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어가는 가을의 한복판에서
시하늘 시낭송 200회 기념 시낭송회를 마치고
첫 번째 201회 시낭송회에 瑞雪 시동인을 초대했습니다.
瑞雪 시동인 24집 『덩달아 수줍다』(그루, 2014)를 만납니다.
1989년 초대 회장 정재숙 시인을 시작으로 25년의 역사를 지녔습니다.
많은 시인들이 여기에 몸담았다 떠나갔지요.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시는 시인은 정재숙 시인과 성명희 시인입니다.
지금은 손미, 안연화, 정재숙, 조영린, 차아란, 구양숙, 김은영, 문차숙, 성명희
이렇게 아홉 시인이 활동하십니다.
건들바위 레스토랑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0월 9일 오후 7시, 한글날에 좋은 사람들과 손잡고 오십시오.
이 가을에 시 한 수 마음에 담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일시 : 2014년 10월 9일
목요일 오후 7시
- 장소 : 중구 대봉동
732-2번지 건들바위 레스토랑(053-421-1500∼1)
- 회비 : 없음. 음식은 직접
구매하셔야 합니다.
- 제공 : 『詩하늘』가을호, 동인지
『덩달아 수줍다』는 안 받으신 분께만 드림
- 음악 : 대금연주-김윤현(장녹수, 한오백년)
오카리나연주-김정혜, 김정희(님이 오시는지, 베사메 무쵸)
동인 피날레 합창-구양숙 외 8명
*瑞雪 시동인 발자취
-25년의 발자취가 너무 많아 간략히 소개합니다.
자세한 것은 동인지에서 확인하시면 고맙겠습니다.
-1989년 동인회 결성, 초대 회장 정재숙, 부회장 황영숙, 총무 김영희
-2013년 총회, 회장 구양숙, 총무 김은영
-2014년 瑞雪 시동인지 제24집 『덩달아 수줍다』(그루, 2014) 발간
동그라미
-손미
당신 앞에서는
저 동그라미입니다
밑도 끝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무엇 하나 가진 것 없어
잴 수도 없는
텅 빈 동그라미 바로 접니다
그래도 당신께서 불러 주신다면
눈물 자국 얼른 지우고 달려가
예 그대여 저는 항상
동그라미입니다
대숲
-안연화
마른기침 소리에
문득 고개 들어 보니
대숲 마디마디 걸린 바람이
다림질된 하늘 길이 낯설다 한다
밑창이 닳은 신발로
낡은 시간 터벅터벅 걸어온
발자국 어디에 놓아야 할까
넌 너무 밋밋하게 닳은 거야
스멀스멀 내미는 원형 얼굴
스산한 폐교 방문객 같은 나는
차마 웃음조차 보이지 못했다
해 넘어가는 서산에
긴 그림자 먼저 보내 놓고
발 들여놓는 포르테 음계
대숲의 하루는 세속 도시를 빼닮았다
길 잃어 헤어나지 못하는 바람이
거기 알몸으로 누워
끊임없이 눈물 찍어내기도 한다
단지 인기척 내버려 두고
시선은 항상 위로만 향하니
눈썹에 걸린 하늘은
커다란 눈물 웅덩이다
미술 시간
-정재숙
나뭇잎에도 뼈가 있다
잎자루에서 잎 끝으로 난
나뭇잎의 척추 뼈는 길고 굵다.
나뭇잎의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허리가 꼿꼿하다
그 허리를 가운데 두고 잎 끝까지 가늘고 짧은 뼈들이 촘촘하다.
그 역시 나뭇잎의 얼굴을 받치고 있다고 목이 빳빳하다.
나뭇잎은 이 꼿꼿하고 빳빳한 뼈들을
등 뒤에다 감추고 뼈대 없이 살랑 살랑 나긋나긋 춤추고 있다.
나는 어느 날 그의 뼈 중의 뼈에 푸른 물감을 듬뿍 칠해 버렸다
그리고 하얀 종이 위에 살살 눌러 콕콕 찍어내었다.
흰 종이에 찍힌 그의 푸른 뼈들은
뼈보다 더 나긋나긋하게 춤춘다. 바람 없어도,
나뭇잎의 본질이 푸르게 누웠다.
도도한 뼈들의 아름다운 흔적들이 나에게 손을 내민다
그의 이름은 작품이다.
日蝕
-조영린
달이
해의 오른쪽 귀퉁이를 베어 물었다.
완벽했던 너의 세계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니
오랫동안 우주 속을 홀로 떠돌며
늘 너의 그림자인 것이 괴로웠지
거칠 것 없던 너의 生에도
빛을 잃을 때가 있다는 것을
드디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달은 태양을 집어삼킨다
4월
-차아란
봄이 물결 따라 흐르고 있네요
정말 천천히 흘러가기를 바라요
바람도 잠시 쉬었다 가면 좋겠어요
만발한 꽃나무와도 오랫동안 마주하고 싶어요
참 빨리 가 버리네요.
그대-4월
옛날 편지
-구양숙
바람이 참 좋습니다
어리고 유순한 연둣빛을 막 벗고
초록으로 몸 바꾸는
나뭇잎들이
참 좋은 때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우리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당신 물었을 때
바람에
나무 이파리 흔들리는 소리라는 내 말에
그 바람에 옷자락 날리며
나 서 있는 언덕을 찾아오마고
그게 당신 사랑이라고
어깨를 감싸 안으며 좋아하느냐는 그 말에
왜 그땐 가만히 있었을까요
살짝 올려다보며 웃었을 때
눈 내리까며 고개 흔들던 때, 그때
그 대답 같이 간 걸 당신 혹 알았을까
잎들이 저리 고운데, 다시 오월인데
발아래
뿌리가 내리도록 기다리고 선 나를
아주 잊으신 건 아닌지
이파리들
살랑대며 부르는 저 소릴
영 못 들으시는 건 아닌지, 당신은
하월곡동 산 2번지
-김은영
하월곡동 산 2번지에 달빛이 웅크리고 누웠다
내장을 토해 낸 벽에 갇혀 주인을 놓친 고장 난 시계는 말라비틀어진 생쥐의 주검을 운명처럼 관찰한다 좁은 골목 간드러지게 쌓인 계단을 처음 오르던 노파는 헐떡이는 숨을, 건초 더미 같은 삶을 이곳에서 마감했다 가루가 된 유골이 폐허로 변한 생전의 일상에 뿌려지고 프리미엄처럼 날개를 달고 바람 길을 오른다 장갑 낀 흰 손을 멈추고 철거 촌 반장이 뿌연 하늘처럼 운다 골목을 풍겨 나오던 분뇨 냄새조차 그리운 사람들이 흘린 눈물은 얼어붙은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한 채 밤새 몽정한 도둑고양이의 분비물같이 질척인다 가난이 다 떨어진 운동화 꽁무니에 붙어 흐느적거리던 지난날이 그래도 그리워 1톤 화물차 한 칸 다 채우지 못한 허름한 짐들이 느린 걸음으로 내려오는 산 2번지
붉은 글씨 철거-27이 포클레인에 무너져 내리는 아침
엊저녁 일찍 들어간 햇빛은 웅크려 꿈꾸는 이들의 또 다른 음모를 기다리며 낡은 호스에서 뿜어 나오는 물줄기로 하릴없이 무지개만 만든다.
그대는 바람이다
-문차숙
번뇌는 갈등에서 비롯된다.
포기하면서
슬며시 끝자락을 내려놓으면
사랑도 괴롬도 다 잊으리.
망각은 단련되는 것
세월 가면 추억 아닌 것이 무엇이랴
아프지 마라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 너이더라
순응하지 않고 욕심내면 괴로운 것이
그대 향함이더라.
너는 내게
무소유냐 비소유냐?
잠시 머물다 갈 것을 꽁꽁
붙들어 매면서 한 짐 짊어진다
감정에 휘둘리고 본능에 충실함도
그 순간은 순정이었으랴
그대는 바람이다
왔다가 가는.
여름은 그렇게 갔다
-성명희
누가 내 등을 두드린다
누군지 알기에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깨를 두드린다
알기에 눈길 주지 않는다
팔꿈치를 당긴다
알기에 뿌리쳤다
그 바람에 넘어진다
너무 거부하면 이렇게 되나 보다
엎어져서 고개 들어 보았다
지천명
어쩌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