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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영광이라
이사야 43:1-7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 후 첫째 주일이다. 특별히 세례 주일이라고 부른다. 세례는 나사렛에서 온 예수가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첫 사건이다. 이 날을 주현 후 첫째 주일로 지키는 이유이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다.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세례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하나님이 양자로 삼으시는 의식이다.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다’, ‘너는 내 영광이다’라고 인정하고, 받아주시는 의식이다. 얼마나 든든한 약속인가?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든든하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또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특징을 ‘불안사회’라고 한다. 2010년에 ‘피로사회’를 쓴 한병철 교수가 2020년대의 한국사회의 특징으로 ‘불안사회’라고 붙였다.
사람들은 이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는다. 그중에 하나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점보는 일이다. 중앙일보가 지난 연말에 ‘불안한 한국, 무속에 빠졌다’는 기사를 냈다. 우리나라에는 등록된 무당만 30만 명인데, 등록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50만 명을 상회할 것이라고 썼다. 얼마나 불안한 사회인지 짐작할 만하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런 행위를 아주 미워하신다.
그리스도인은 ‘희망하는 사람’이다. 미신이나 우상의 말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지닌 희망은 우리에게 미래적인 것, 잠재적인 것, 앞으로 도래할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여준다. 희망은 메시아적 신앙이다.
1)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은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준다.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탁(神託)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려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1)와 같은 공식문구를 사용하였다. 이 구절이 구약성경에만 무려 400회 이상 등장한다.
먼저 “너는 두려워 말라”(1)고 한다. 두려움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할 때 맨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흔히 경외감(‘야레’)이라고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일은 마땅한 태도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인간의 삶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호소력 있게 전한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 참여하시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뜻을 전할 때 맨 처음에 하는 공통적인 메시지가 있다. 바로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으셨다는 언약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가장 큰 약속은 임마누엘, 곧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사야가 전하는 소식은 무엇인가? 구원과 위로의 말씀이었다. 지금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고, 또 너희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오랜 전쟁과 바벨론에게 멸망 후 포로로 잡혀왔다. 그들은 온갖 시련을 겪었다. 얼마나 불안할까? ‘불안’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안사회>를 쓴 한병철 교수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불안에 빠진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희망의 정신’이라고 하였다. 희망은 무기력에 빠진 삶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 날개를 달아준다. 불안이 미래로 가는 길을 차단한다면, 희망은 그 길과 방향을 찾게 해줄 것이다.
이사야의 말씀을 들어보자. 선지자는 이제 바벨론 복역 생활이 끝났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제 흩어진 백성을 모아 안전하게 네 고향, 네 조국으로 돌려보내줄 것이니,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약속은 한마디로 ‘구원’이었다. 여기에서 구원 또는 구속은 히브리어로 ‘고엘’에서 비롯된 말이다. 고엘은 어려움을 당한 친척에게 같은 친척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법적 용어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법적인 보호자가 되셔서 너의 아픔을 치유하고, 파괴된 네 삶을 회복시키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희망의 소식이었다. “지금 말씀하시느니라”는 의미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새 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억압과 포로 생활은 끝났다.
너희에게 새 삶이 열릴 것이다. 특히 시작될 일을 과거형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만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분명하고, 확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2)
이제 포로로 사로 잡혀온 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에도 위험은 클 것이다. 이미 세상이 다 바뀌었다고 불안요소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비록 이전 세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였지만, 여전히 숙제가 많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포로 이후에 태어난 다음 세대에게도 여전히 조국과 고향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을까? 더군다나 귀향길은 위험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가 동행할 테니 돌아가라고 하신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2).
포로에서 해방된다는 소식은 기쁘지만, 사람들에게 환희도 잠시, 두려움이 앞설 것이다. 자녀가 많은 사람은 더 근심이 깊을 것이다. 포로 신세지만 재산을 모은 사람은 얼마가 될지 몰라도, 그 재산 때문에 당장 귀국할 엄두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다. 1945년 8월, 나라가 해방되었다고 해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지고, 끌려가고, 전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다 귀국한 것은 아니다. 지금 여전히 고려인, 조선족, 재일조선인 수백만 명이 살고있는 배경이다.
왜 돌아오지 못했을까? 러시아나 중국, 일본 땅이 살만해서가 아니다. 사람대접을 잘해주어서가 아니다. 지금껏 얼마나 푸대접을 받았는가? 특히 일본이 그랬다.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있다. 돌아오고 싶은 마음을 굴뚝같지만 자기 고향에는 발붙이고 살 손바닥만 한 땅 한 조각조차 없었다. 그러니 자식을 앞세우고 돌아올 용기가 없었다. 우리 사회는 충분한 희망을 약속하지 못하였다. 여전히 나라 안팎의 사정은 불안하였다.
물과 불은 전쟁이나 외적과는 또 다른 차원의 위협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죽음과 같은 존재이다. 물과 불은 이 세상의 악한 것, 적대적인 것, 나를 괴롭히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 23:4)를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선지자는 어떤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한다. 놀라운 일은 포로 된 그들을 석방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루시겠고 하신 것이다.
당시 애굽, 구스, 스바는 모든 민족의 자랑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영광스러운 나라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 있고 부유한 그들 대신에 오히려 반역자요 실패자로 낙인찍힌 포로가 된 그들을 “내 영광”(7)이라고 불러주신다. 하찮은 존재를 기억하시고,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인정해 주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실패자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신다. 하나님이 그 목이 곧은 백성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신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4).
선지자 이사야는 거듭거듭 강조한다. 하나님이 너희를 창조하시고, 지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주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부르신다.
3)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으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었다. 주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후 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동서남북 사방으로 흩어져 살았다.
그럼에도 대를 이어가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며 살았다.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성인식(욤 키푸르) 때 이런 말로 마무리 기도를 한다.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소원이었다. 그것은 언약이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두지 말라...”(5-6).
1894년, 오스트리아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이란 유대인의 각성으로 잠재된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 본격화하였다. 시온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은 버림받고, 학대받고 포로 된 삶을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구체적인 비전이었다.
그때로부터 동서남북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와 키브츠 운동을 전개하였다. 집단 정착 운동이었다. 키브츠라는 말은 “너를 모을 것이며”(5)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마침내 1948년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웃 나라 팔레스타인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하여 지금 전쟁도 불사하고 있는 중이다.
첫 번째 출애굽은 모세가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땅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이끌어낸 사건이다. 두 번째 출애굽은 70년 동안 포로 생활하던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부터 귀환시킨 사건이다.
이사야의 메시지에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놀라운 소식이 담겨있다. 바벨론 포로의 귀환 뉴스 속에 담겨있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바로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만민에 대한 구원의 소식이다. 예수님의 세례 당시 하늘에서 들린 말씀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사 42:1)이 바로 그 내용이다.
‘고난 받는 종이 메시야다’라는 메시지는 바벨론 포로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비전은 그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다.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성경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풀어 낸 함석헌 선생은 이 말씀을 우리 민족을 향한 희망의 소식으로 읽었다. 당시 우리 민족은 해방과 독립, 포로에서 자유와 인간회복이 필요한 식민지 상태였다.
지금 자신의 출애굽을 꿈꾸는 사람은 이 말씀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를 바로 나를 향한 말씀으로 읽을 수 있다.
이사야 시대의 백성이든, 오늘의 현대인이든 사람마다 희망의 동아줄이 필요하다. 불확실성이 커지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세상에서 어느 쪽으로 마음의 방향을 정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음의 방향, 신앙의 방향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한다.
희망의 사람은 지금 보이지 않아도 낙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눈앞에 펼쳐질 새로운 날들은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또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종교라는 형식이 아닌 바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이다.
하나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삼으려는 관계의 출발점, 그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너는 내 것이라”는 말을 인정하여,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 이것이 신앙의 내용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트면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가? 하나님이 내 구원자(고엘)이시고, 법적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하다. 그 사람은 유일한 존재이다. 하나님이 ‘내 것’ 삼으셨으니 얼마나 소중한가?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와 희망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7).
누구나 물질로 채울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무관심해 보이는 냉정한 사람도 깊은 영적 갈망이 있다. 하나님은 내 삶 속에 현존하시며 우리와 친교를 나누시길 원하신다. 내 안에 품은 하나님은 나를 섬기게 하고, 나를 부요하게 하고, 내 삶을 평화롭게 할 것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이 얼마나 내 가까이 계시는지,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느낄 수 있다.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하나님은 더 많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영광이라’(7)고 하나님이 이미 나를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내 믿음과 내 삶에 온전히 같이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