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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한국역사바로알기 스크랩 문재인, 이 사실을 알면 국정교과서 이긴다!!!!!!!!!!!!!!!!!!!!
타임로드와타디스 추천 4 조회 614 15.10.28 19:35 댓글 1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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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10.28 19:54

    첫댓글 좋은글이네요 뉴라이또라이들 논리가 한방에 끝이네요

  • 15.10.28 23:03





    "독립문도 고종황제께서 만드셨음.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는 잘못된 것임. 친일파 역사학자들 나쁨"

    ----


    독립문은 일본에서의 독립이 아니라 청나라에서의 독립을 기념하는 것.

    서울 독립문(서울 獨立門)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1896년 11월에 준공되어 1897년에 완공되었다.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 한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1]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2][3]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

    =

  • 15.10.28 23:04


    독립협회는

    독립협회는 1896년(고종 33년) 7월 2일 조선 한성부에서 서재필, 안경수,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박정양 등에 의해 결성, 조직되었다. 협회의 결성을 주도하던 개화파는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반청(反淸) 입장에 섰으며,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에 우호적이며 서구의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이들은 '정동파' 또는 '외국인파'로도 불렸다.

    -------

    이승만도 있고, 일본에도 우호적이었대요.

    우리나라 근현대사 제대로 고치려면 장난이 아님다.


  • 작성자 15.10.29 09:39

    위에 쓰신 내용 중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워왔던 내용이
    "서재필, 안경수,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박정양 등에 의해 결성."...이라는데...

    사실 위 인물들 중 가장 안 어울리는 사람이 이승만 이죠.
    당시 21세..
    독립문이 지어지기 2년전인 1894년에야 겨우 배재학당에 입학했는데...
    독립협회 결성의 주역이라는 것은 좀... 말이 안맞는듯 하네요.

    다른 분들은
    박정양 이분이 1841년 생... 당시 55세 정도로 나이가 가장 많았고...
    이승만을 제외하면 가장 어린 사람이 서재필.. 당시 32세정도였습니다.

  • 15.10.29 07:20

    취지는 좋습니다만.... 일부 해석은 좀 문제가 있네요.

    1. 친일관료는 죄의 경중을 따지지 말고 즉시 목을 베어 바치라는 말은 감정적으로 통쾌한 말일 수는 있지만, 이성적으로는 좋은 명령이 아닙니다. 국가의 사법권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일을 제대로 하고자 했다면 친일관료를 재판에 회부해 법이 정한 처벌을 받도록 하라고 지시했어야 하겠지요. 민간인이 아무나 친일관료의 목을 자를 수 있다면, 법관이 아닌 사람 누구라도 타인의 죄를 맘대로 판단하고, 타인에게 형벌을 사사로이 가해도 된다는 황당한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가 강하게 비판하는 6.25 때의 '인민재판' 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 15.10.29 07:13

    2.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독립문 등이 말하는 독립은 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외세로부터의 독립 개념이라고 확장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립신문-독립협회의 인사들 상당수는 나중에 친일파가 되는데, 이는 그들이 변절을 한 게 아니라 그들의 주 관심사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좀 더 확장하면 러시아의 개입 방지)이고, 이는 일본의 주 관심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친일적 성향의 인사도 독립협회 등에 참여할 여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독립문 건설에도 친일매국노 이완용이 매우 크게 기여한 바가 크고, 심지어 독립문 현판의 글씨도 이완용의 글씨일 지경인데, 이 또한 그런 배경으로

  • 15.10.29 07:23

    보심 됩니다. (독립문의 위치가 대략 현재의 독립문역 부근인 것도, 거기가 청나라에서 의주를 거쳐 구파발 쪽으로 해서 서울로 들어오던 길목으로, 과거 청 사신을 맞던 '영은문'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려고 그 자리에 세운 거죠) 독립신문의 논조를 봐도 반청, 반러시아 느낌은 강하지만, 반일의 느낌은 상당히 약합니다. 오히려 독립신문-독립협회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조선이 제대로 (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그런 공감대가 있었을 정도였지요.

    따라서 '반일' 이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논할 때에는 독립신문, 독립협회, 독립문을 언급하는 건 좀 어색해집니다.

  • 15.10.29 07:18

    3. 내장원의 수입이 늘어난 그림을 가지고 '국가수입 증대' 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잘못 해석한 겁니다. 왕조 국가에서는 '정부 재정'과 '왕실 재정'을 구분해야 하는데, 전자는 국가의 지갑이라 보심 되고 후자는 국왕 개인의 지갑이라 보심 됩니다. 당연히 국가수입이라고 하면 전자를 기준으로 이야기해야 하지요. 하지만 내장원 수입은 후자의 개념입니다. 조선 정부의 지갑이 아니라 고종 개인의 지갑이라는 겁니다. 이게 늘어난 건 정부재정이 튼실해진 게 아니라, 국왕이 딴지갑 차고선 왕 개인 지갑만 불린 거라고 해석하는 게 합당합니다.

    즉, 저 그림은 조선이 부유해진 게 아니라 고종 개인이 부유해졌다는 근거일 뿐입니다.

  • 15.10.29 07:25

    정말 고종이 국가 재정을 튼실하게 하고 싶었다면, 저렇게 급증한 내장원의 왕실 재산 상당수를 국고로 돌려놨어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이승만 시절에 이승만이 딴주머니 차고선 자기가 여러 사기업을 세우고, (대통령 권력을 활용해) 이러저러한 이권사업들을 벌인 뒤 그 관련 수입들을 국고가 아닌 개인 통장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개인 예금고만 불렸다고 할 때, 이걸 국가수입 증대로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설사 이승만이 그 돈으로 각종 복지사업, 투자사업을 벌였다고 쳐도 그걸 국가재정이 좋아지는 걸로 해석하는 건 무리겠지요. 내장원 수입의 논리로 같은 논리로 이해하심 됩니다.

  • 작성자 15.10.29 09:42

    @좋은사랑 물론 취지를 보고 퍼온 글입니다.
    당연히 일부는 좀 더 연구해봐야 하는 사안도 있겠죠.

    그런데 약간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 같으네요.^^

    당시의 조선은 입헌군주제 뭐 이런 것이 아니에요.
    봉건 영주제에서 출발한 다른 나라들과도 달랐다고 봐야죠.
    따라서 국왕의 수입과 국가의 수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출납서계상으로의 구분은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조선은 온전히 국왕의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수입이라는 것도 용도에 따라서는 국왕이 알아서 전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목을 바치라는 부분도
    고종이 개화 초기부터 한 말은 아닌 것 같아요.

  • 15.11.04 19:55

    @타임로드와타디스 조선왕조실록 내용을 보시면 조선은 예전부터 왕실의 수입과 국가의 수입을 분리하여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정이 풍족하면 임금님이 재정 일부를 가로채고, 재정이 모자라면 임금님 지갑에서 돈 좀 꺼내어 보태 놓는...... 조선을 그렇게 얼치기 국가로 보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서양에서 왕실과 국가재정이 분리되지 않은 건 좋은 현상이 아니라 행정 발전이 더딘 후진적 양태였을 뿐입니다. 서양에서도 당연히 행정이 발전하면서 양자가 분리되었지요.

    그리고 이런 분리는 임금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시행하는 것입니다. 국가재정은, 아무리 입헌군주제가 아닌 일반 군주정이나 전제군주정이라 하더라도 국왕 맘대로 쓸 수가

  • 15.11.04 20:00

    @타임로드와타디스 없습니다. 국가재정인 이상, 대신과 신하들이 개입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신하들이 반대하지 않아도 나랏돈은 여론과 백성 눈치가 신경 안 쓰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 지갑은 다르지요. 국가 지갑과 국왕 지갑을 구분하는 건 국왕이 남들의 간섭 없이 내 맘대로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함이며,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에서든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 온 것입니다.

    특히 고종은 먼 고대도 아닙니다. 20세기 초반의 임금이에요. 현대와 아주 가까운 시기의 임금이라는 겁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임금 정도면 대충 그리 쉴드를 칠 수도 있겠으나, 20세기의 임금에게 그런 쉴드는 과합니다.

  • 작성자 15.11.04 22:51

    @좋은사랑 쉴드라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네요.

    위에 써논 내용의 이해를 잘 못하신듯 하네요.

    조선은 기본적으로
    각 지역세력에게 자치권(세금 집행포함)을 가지는 봉건 영지를 주어 다스리게 한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각 지역에 중앙 파견 관리를 두어 다스린 나라입니다.

    조선의 영역 아래서는 기본적으로 지역의 협조를 필요치않는 순수한 임금의 집적적 관할권아래 있었다는 말이죠.

    따라서 위에 쓴 것과 같이..
    실무상 재정의 구분과 달리 사용에 대해 위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니
    쉴드니 하는 괜한 오해는 거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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