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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말씀
오늘 복음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제자들에게 청하고, 제자들은 그 말을 예수님에게 전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그들을 실제로 만나셨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전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보전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이런 말씀들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육칠십 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신앙에 대한 일종의 명상록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리스 사람을 등장시킨 동기가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들을 전혀 모르고, 합리적 사고를 하는 비 유대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지를 말하려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영광이라고 말할 때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인물이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인물의 중요성에 공감하며, 그것을 큰 감동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말은 그 죽음으로 그분의 중요성이 나타났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큰 감동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이 왜 그리 중요하고, 감동스런 것인 지를 구약성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의 삶은 그분의 죽음 후, 제자들 안에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의 실패를 의미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의 의미를 알아듣고,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도 말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그분의 삶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기에, 이제부터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들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그 삶의 특징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이 하셨던 실천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실패와 죽음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두 그렇게 실패하고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실패의 최후를 맞이하신 것은 그 시대 유대교 사회의 실세들이 가르치던 것과는 다른 하느님을 그분이 믿었고, 그 하느님의 일을 공공연히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의 문자(文字)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벌을 주는 엄한 하느님이라 믿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하늘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꽃을 보아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새와 꽃도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3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기 한 사람의 목숨만을 소중히 생각하지 말고, 자비하신 하느님에게 신뢰하면서 그 자비를 스스로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유대교는 믿었습니다. 물론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거부하셨습니다. 인간과 함께 계시며, 돌보아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그 생명이 하는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치셨습니다. 유대교가 말하듯이 병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교도인 백인대장의 종(루가 7,1-10)과 시로 페니키아 여인의 딸(마르 7,24,30)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종교가 다르다고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병든 사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 이런 불행한 생명들을 당신 한 몸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도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인간은 자유를 지녔습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가족도 직장 동료도 모두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가족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기 가족 외의 다른 모든 인연을 외면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느님과의 인연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느님이 아끼시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예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혁명을 하지도 않았고, 양극화를 비난하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사람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벗이라 불렀습니다(요한 15,15). 제자들이 떠나가서 각자 자유로이 열매 맺을 것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존경스런 호칭이나 복장으로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들의 벗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서, 그분과 같은 열매를 맺겠다고 약속한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존경과 찬양을 받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하게 처세하여 입신출세하고, 그것을 하느님이 베푸셨다고 주장하는 속물들의 처세술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따라 맺은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실천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은 자기 주변의 허약한 생명들, 외로운 생명들, 고통 받는 생명들을 특별히 보살핍니다. 하느님이 그들도 행복할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버려진 자기의 이웃들을 백안시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열매 맺는 신앙이 아닙니다. 주변의 생명들이 우리와의 인연으로 기뻐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묵상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땅에 떨어진 밀알 한 톨에서 마흔 개가량의 씨앗이 맺힙니다. 이렇듯 씨앗 안에는 수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땅에 떨어져 그 자신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생명의 빵을 주시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살리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죽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날마다 순간순간 죽을 때 세상은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알아봅시다
1. 성지와 순례지 성지(聖地, Holy Land)는 원래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활동하시다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땅을 통틀어 일컫는 표현입니다. 이 땅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기도 합니다. 이 땅을 교회에서는 라틴말로 ‘팔레스티나’라고 불러왔습니다. 이렇게‘약속의 땅’, ‘거룩한 땅’인 성지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활동 무대인 팔레스티나 전체를 가리키지만 좀 더 좁은 의미에서 거룩한 장소(터)를 가리키는 성지(聖址, Holy place)도 있습니다. 이것은 팔레스티나 전체가 아니라 팔레스티나에서 예수님이 삶과 죽음과 관련되는 특정한 장소나 지역을 가리킵니다.(예 : 베들레햄 동굴, 나자렛, 타볼산, 갈릴래아 호수, 베타니아, 겟세마니 등) 그런데 이 두번째 의미의 성지는 세월이 점차 흐르면서 예수님과 관련되는 곳만이 아니라 성모님 발현지, 사도들의 활동지, 순교자나 성인들 순교지나 묘소, 하느님 은총으로 이적(異蹟)이 일어난 곳, 유서 깊은 성당 등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팔레스티나를 가리키는 성지(Holy Land, terra sancta, 聖地)든 거룩한 장소를 가리키는 성지(Holy Places, loci sancti, 聖址)든 영어나 한자어로는 명확하게 구별이 되지만 우리말로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가톨릭대사전」에서는 거룩한 장소를 나타내는 두 번째 의미인 ‘성지’(聖址)를 ‘성역’(聖域)으로 바꿔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구별을 천주교 용어위원회에서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성지’(terra sancta)'는 본래 예수님과 관련된 이스라엘 땅을 말하지만, 성모님이나 성인 또는 순교자 관련 사적지나 순례지(sanctuaria)를 일반적으로 ‘성지’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는 문제 삼지 않는다. ”정리하면 본래 성지는 예수님과 관련되는 땅 팔레스티나를 가리키지만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팔레스티나 곧 이스라엘 땅 뿐 아니라 성모님과 성인들, 순교자들과 관련된 사적지나 순례지까지 다 포함해서 ‘성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순례지란 “많은 신자들이 교구 직권자의 승인 아래 특별한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서당이나 그 밖의 거룩한 장소를 뜻한다.”고 교회법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자면, 성인이나 순교자 무덤이나 순교지가 아니더라도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 성모님의 발현이 일어난 곳, 성체 기적 같은 특별한 기적이 일어난 곳 등에는 많은 신자들이 찾아가 성인 유해를 참배하며 특별한 공경을 바치거나 그 일이 일어난 의미를 되새기며 신앙을 키우곤 합니다. 이런 곳들에 대해서 교회가 공식으로 순례지로 인정할 경우에 순례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순례지는 교구가 인정하면 교구 순례지로, 그 나라 주교회의가 인정하면 국가 순례지가 됩니다. 국제 순례지가 되려면 교황청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국제 순례지와 국가 순례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대희년 때에 각 교구들이 주교좌성당을 비롯해 교구 내 주요 성지들을 순례지로 한시적으로 지정한 바 있습니다. (평화신문)
손석준 엘리야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http://love.chonnam.ac.kr/~sohnsj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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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중미사에 많은 도움이 되어 무척 기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