음화됨으로써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아시아의 동쪽 끝인 한반도까지 온 복음이 아시아 대륙을 향해 나아가는 복음화 과업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명약관화합니다. 이것이 대희년을 앞두고 1998년에 열렸던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의 결론이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권고, ‘아시아 교회’). 복음화 제3천년기를 시작한 보편교회의 교부들이자 아시아를 위한 예언자들이 제시한 이것이 파스카 과업의 방향입니다.
교우 여러분,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할 산업화와 민주화는 요원한 아시아 대륙 상황에서 한민족과 한국교회는 복음화의 향도(嚮導), 즉 길잡이 역할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식민지배와 분단 그리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이 두 목표를 모범적으로 성취하여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한민족과 한국교회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이제 남은 마지막 목표인 복음화에 있어서 민족 복음화와 아시아 복음화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이라 할 것입니다. 파스카 과업의 방향과 엔진 또한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이것이 결국 홍익인간적인 가치와 사회교리의 목표를 아울러 담은 사랑의 문명입니다.
이렇게 아시아 복음화의 원칙과 엔진과 방향을 새기면서, 특별한 시사점을 발견합니다. 즉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했던 바오로가 가는 곳곳마다 동족인 유다인들의 회당에 찾아가서 민족의 역사를 재해석하면서 예언자들 – 바리사이들은 예언보다 율법을 더 중시했었습니다 – 이 예언으로 이미 내다본 바 있었던 메시아 사상을 일깨워준 것처럼, 고조선 이래 홍익인간 사상을 공유하고 있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옛 한민족 왕조들의 후예들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나라와 민족들을 우선적으로 찾아가서 홍익인간의 가치는 물론, 아시아 복음화의 원칙과 엔진 그리고 방향을 공유하면서 협동조합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사회적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젊은 인재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복음 말씀을 되새깁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