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마
"모스크의 돔이 아잔 소리에 공명한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니
너희는 예배하러 오너라.
지평선 너머 아득한 끼블라를 향해 엎드린
전사들의 눈에 모닥불이 일렁인다.
이 밤이 새면 길 떠날 푸른 젊은이들
꿈틀거리는 새벽이 무희의 미끈한 허리처럼 다가오는데
캬라반의 꿈길을 밝히며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파이잘, 너는 시인이구나.
모닥불 저 편에서 긴 목을 뒤로 젖힌 지형이 수염이 거뭇해진 파이잘을 올려다본다.
4년 전 서울에서 보았던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소년은 어느새 육 피트를 넘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횡성의 M 고교를 졸업하고 진학한 Y대 교환학생으로 예일대에 온 그녀 역시 숙녀 티가 물씬 난다.
“근데 조금 외설스럽다아---,”
승은이가 토를 단다.
찬스에 강한 앤디가 재빠르게 끼어든다.
“그 쪽이 원래 좀 그래. 아라비안나이트부터가 순 포르노잖아.
앤디의 은근한 견제에 파이잘을 제외한 모두가 킬킬 댄다.
지형의 주변을 맴돌며 암투를 벌이는 청년들, 앤디와 파이잘도 예외는 아니다.
지형과 동급생이던 파이잘은 후배인 앤디와 함께 금년에야 예일로 진학한다. 예비 학교(Prep. school) 때문에 입학이 늦어진 탓이었다.
오늘 밤은 파이잘과 앤디,
두 사람의 예일대 입학을 소년단 동기들이 축하하는 자리다.
비록 조촐했지만 각국에서 날아온 그들 모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두바이의 왕위 계승자 파이잘은 지형 못지않은 소년단의 스타다.
앤디가 일어섰다.
“나는 시를 써본 적이 없어. 그러니 예이츠를 좀 빌려올께.
파이잘과 초우트 동급생이지만 오레곤 출신의 서민층인 그는
장학금으로 어렵게 졸업했다. 대부분이 부유층인 소년단에서
그는 오직 본인 능력만으로 동참한 존재였고 그 때문에 주위로부터 더욱 존중 받았다.
평소 부르조아 친구들을 다소 시니컬한 시선으로 보던 앤디가
낭송을 자청하자 다들 손뼉으로 환영했다.
“그래 들려줘.
잠시 침묵하며 분위기를 잡던 앤디가 낭랑하게 읊기 시작했다.
변성기는 이미 지났지만 아직 맑은 청년의 음성에 실려
예이츠가 모닥불 앞으로 강림하고 있었다.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카페트가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카페트가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 밑에 깔아 드리련만
젊은이들은 모스크에서 울려퍼지는 아잔의 가락처럼 리드미컬한 앤디의 낭송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남풍이 모닥불의 화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둘러앉은 청춘들의 그림자도 바람결을 따라 일제히 춤추며 일렁인다. 낭송 하는 앤디의 꿈꾸는 듯한 눈길이 모닥불 너머의 지형에게 고정되어 있다.
“나, 가난하여 가진 것은 꿈뿐이라
그대 앞에 내 꿈을 깔아 드리오니
사쁜히 밟으시라, 그대 밟는 것은 나의 꿈이오니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청춘들의 모임에 어울리는 낭만적 시였다.
그것은 어쩌면 지형을 향한 앤디의 연가인지도 모른다.
낭송은 끝났지만 싯귀에 취한 젊은이들은 여운을 즐기며 잠시 침묵했고
주변은 정적에 잠겼다. 풀벌레 소리가 이따금씩 찌르륵 대고 있었다.
이윽고 야트막한 탄성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지그시 눈을 감고 듣던 파이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 언제 들어도 좋군.
두 번 다시 누리지 못할 청춘을 향한 사무친 그리움, 그리고 슬픔.
앤디가 의아한 표정으로 파이잘을 보았다.
“너 만한 신분만 될 수 있다면 청춘 따위, 개나 물어가라는 사람이
저 미식 축구장 끝까지 줄을 설 꺼다.
“신분이라---, 아냐, 아니야. 꿈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늘진 눈의 파이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서라도 바꾸고 싶은 건 바로 나야.
두바이 왕국의 계승자인 그가 청승떠는 배경을 친구들은 짐작한다.
2차 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 곳곳에 멋대로 줄을 긋고 새 국가를 만들었다. 이라크의 일부를 떼어낸 나라가 쿠웨이트였고 시리아의 일부를 떼낸 곳이 레바논이었다. 게다가 이스라엘까지!
이렇게 급조된 나라들은 무슬림의 바다에 뿌려진 분쟁의 씨앗들 이었다.
올림포스에서 벌어진 신들의 장난으로 일어난 트로이 전쟁만큼이나 황당한 것이 오늘의 중동이다. 석유자본이 마음껏 약탈하고 현대화라는 미명아래 서방업체들이 마구 휘젓고 다니는 것이 조국의 현실이었다.
외국기업들에게 주권마저 휘둘리는 현실을 혐오하지만 힘없는 스스로를 가슴 아파하는 파이잘의 심정을 헤 아린 친구들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파이잘, 조만간에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다가간 지형이 파이잘의 손을 살그머니 쥐었다.
처녀의 눈 속에 박힌 모닥불이 일렁이고 있다.
가슴이 따뜻해진 파이잘도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마주 잡았다.
막상 분위기를 연출한 앤디는 닭 쫓던 개처럼
손을 마주잡은 두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초우트의 쁘레피들 아니신가?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기숙생(Boarding School)인 파이잘은 그들을 모르지만
Day School 학생인 앤디와는 등하교 길에 안면이 있는
인근의 공립학교 학생들이었다. 비록 안면이 있지만
이름까지 알 정도는 아닌 앤디는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결코 좋은 뜻으로 다가온 녀석들이 아니었다.
“안녕, 난 앤디야. 여기는 친구들. 산책 중이니?
“음. 난 포스터야. 좀 끼어주라.
그는 승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또 다른 녀석이 마리화나와 술 냄새를 푹푹 풍기며
앤디와 지형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왜들 그래. 잘 지내보자구. 옐로우 쁘레피.
포스트가 한 팔로 어깨를 감싸려 하자 질겁을 한 승은이가 벌떡 일어 났다.
“너, 포스튼지 뭔지 하는 자식, 언제 봤다고 내게 손을 대?
승은이가 치를 떨며 노려보자 녀석들은 킬킬 댔다.
“제법 한 성깔 하는데,
파이잘이 일어났다.
“우린 사적인 대화 중이야. 모르는 사람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니
그만 가시지.
“오, 옐로우 쁘레피, 그래 끼어들면 어쩔 건데--?
뒤에 서 있던 녀석들 중 하나가 지형의 팔을 잡았다.
“좋아. 사라져주지. 대신 이 암컷도 데려가지.
안색이 변한 파이잘과 앤디가 팔 잡은 녀석을 노려보며 한 발자국 나섰다.
그러나 손을 들어 제지한 지형이 목소리를 차분하게 깔았다.
“허락 없이 숙녀 몸에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겠지?
“허락 따위는--- 아얏!
팔을 잡았던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다.
쪼인트를 사정없이 까인 것이다.
“이제 보니 암컷들이 한 성깔 있구만. 하지만 난 그런 게 더 좋아.
느물대며 지형에게 다가가는 포스터의 어깨를 뒤에서 앤디가 잡았다.
순간 획 돌아친 주먹에 복부를 강타당한 앤디는 푹 고꾸라졌다.
“앤디!
놀라서 부축하려는 지형의 허리를 굵은 팔뚝이 감아 당겼다.
“헤이. 아가씨는 우리하고 놀아야지. 포스터였다.
“그래 놀아보자.
싸늘한 목소리와 동시에 포스터의 거구가 헉 하며 공중을 날았다.
허리를 감은 그의 팔뚝을 잡아챈 깨끗한 업어치기 한 판.
“어--? 엇---!
놀란 패거리들. 벌떡 일어선 포스터, 황소처럼 씩씩대며 달려든다.
그러나 헛손질만 거듭할 뿐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한다.
덤벼드는 그를 한 걸음 또는 반걸음씩 비키거나 몸을 회전하며 가볍게 피한다. 그녀를 쫓는 포스터의 숨결은 점점 거칠어간다.
의외의 장면이 연출되자 주춤대며 지켜보는 파이잘과 청년들
“으와악...!
마침내 성질을 이기지 못한 포스터의 태클.
“저런!
체중을 이용해 덮치는 태클은 들소의 돌격만큼 위험하다.
그러나 몸을 빙글 돌려 가볍게 벗어난 지형은 공중에 몸을 날린 거구가 떨어지기 전에 샌들 신은 발을 짧게 차올렸다.
쿵, 땅을 울리며 추락한 포스터는 일어나는 대신 등을 새우처럼 꼬부렸다.
호흡이 막힌 얼굴이 삽시간에 꺼멓게 죽어간다.
당황한 패거리들이 바로 눕혀 몸을 주물렀지만 막힌 숨통은 터지지 않았다.
“너희 따위 예의 없는 것들은 절대로 치료 못해.
노려보는 패거리들의 험악한 기세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지형이 내 뱉었다.
“잘못했다 빌어. 그럼 살려줄 수도 있어.
안색이 불길한 검은 색으로 바뀐 포스터의 목에서
심상찮은 꼬르륵 소리까지 나자 패거리들은 표정이 질려갔다.
떨어지는 힘을 맞받아 올려찬 발길에 정통으로 명치 급소를 차였으니
성할 리가 없다. 얼굴에 서리가 낀 지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닥불만 쬐고 있다.
“레이디, 우리가 잘못했어. 이 친구 좀 살려줘.
마침내 한 녀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잠시 노려보던 지형은 포스터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거기 너, 이 자식 잡아.
패거리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찍 소리 못 하고 어깨를 잡는다.
목뼈부터 경추를 따라 눌러 내려오던 손가락이 중간쯤 지나자
손바닥을 오무린 그녀는 널찍한 등 복판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가 광장을 울린다.
“커억! 쿨럭 쿨럭--.
기침을 터트린 포스터가 콜록대기 시작했다. 호흡이 터졌다.
한동안 기침을 계속하던 포스터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눈을 쳐들다 빤히 내려다보는 지형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노려보던 지형이 팔을 쭉 펴들더니 손을 까딱까딱 했다. 또 덤벼보라는 도발이었다.
하지만 포스터는 앉은 자세 그대로 궁둥이를 밀며 주춤주춤 물러난다.
물러나던 포스터가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자 패거리들도 잽싸게 뒤를 따랐다.
둘러서 있던 여자들이 환성을 올리며 지형을 에워쌌다.
“와우, 아마조네스
“원더 우먼
그러나 파이잘을 비릇한 청년들은 의문에 찬 얼굴로 지형을 주시했다.
제 아무리 민첩한 운동 신경을 가졌다 해도 방금 일은 설명이 어려웠다.
자기 체중의 세 배도 넘는 거구를 업어치기로 날리려면
기술 못지않게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은 여자의 한계를 넘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가볍게 날려버렸다.
공격을 쉽게 피한 것 또한 이상했다.
포스터는 길거리 농구에서 두각을 드러낸 신예라는 소문이었다.
농구란 권투나 축구 이상으로 격렬한 운동이다.
격렬하다는 것은 좁은 코트 안에서 더 빨리 더 많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러니 농구란 날렵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그런 자를 아이 데리고 놀 듯 가볍게 상대하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KO 시켰다.
이 늘씬한 아가씨는 외계인인가?
청년들의 표정을 읽은 지형은 이제 묻어두었던 장검 경전의 비밀을 밝힐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차피 원래 소유자인 두바이 왕실에 전해야 할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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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발설하기는 너무 엄청난 내용이라 부친을 통해 연구소 원로들과 의논 했다. 이윽고 경전의 의미를 깨달은 연구소는 이를 중대 사태로 받아들였다.
이는 무슬림 국가들과 유대를 맺을 좋은 기회였지만
이 일의 빌미로 무엇을 바라면 안 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예언자의 전승이 명백한 이 경전을 놓고 대가를 거론했다가는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어 이슬람권의 공적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때문이었다.
선의로 경전을 전달하자, 무욕이 대욕이라는 결론이었다.
그 동안 이 사실을 묻어두기는 지형에게 쉽지 않았었다.
수영을 하건 달리기를 하건 늘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파이잘이 대학생이 되는 금년이 그 부담에서 벗어날 적기일지도 몰랐다.
베링 자치주 사절단의 두바이 방문은
라마단을 앞둔 2003년 여름에 이루어졌다.
방학을 맞은 파이잘과 지형을 대동한 사절단은 공항에서
두바이 왕궁의 수반 유수프 왕자와 원로 울라마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왕궁의 부속 모스크,
끼블라 방향을 나타내는 반원형의 오목한 정면 벽을 향해 서 있는
울라마들, 그리고 벤 유수프와 파이잘,
모스크의 앞마당의 신성한 샘물에 경건한 태도로 손을 씻는 지형.
하얀 히잡으로 얼굴과 상반신을 감싼 처녀는 나무 상자를 공손히 받쳐 들고
울라마들과 유수프 왕자 앞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상자를 받는 유수프 왕자, 감동으로 와들와들 떨린다.
상자 속의 황금 궤를 연다. 모습을 드러내는 양피지 묶음.
전설의 장검경전이 드디어 이슬람의 아들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경건한 동작으로 장검과 황금 상자를 모스크에 봉헌한 울라마들과 유수프 왕자는 일제히 정면을 향해 엎드린다.
양피지를 펼친 백발의 울라마가 느린 아잔의 가락으로 낭송을 시작한다.
무슬림들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예언자의 유일한 혈육, 파티마에게 전해진 경전은 그녀의 남편이자 예언자의 전우 알리에게 전해져 파티마 왕조로 계승되면서 장검에 새겨졌다.
신중하게 3중의 보호 장치를 거쳐 비전을 담은 장검은 다시 동방 이스마일 파의 하산 왕조로 전승되어 무적의 아사신 단을 양성했다.
그러나 몽골 침략으로 하산 왕조의 수도 아라라트 산성이
초토화되고 성안의 모든 생명이 학살당하면서 장검은 사라졌었다.
장검은 물론 그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8백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실전되었던 예언자의 전승이
되돌아오는 역사적 순간이다.
감격한 무슬림들.
경전의 진위는 지형과 파이잘이 이미 몸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경전이 예언자의 전승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일행을 환영하는 왕실 만찬에서 유수프 왕자가 연설하고 있었다.
“마드무아젤 하, 그리고 극동 연구소의 귀빈 여러분,
13억 무슬림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이슬람을 대표하는 존재도 아닌 미천한 제가
어떻게 이런 축복을 누리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파이잘,
내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이 너를 소년단 캠프에 보낸 일이었구나.
이 경전은 꾸란, 하디스와 마찬가지로 신성한 것, 이제부터 이 경전은
두바이의 모든 모스크에서 예배 기도문으로 사용될 것이다.
유수프 왕자의 목소리는 감격에 넘쳐 떨렸다.
감사로 시작되었던 연설이 차츰 선언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800년도 넘는 긴 세월동안 우리 무슬림은 예언자의 가르침 중 핵심을 놓치고 살았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우리 이슬람 세계가 서구 세력에 밀려 위축된
원인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이제 우리는 힘의 원천을 되찾았어.
마드무아젤 하,
그대가 찾아낸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슬람의 자부심이다.
우리 무슬림의 힘을 돌려준 것이다.
예언자님의 축복이 없다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대는 예언자께서 축복한 성 처녀,
동방에 환생한 파티마임에 틀림없다.
유수프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려하지도 않고
사절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알랄라일 알라
일제히 이어난 사절단들도 이마와 가슴으로 손을 옮기며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하얀 히잡의 지형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알랄라일 알라
유수프가 두 팔을 쳐들며 부르짖었다.
“무함마드께 영광을, 파티마에게 축복을
울라마들이 화답했다.
“무함마드께 영광을, 동방의 파티마에게 축복을
‘동방의 파티마’
실로 영광스러운 칭호였다. 영웅을 존중하는 무슬림들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등한 동료이며 친구로서의 존중일 뿐이다.
그러나 예언자의 딸 파티마는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와 같은 이슬람의 성녀.
에집트와 당시 이슬람 세계의 절반 이상을 통치했던 시아파 왕조의 이름이기도 한
파티마라는 존칭이 산 사람에게 바쳐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장검 경전에 얼마나 깊이 격동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절단원들의 우려 섞인 눈길이 진 소장을 향했다.
군중심리에 편승해 과한 대접을 누리는 것은 훗날을 위해서라도
생각해볼 일이었다. 진 소장이 일어섰다.
“존경하는 울라마 여러분, 그리고 유수프 왕자님,
여러분이 기뻐하시는 모습에 저희 역시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위대한 이슬람괴 무함마드께 존경을 표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저희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알라의 뜻일 뿐.
저희 인간이 어찌 감히 알라의 뜻을 촌탁할 수 있겠습니까?
원래 여러분의 것이던 경전을 돌려받으신 것입니다.
기뻐하시는 여러분을 보는 것만으로도 먼 길을 온 보람을 느낍니다.
이후 저희를 친구로 여겨주신다면 그 이상의 기쁨이 없겠습니다.
아울러 저희 딸을 파티마 - 그 이름에 축복이 있기를! - 로 불러주신 것은
실로 영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디 그 칭호는 거두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한낱 이방인이 어찌 그런 영광스러운 칭호를 감당하겠습니까?
너무 과한 칭호는 이 아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를 진정 아끼신다면 부디 거두십시오.
답사를 듣는 유수프 왕자와 울라마들이 깊은 눈길로 사절단과 진 소장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끄덕여 공감을 나타냈다.
모스크에서 경전을 낭송한 늙은 울라마가 일어섰다.
“실로 사려 깊은 말씀.
우리는 이미 여러분을 친구로 여깁니다.
파티마의 존칭에 관한 진 소장님 말씀은 지극히 옳으십니다.
따라서 공식적 사용은 보류하겠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마드무아젤을 그 이름으로 부를지도 모릅니다.
무릇 진정한 무슬림이라면 오늘 우리가 느낀 감동을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칭으로 그 이름을 부른다면 저희로서도 어찌할 수 없지요.
아름다운 우리의 파티마여,
백발의 울라마는 자애로운 시선으로 히잡에 싸여 눈만 반짝이는 지형을 바라보았다.
“부디 우리 무슬림들의 애정을 사양하지 마십시오.
벤 유수프는 이슬람 교단과 상의 끝에 이 경전을 공개하기로 했다.
예언자의 전승을 한 국가가 독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자국의 보물을 서슴치 않고 공개한 유수프의 도량에 아랍 연맹국들은 깊이 감복했다.
그래서 숙의를 거듭한 총단의 울라마들은 예언자 가문인 하심가에
버금가는 정통성을 두바이 왕실에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곧 두바이 왕가를 아랍연맹의 종교적 맹주로 예우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두바이 왕가의 행동은 이슬람 교단이 보증 하는 아랍권의 대표성을
갖게 되었다.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이슬람 고유의 수련법은
무슬림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장검 경전을 발견해 이슬람에 돌려준 지형을
동방의 파티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울라마의 예언이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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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얌, 파이잘은 어디 있지?
벤 유수프가 아내 움므 하니에게 물었다.
벤은 아내의 원래 이름인 움므 대신에 마르얌(마리아의 아랍식 발음)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정원에 있어요. 마드무와젤 하랑
“둘이서만...?
“아이샤하고 잘랄도 같이 있어요.
아이샤는 벤 유수프의 막내 딸이다.
언니나 여동생 없는 외동 딸로 자란 그녀는 지형을 꼬리처럼 착 달라붙어 따라다녔다.
“그 애가 그렇게도 좋은가?
어떻게 아들 녀석이나 딸년이나 모두 걔하고만 몰려다니지?
움므는 웃었다.
“그건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얘기를 얼마나 재미나게 하는지 몰라. 아이샤는 영화를 직접 보는 거보다 언니한테 듣는 게 더 재미있대요.
벤 유수프는 탄식했다.
“허어, 캡틴 하는 복도 많아.
공부에다 그림에다 사교성까지 좋으니 어디서 그런 복 덩어리가 생겼지.
“몸은 또 얼마나 날씬한 대요.
수퍼 모델 언니라며 아이샤가 꺼뻑 죽 는다니까요.
“어험--, 험
외간 여자의 몸을 화제 삼는 것은 무슬림 남성에게 금기사항이다.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던 유수프가 잠시 후 불쑥 말했다.
“그건 경전 수련 탓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파이잘 남매들과 어울린 지형은 히잡을 벗고 있었다.
남자 앞에서 히잡을 벗는 것은 그를 친척으로 여긴다는 의미다.
대추야자를 집어먹던 그녀가 말했다.
“미국에선 여기다 피칸을 붙여먹더라.
“우린 그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이샤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종알댄다.
“난 코레아가 어딨는지도 몰랐어.
언니 때문에 지도를 뒤져봤어 태평양 서쪽 해변이더라.
중학교 2년생인 아이샤의 말에 지형은 웃었다.
“한국인은 자기들이 태평양 서쪽 해변에 산다고는 생각지 않아.
동해나 서해라고 하지, 우리 아이샤는 생각하는 스케일이 크구나.
“응, 걔는 그래, 성질부리면 왕궁이 홀랑 뒤집어져.
잘랄이 놀리자 아이샤의 얼굴은 금세 빨개졌다.
“내가 언제? 오빠야 말로 언니 앞에서 동생 흉이나 보고---
파이잘 남매는 3년 터울이다.
6년 위인 파이잘에게는 꼼짝도 못하는 아이샤지만
바로 위인 잘랄에게는 일수 맞먹으며 대든다.
“지형 언니는 어디 살아? 서울에서도 살고 캄차카에서도 살잖아.
게다가 지금은 미국 살고, 도대체 집이 몇 군데야?
소녀의 궁금증은 끝이 없었다.
처음에는 큰 오빠 친구였고 다음에는 장검 경전의 전달자로 나타난
지형의 신분은 양파껍질 벗기듯 알아갈수록 끝이 없었다.
부친은 선장(이 대목을 아이샤는 부러워했다.)이고 세계에서 제일 긴 땅,
베링 자치주를 개척 중이며 극동 연구소라는 신비집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본인은 예일대를 다니는 한국의 Y대생이기도 하다.
‘이 언니의 진짜 신분은 CIA 비밀요원인데 아마 감추고 있는걸 거야‘
아이샤의 조그만 단발머리 속에서 파티마 언니 - 와아, 파티마님이 언니라니--! 친구들이 알면 얼마나 부러워할까? - 에 대한 환상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아이샤, 언니 좀 그만 들볶아라. 이젠 들어가 공부할 시간 아냐?
파이잘의 말에 아이샤는 금방 울상이 된다.
왕실의 장남 파이잘은 집안에서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는 존재다.
게다가 아이샤의 우상이기도 하다.
잘랄과 토닥대다 울며 달려오는 아이샤를 달래주곤 하던
든든한 큰오빠 파이잘은 오랜 미국 유학으로 더욱 의젓한 용모와
사려깊은 성격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파이잘이 자기를 곁에서 쫒아낸다는
생각에 서러워진 소녀는 금세 글썽해졌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떠나버릴 텐데----,‘
지형은 글썽이는 아이샤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파이잘을 바라보았다.
“우리 10분만 더 같이 있자, 응?
파이잘은 마지못해 끄덕인다.
빨리 동생들을 쫓아내고 둘만 있고 싶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
“와아, 언니가 최고야.
금세 풀린 아이샤가 지형의 허리를 안으며 매달렸다.
“아이샤, 너 그러다 업어치기 당한다.
파이잘이 놀렸다.
“무슨 치기?
“파티마가 괜히 얻은 이름인줄 아니?
한다하는 미국덩치들도 지형이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아 장검 경전! 언니 정말 그거 읽으면 무술을 할 수 있어?
아이샤의 질문을 파이잘이 가로챘다.
“그건 내게 물어야지. 나도 6개월째 하고 있는데 정말 신기해
- 무함마드께 영광을. - . 잘랄, 그리고 아이샤. 너희는 장차 두바이를
대표할 신분이야. 경전가문 출신이 그걸 모른다면 우습잖아.
지형이와 나 있는 동안 열심히 배우도록 해.
“으응, 오빠
화제가 공부 쪽으로 돌아가자 아이샤가 시무룩해진다.
하지만 지형 언니에게 배운다면 사정은 다르다.
경전 공부를 핑계로 붙어지낼 수 있다.
얼굴이 밝아진 소녀는 단발머리를 나풀대며 잘랄과 나란히 복도로 사라져갔다.
“나 요새 대장금이라는 한국 드라마 보고 있어. 너두 봤니?
“응, 그거 한국에서도 인기였어. 여 주인공 참 예쁘지?
“리 영아이던가?
예쁘긴 한데 고전적이지. 전통의상 근사하더라.
한국에서도 옛날에는 히잡을 쓰던데?
“히잡이라니? 아아, 장옷! 그거는..... 응, 히잡 맞네!
장옷과 히잡이 같은 용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형은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었다. 헐렁한 조깅용 회색 티셔츠를 걸친
그녀가 고개를 젖히며 웃자 조용하던 정원의 붉은 꽃 사이에서
나비가 날아올랐다.
“어머, 여기도 나비가 있네.
“‘여기도’ 라니? 어째 무시하는 말 같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라는 세일즈 스피치 못 들어봤냐?
팔레스타인이나 여기나 다 이웃 동네라구.
“아 미안 미안, 네가 두바이의 왕자님이라는 걸 깜빡했어.
사막을 무시할 리가 있겠니?
우리 베링 자치주야말로 얼음 덩어리 그 자체인데.
“그래 어릴 때 봤었지.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네. 요즘은 많이 달라졌겠지?
“그래 자치주로 정식 발족하고부터는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중 이야.
우리 아빠는 캄차카 원주민이 다 됐더라.
“하 선장님, 아니 지금은 자치주 사업단장님이시지.
참 대단하셔. 어떻게 자기부상열차로 베링 해협을 통과할 생각을 해 내셨다지?
“그건 할아버지 작품이야. 아빠는 물려받은 거고.
“너도 그걸 물려받을 작정이야?
어쩐지 긴장된 기대감이 느껴자는 음성.
“아직 모르겠어. 나야 아직 풋내기고 쟁쟁하신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감히 내가...
“네가 어때서? 우리 나이에 너만한 인재가 어디 그리 흔한 줄 알아?
공부 잘 해, 싸움 잘 해.
“파이잘 너어....!
벌떡 일어난 지형이 원탁을 성큼 돌아 번개같이 다가서며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파이잘이었다. 의자를 밀어내고 물러서며
뻗어오는 팔을 잡는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제법 연습했네?
얼굴을 들자 내려다보는 파이잘의 눈이 마주 닿을 듯 가깝다.
젊은 남자의 체취가 진하게 난다.
잡힌 팔로 가는 떨림이 전해온다.
파이잘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왔다.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파이잘에게 들킬까 조마조마 하다.
이마에 부드러운 콧수염이 느껴진다.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지려는 처녀의 허리를
파이잘이 얼른 감싸 안았다.
귀까지 빨개진 지형은 팔을 뿌리치며 물러서더니 짐짓 쾌활하게 외쳤다.
“그럼 본격적으로 한번, 어때?
“좋지
태극권 자세로 팔을 벌린 지형과 마주선 파이잘은
두 주먹을 가슴에 교차시킨 자세를 취했다.
“그게 무슨 자세야?
“우리 교관한테 배웠는데 하산 시대의 무술이래.
아사신들이 쓰던 거라던데
“어쭈, 암살단 무술을 친구에게 써 먹겠다구? 괘씸해.
뿌리를 박은 듯 굳건한 후굴 자세
지형은 활짝 편 양팔을 천천히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느린 동작이지만 웅혼한 느낌.
파이잘이 펄쩍 힘차게 뛰어 올랐다.
장신의 그림자가 지형을 덮으며 오른 팔이 머리를 덮쳐온다.
그 자리에서 상체만 뒤로 젖힌 지형이 내려 꽂히는
파이잘의 팔을 좌 상박으로 쳐낸다.
미끄러지는 오른 팔과 교차하며 내지른 왼쪽 주먹이
지형의 가슴으로 날아들다 멈칫 하다.
그 순간 팔을 낚아채인 파이잘은 사정없이 공중으로 던져진다.
그러나 공중잽이로 한 바퀴 회전한 파이잘은 우아한 자세로 착지했다.
“그만 휴전.”
“안 되겠지?”
“그래 너는 벌써 몇 년이나 수련했는데 나야 이제 겨우 반년 남짓해서--,”
말끝을 흐리는 파이잘에게 지형은 방긋 웃어주었다.
조금 전 가슴이 비었는데도 차마 여자가슴을 공격할 수 없었던
파이잘이 져 준 것을 안다. 이럴 때의 그는 너무 의젓하다.
두바이의 마지막 밤.
내일 떠나는 지형과 식사한 왕실 가족들이 둘러앉아 후식을 들고 있다.
“언니, 언제 또 올 거야?”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아이샤가 물었다.
“글쎄, 차라리 네가 베링 소년단에 참가하면 어떻겠니?
지형의 말에 아이샤가 펄쩍 뛰며 좋아했다.
“우와, 그거 좋은 생각이다. 아빠 그래도 돼?
“글쎄, 오빠들이야 남자니까 --,
벤 유수프는 뜨악한 표정이다.
아무리 현대화 했다지만 무슬림 여성의 해외나들이는 생각할 여지가 많다.
“유수프님, 저도 아이샤 나이 때 소년단에서 파이잘이랑 만났잖아요.
지형이 거들고 나섰다.
“글쎄. 마드무와젤이야 그곳이 집이나 마찬가지니 문제가 없지.
“그렇다고 별로 봐준 것도 없었어요. 오히려 기압만 더 쎄게 받았다구요.
잘랄이 킥 웃었다.
눈썰매 타고 싸돌아다니다 혼났던 추억을 떠올린 모양이다.
“유수프님. 저희 자치주랑 두바이는 아무래도 인연이 있나 봐요.
아이샤가 가면 이번에도 무슨 좋은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유수프 역시 자치주와 정말 질긴 인연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중이다.
인연은 장검 경전만이 아니었다.
베링 자치주의 등장으로 중동은 교통오지에서 일약 중심으로 떠올랐다.
베링 철도를 통해 유입된 남북 미주 대륙의 물동량은 러시아 아니면
중동을 거쳐 유럽과 아프리카로 흘러갈 것이었다.
새롭게 탄생할 대륙 물류망의 중앙에 있는 중동은
당연히 베링 철도의 수혜자가 될 것이었다.
이미 발 빠른 국가들은 기존 철도망을 베링 철도와 연결시켜
대륙 철도망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또한 대륙간 교통망은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될 전망이었다.
새 철도망은 12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던 유목제국의
세력권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철도망 통과지역들은
몽골리안 벨트로 불리고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이슬람권을 휩쓸었던 장검 경전의 열풍은
관광산업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사라센의 영광을 부르짖는 움직임이 비WM니스와 연결되면서
몽골리안 루트 관광 개발이 이슈로 떠오른 것이었다.
장대한 유목제국의 발자취를 따라 떠나자는 카피가 관광객을 유혹했다.
여건만 정비되면 신 노마드 시대로 일컬어지는 21세기의
히트 상품이 되어 성지순례 못지않은 관광객들이 몰릴 것으로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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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현실화 되는가!!!
파티마 호칭 장면은 감동적인 클라이맥스네요.
그런데 "비WM니스"? 그게 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