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최고의 부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투병 중인 암과의 씨름에서 그가 가진 그 많은 부는 그의 건강을 소생케 하는 데는 그렇게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그가 그의 부를 통해서 세상의 유명한 의료진의 최고의 치료를 받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최고의 치료도 고통과 쇠약해 가는 그의 신체를 위해서 어떠한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
병상에 누워있는 그의 삶은 단순히 호흡하는 생명의 연장에 불과했고 그가 가진 그렇게 많은 부는 생을 즐기는 것과는 무관하게 병상에 누워서 시간만 흐를 뿐 이었다.
맛있는 음식도, 비싼 고급스러운 유명 패션의 옷도, 특별함을 과시하게 해주는 값비싼 자동차도, 유명한 장인이 만든 값비싼 침대도, 이제는 그러한 것을 즐기려 고 해도 즐길 수 없는 병상에 하루하루 꺼져가는 생명에서 그가 소유한 어떤 값진 것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값비싼 침대에 누워도 그에게는 행복한 잠이 들게 하지 않았고, 수면제와 고통을 완화하는 진통 주사제만이 유일하게 그가 고통을 잊고 잠이 들게 해주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가 살아온 이유가 이렇게 병들어 비싼 병상에서 하루하루를 아무런 의미 없이 보내는 것이었나 라고 후회와 슬픔과 절망이 억울하게 다가왔다.
죽음은 하루하루, 시간을 세고 있는 것 같았고, 차디찬 겨울,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무의 가지처럼 그의 몸은 생명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왜 인간은 늙고 병들어 죽어야만 하는지 통한의 슬픔과 아픔이 그의 하루하루를 짓밟고 있었다.
그의 값비싼 병상은 사형수의 독방 같았고, 어느 날 그에게 교도관의 호명과 함께 사형장으로 몸을 틀게 될지 모르는 사형수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살아 온 인생의 길은 그의 사업을 더 확장 시키고 자국의 제일가는 기업인 이고 국가 발전에 공헌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무로서 그의 기업에 종사하는 직원 들의 복지와 사회적 기부나 공헌으로 명예로운 기업인으로 남기를 바랐으며 자자손손 그의 부와 기업이 전해지는 것도 그의 소망이었다.
그는 종교를 갖고 있었지만 그렇게 진실하게 종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죽음 앞에 선 자신이 실제로 죽는다는 것을 그렇게 받아 드리 기가 싫었다.
창조주 신은 존재하는지, 죽은 후에는 저승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왜 창조주는 이 세상에서 얼마를 살다가 죽은 후에 저승에서 이승에서 행한 것에 따라 천당, 또는 지옥에 가도록 하는 그런 불합리한 마련을 하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종교적 의문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살아 있을 때 질문하였다는 24개의 삶과 관련된 종교적 철학적 질문이 지금도 세간에 떠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하였다는 24개의 질문에 누가 답을 하더라도 지금은 그가 죽고 없다. 누가 답을 하더라도 그가 의식을 갖고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아무리 유명하고 제왕이더라도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종교의 경전도 죽은 자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는 자기가 죽을 것을 알지만,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한다. 그들에 대한 기억이 모두 잊혀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도 미움도 질투도 이미 사라졌고, 해 아래서 행해지는 일에서 더 이상 그들의 몫이 없구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러하다. 이 세상에 억울한 죽음이 얼마나 많지만 죽은 자가 자기를 억울 하게 죽게 한 범죄자가 이놈이라고 알려 준 적이 있느냐? 오직 살아 있는 자가 범죄자를 과학적 수사 방법을 동원하여 찾아낼 뿐이지만 이도 인간이라 오류를 범하여 억울한 범죄자를 낳게 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부자였기에 예수가 부자가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한 말에 대하여 납득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예수가 그 말을 한 배경과 예수가 하느님의 왕국이라고 한 천국은 무엇을 말하는지 그는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그러하기에 지금도 세간에 떠돌고 있는 24개 의 질문이 있다.
예수가 부자가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한 의미는 “부자에게는 재물이 요새 도시이니, 상상 속의 보호 성벽 같다”고 한 잠언의 말을 예수는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의 의식 세계가 이러하고 바로 그것이 인생관이기 때문에, 예수에게 영생에 대해 질문한 청년에게 그가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은 나를 따르라고 말하자, 그 부자 청년은 재산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되돌아 갔다고 한다.
부자 청년도 보통 일반적 사람처럼 생명을 계속 누리는 것에 관해 관심이 있었지만 그 재산 자체를 버리라고 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부자의 재물은 상상 속의 보호 성벽과 같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부자는 그의 부를 늘리고 그 재물이 그에게는 신과 같은 것이지만 그가 죽어 갈 때는 그의 모든 재물과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을 다 동원하더라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의료술을 다 동원하더라도,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을 다 동원하더라도 그의 생명을 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의 생명이 없어지고 난 뒤에 그의 부는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덤은 아무리 잘 가꾸고 거대하게 웅장하게 치장을 한다 해도 그 속 에는 벌레의 먹이가 된 썩은 시체가 있을 뿐이고, 그것도 썩어서 없어져, 유골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살아 있을 때 자기의 비문을 작성해 둔, 비문의 내용이 생각난다. 그는 대단히 위트 적으로 자기 비문의 내용을 적어 두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인쇄공 벤자민 프랭클린, 낡은 책의 표지가 닳고 문자와 금박이 벗겨져 나간 것처럼 그의 몸은 여기 누워 벌레에게 먹히고 있다. 그러나 그 작품 자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이 책이, 그가 믿는 바와 같이 저자(하느님)에 의해 개정(改訂)되고 수정되어 아름다운 판으로 다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책으로 비유했고 저자 하느님에 의해 개정된 아름다운 수정본으로 나올 때의 희망을 피력했다. 그 희망은 1세기의 바울이라고 한 지식인이 로마 총독 앞에서 자기변호를 할 때, 말한 내용으로서 “그리고 저도 저 사람들이 품고 있는 것과 똑같은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있습니다. 그 희망은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말한 것이다.
계속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이러한 희망은 언젠가의 미래이지만 분명히 위로가 될 것 같다. 자신과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생명을 누릴 희망에 대해서 벤자민 프랭클린은 그가 22세에 작성해 둔 비문에서 나타내었다.
죽음을 앞에 둔 그 부자도 이 희망이 생명의 기회가 있고, 죽어 있는 모든 사람 에게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이 생명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이 필자는 감히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