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맛 / 김영선
좁아터진 골목에 시커먼 트럭을 터진 순대처럼 꽉 차게 박아놓고 차 머리를 딛고 서서 혼자 사는 노인네 감 따주는 게 무슨 벼슬도 아니고 깜빡이를 켜고 클랙슨을 누르다가 급기야 차에서 내려 얼른 차 빼시라며 언성 높아진 나를 향해
감을 따는 사내의 마누라, 감나무 주인 할매까지 나서서 “혼자 사는 노인네 감 따주느라 그러는데” 젊은 여자가 위아래도 모르고 소리 지른다고 본의 아니게 순 쌍놈 취급당하며 코너로 몰리고 있을 때
훤칠한 키의 젊은 남녀가 맨발 슬리퍼에 추리닝 차림으로 적들의 틈으로 나타나 단숨에 상황 파악 끝내고는 그때까지도 차 지붕에 올라앉아 느자구없는 말로 꾸물거리고 있는 사내에게 빨리 차 빼시라고 암팡지게 이러더니 사내가 내려와 슬금슬금 차를 빼자 “엄마, 괜찮아?”하며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거면 되지, 가족이라는 게 뭐 그렇게 눈에 넣고 빨 듯이 할 필요 있는가 각자의 방에 반벙어리처럼 들어앉아 컴퓨터와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 있다가도 한솥밥 저력이 예고 없이 필요하게 될 때 저렇게 온 골목이 눈부시도록 나타나 걱정 뚝뚝 묻어나는 눈길로 아래위를 훑어보며 괜찮냐고, 더듬고 물어볼 수 있으면 되는 거지
- 시집 『돌이킬 수 없는』 (예서, 2024.04)
* 김영선 시인 경상북도 문경 출생, 대전 거주 시집 『돌이킬 수 없는』
***********************************************************************************
누가 더 잘했고 누가 더 잘못했는지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조금만 더 서로 배려했으면 목소리를 높일 일까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문제의 발단은 차로 길을 막은 것이고, 다른 차가 지나가려 할 때 양해를 구하고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얘기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법이라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법으로 모든 것을 다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요즘 직장에서 법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더더욱 느끼는 것으로, 법은 참고사항이어야만 한다고 봅니다. 순진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그 나머지는 서로에 대한 배려로서 채워나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 시의 주된 내용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힘이 되어주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죠.
가족이란 어떤 존재이어야만 할까요. 힘이 되어 주는 존재이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가족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가족들을 ‘남보다 못한 가족’이라고 부르죠. 도움이 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는 가족들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가족 사이의 폭력, 살인 행위들이 바로 그러한 예일 것입니다. 특히 가족 내부에서 가부장적인 폭력행위는 과거에는 용인되는 행위였습니다. 일방적인 폭력행위라고 해도, 그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가족 내부의 일로 치부되기도 했습니다. 요즘 이러한 행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감소하는 까닭은 더 이상 참으며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참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갈라설 수 있는 것은 부부 관계일 때뿐입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는 서류로서 정리할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을 운명공동체로 보는 것, 이 또한 바뀌어야 할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남아있는 구시대의 유물일 것입니다.
기막힌 경우도 종종 뉴스로서 마주하게 됩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구하라법’의 근간으로 알려진 사건입니다. 구하라 씨는 그룹 카라의 멤버로서 2019년 11월 사망했습니다. 구하라 씨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직계비속이 없습니다. 이때 직계존속인 부친과 모친이 상속 1순위가 됩니다. 문제는 상속재산을 받은 어머니입니다. ‘자식을 외면한 모친’이 구하라 씨의 법정상속분 50%의 상속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 법으로는 있습니다.
이 경우는 사회적인 공분을 샀지만, 경제적인 손해를 입는 이는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가 문제입니다. 빚이 잔뜩 남겨진 경우라면, 상속 포기를 하면 되지만, 법을 몰라서 상속 포기를 못하는 경우 난감한 상황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류하지 않는 자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부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부양할 소득이 충분하니 정부는 지원할 수 없다는 논리는 아직 우리 정부가 부모와 자식을 운명·경제 공동체로 보고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증명합니다. 부모가 자살하면서 자식과 함께 동반자살 하는 까닭도 이와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김영선 시인의 이야기는 힘이 되어주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꼭 필요할때 슈퍼맨처럼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주는 아들과 딸. 평소에는 잔소리의 대상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어린아이들로 보였을 테지만, 엄마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아이들을 모습을 보면서 잘 키웠다, 다 컸다고 생각되셨겠죠.
아직 저는 아이들의 덕을 보고 있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기대는 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제 부모님이 그러하시거든요. 어떤 정리가 필요할 때 전화해서 이런저런 요청을 하십니다. 예전에는 직접 하셨던 일들인데(저보다도 더 잘했던 일인데), 연세가 드시니 안되는 모양입니다. 저도 제 부모님처럼 그러하겠죠.
삶은 돌고 돕니다. 세상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만큼 나에게 돌아옵니다. 꼭 주고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 사는 이치가 그러하므로, 주변 사람들에게 가족에게 잘해야 합니다. 오십여 생을 살다 보니 느껴지는 것, 사람에게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 시 쓰는 주영헌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