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뛰어난 인사정책의 비법-1
조선시대의’경연(經筵)‘이 5공화국에서 부활하다
최고 수준의 학자와 전문가 면담으로 인재 발굴
신임하는 인물에게는 전폭적인 신뢰와 입지강화
정치권이나 정부부처등에서 애를 먹는 일이 참신하고 진정성 있는 인물선정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인물이라기보다 치기적이고 소신없이 자리만 지키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신중함이 아니라 소심하여 주어진 권위를 잘 활용도 못하고 소통과 타협보다는 적만 만들고 결국은 자질론이 불거지기 일쑤이다.
그러나 대체적인 인물론 평가에서 전두환정권시절의 국무위원 선정은 어떠한 정권보다 뛰어난 인물들을 잘 선정하고 잘 활용했다는 평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물론 전두환(11-12대 대통령)대통령의 평가는 역대 대통령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며,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국민들로부터 부정적인 재조명이 지속되고 회고록에서까지 참회하지 않은것에 대해서 같은 하나회 동지였던 노태우 대통령과도 차별된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에서 사회,경제,교육,과학,문화,외교등에서 당시 뛰어난 인재들을 영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활용한 용병술은 어떤 정권보다도 뛰어났다.(노태우,허화평,허삼수,이학봉,장세동,김진영,조홍,박준병,백운택,박희도,최세창,장기오,정동호등과 황영시,유학성,차규헌등 하나회 인물들은 평가에서 제외된다)
이런 점에서 전두환은 인물선정에 대해 어떻게 고민을 하였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그동안 수차례 정권이 바뀌었지만 장,차관등 인사 정책에서는 그렇게 성공한 인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두환정권시절에는 환경청이 발족되어 환경청장을 지낸 인물로는 박승규(32년생,홍성군출신,고려대,박정희 시절 민정수석비서관,박근혜와 최태민과의 부적절한 문제 처리로 곤욕),박준익( 법무부,보사부,환경분야 최초 국민훈장 고 권숙표박사에게 수여),최수일(31년생,서울산,건대법대,보사부 기획관리실장),박판제청장(39년생,고려대,합천산,공인회계사,5회행시,재무부,사정수석비서관실,조달청장, 수도권매립지 토지매입, 휘발유자동차 무연화 실시, 한국환경공단발족,지방환경청발족,지붕장학회 이사장)이었다.
전두환정권시절의 국무총리와 경제팀 인선
정치적인 평가는 뒤로하고 전두환정권에서 가장 아쉽고 출중한 전략으로는 성공한 인력관리, 인사간택이었다.
남덕우,유창순,김상협,진의종,노신영,김정렬 국무총리가 역임했고 아웅산 테러시에는 아까운 인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동선 기획단장, 김재익 경제수석,민병석 대통령주치의, 김용한 과기처차관, 강인희 농산부차관, 이기욱 재무부차관,심상우 국회의원,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미얀마대사, 서상철 동자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이범석 외무부장관, 서석준 경제부총리등이다, 다행히 최재욱 공보비서관은 생존하여 김대중정부시절 환경부장관을 역임했다.
전두환은 집권한 후 인사문제에서 어떻게 고민하고 인재를 발굴하여 활용했는지 전두환의 회고록과 소설가 천금성이 집필한 ’황강에서 북악까지”에서 발췌하여 정리했다.(황강은 최근 반도체공장의 물공급을 위한 대규모 용수공급을 설계하고 있다.)
경제등 모르는 분야 주 1회 개인 국정학습
경제수석에게 장관과 직접 소통하라 강력지시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서 내가 받아 본 경제관계보고서 가운데 밝고 희망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책이라고 제시된 것도 막연하고 추상적이였으며 누군가 모든 책임을 떠안고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뿐이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달리 책임을 나눠 질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나에게 오기 같은 것이 발동했다, “그래 해보자, 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경제에 관한 지식도 부족하고 경험도 없지만 ‘내가 언제 아는 일만 하고 해봤던 일만 했던가“ 자문하며 스스로 자신감을 일깨웠다.
나는 먼저 경제문제에 관해 나를 보좌하고 조언해줄 경제수석비서관과 경제정책을 책임지고 수행해나갈 우수하고 유능한 전문가를 배치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제수석비서관에는 다른데서 구할 필요도 없이 보안사령관 시절 나의 경제개인 교사였고 국보위에도 참여했던 김재익 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을 쉽게 결정했다.
스텐포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재익 수석은 경제학 이론뿐만 아니라 현실 경제 문제에 관해서도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남덕우 경제부총리에게 발탁되어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을 지냈기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 현황에 관해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복잡한 경제 현황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능력이 있어 내가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고 적절한 결심을 하는데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다.
경제수석은 직급은 차관급이지만 비서실장이나 다른 누구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인 나에게 직보하는 위치에 있는 만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각에서도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는 장관들과 상대해야 한다, 그런데 김 수석이 차관급도 아닌 국장급들과 주로 상대하고 있던 것은 업무처리 절차를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원래 겸손한 성품인데다 청와대에 오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경제기획관에서 기획국장을 지냈기 때문에 전화로 또는 직접 장관들을 불러서 지시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김재익 수석에게 ”대통령인 나를 대신해 지시하고 협의하는 것이니 경제분야에 관한 한 김 수석이 대통령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앞으로 나의 지시나 의견을 관계부처에 전할 때에는 직접 장 차관을 상대하고, 필요하면 장관을 직접 불러 협의를 하라“고 일러뒀다.
나는 그 뒤에도 장관들에게 몇 차례 같은 다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김재익 수석에 대한 나의 신뢰를 보여주려는 뜻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김 수석을 통해 펼쳐나갈 새로운 경제시책이 지난 10여 년간의 정책기조와는 상반되는 것이어서 내각의 일부 부처에서 반론이나 이의를 제기하며 저항하는 경우도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반론에 대해서는 김재익 수석이 충분한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나의 신임을 보여줌으로써 김 수석의 입지를 한층 더 강화해주고자 헀던 것이다.
신뢰한 부하에게는 독려하고 뒷받침을 해줘
나는 군에 있을 때에도 일단 신뢰해 임무를 맡긴 부하에게는 그가 소신과 책임감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최대한 힘을 실어주고 밀어주었다.
아무리 유능하고 뛰어난 지도자라 하더라도 천수천안(千手千眼)을 지닌 것이 아니므로 모든 것을 혼자서 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부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껏 임무수행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뒷받침을 해준다는 것이 나의 지휘철학이었다. 나는 김재익 수석 때도 그랬고 그 후임인 사공일,박영철경제수석비서관에게 보다 많은 역할을 맡겼지만 한편으로는 한계를 분명히 지키도록 사전에 주의를 주었다.
경제부처 장관에게 나의 지시를 전하고 업무협의를 하되 정책추진의 권한과 책임은 어디까지나 장관에게 있는 만큼 정책 수행의 전면에는 나서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밖의 다른 수석비서관들도 나의 재임기간 중 정책 수행과 관련해 국민과 언론을 직접 상대하는 일에는 나서지 않았다.
경제정책을 시행하는 경제부처의 장차관과 달리 나의 경제참모인 경제수석비서관은 직업 관료 출신보다 교수,학자 출신을 선택한 것이다, 재임 중 경제정책의 기조가 과거 20년간 일관해왔던 성장 위주 정책과는 반대로 안정,자율,개방을 지향하는 것인 만큼 어느 정도 타성에 젖어 있는 직업관료보다는 넓은 시각으로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있고 개혁적 성향을 지닌 학자 출신이 필요했다.
관료주의는 정부 정책의 일관성 유지,추진력,능률성등의 측면에서 필요한 요소도 있지만 현실에 안주하거나 부처이기주의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나의 경제보좌관으로는 직업 관료 출신 대신 각 부처의 상충되는 입장이나 이견에 구애받지 않고 보다 넓은 시각과 긴 안목으로 조율할 수 있는 학자 출신들을 선택했다.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 서정원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