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겨울의 바다는 나에게 무척 차가웠다. 그렇게 나는 해군에 입대했다.
뭐 서귀포편대에서 고속정도 탔고, 군수사에서 계획담당으로 함정정비업무도 했다.
그때 사관학교 장교들이 거부하던 쓸데 없는 기상교육도 갔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반강제적으로 갔다. 하기는 덕분에 밥벌어 먹고 있지만서두...
2004년 6월 30일 전역을 2일 앞두고 어청도에 점검 갔다. 본래는 6월 31일 나와야 되는데
풍랑주의보 때문에 배가 안떠서 7월 1일 나왔다. 7월 1일 오후에 평택 도착해서 신고 할려고 하니
참모님과 과장님이 출장중이라 전역신고도 못하고...휴대폰으로 전화하니 내일 아침에 하란다.
그렇게 나는 전역도 하루 늦게 신고 하고 전역했다. 뭐 전역할때 감사패랑 선물이랑 받아서 기분은 괜찮았다.
나는 본래 우리나라에서도 이름난 모 증권사에 계약직 직원으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7월 몇일이더라? 기억은 잘 안나지만 신입사원 연수를 하는데...
신입사원도 다같은 신입사원이 아니었다. 정규직은 하늘이고 계약직은 수업 끝나고 청소해야하는 땅이다. 회식도 정규직 신입 사원은 자기들 끼리만 모인다. 특히 증권사의 특성상 여직원이 많다. 그 정규직 여직원들의 군출신자들을 색안경 끼고 보는 태도는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솔직히 연수 3주만에 정규직 신입사원과 말다툼하고 나왔다. 뭐 퇴사도 아니고 그냥 교육담당하시던 부장님께 말씀드리고 나왔다. 그리고 그날 술을 무척 많이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렇게 나는 첫 직장부터 눈물나게 계약직의 서러움을 받으며 시작했다.
뭐 집에서 한 보름정도 놀았던가? 군동기생 한명이 전화가 왔다.
야! 영남아 잘 지내나?
에구 죽겠다.
야 시간있으면 나하고 오늘 저녁 술한잔 하자!
그래 좋지!
이렇게 동기생과 술 한잔 하다가 동기생이 취업해서 서울 올라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uc&i 라고 방송영업 아웃소싱회사 비슷한 거였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쪽에 군장교 출신(육군출신) 선배님이 계셔서 나는 어렵지 않게
취업하게 되었다.(계약직으로~~~)
그러나 계약직이 어디가겠는가? 여기서도 정규직 여직원과 진짜 많이 싸웠다.
솔직히 나 여기서 동원훈련도 연가 내고 갔다. 공가가 어디있겠는가?
본부장님이 그나마 같은 군출신이라고 잘해 주신게 진짜 눈물나게 고마웠다.
그러던 어느날 본부장님이 동기생과 나 둘을 불러 술한잔 하자고 하셨다.
이번에 대표이사님하고 이사님하고 트러블이 있어서 회사가 분사가 된단다.
본부장님은 대표 이사님쪽으로 가는데 우리의 의사를 물어 보더라!
이때 갈등 무척 많이 했다. 왜냐하면 그 싸가지 없는 여직원과 같이 가야 했거든요.
2005년 5월 우리 회사는 쪼개졌다. 그래도 지금생각하니 그때 그 시절이 내생애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던거 같다. 그때 참으로 다사다난(?) 했었다.
사기도 한번 당해서 500만원 홀라당 날려 먹고, 서울에 있다보니 진짜 많은 것을 배운거 같다.
울 후배 오뎅바 한다고 퇴직금 털어 먹는거 보고 느낀 것도 많았고...
암튼 당시 3월 말쯤 사직서 내고 한달 조금 넘게 일 인수인계할겸 더 다녔으니..
나도 참 의리는 있는 사람이었던 듯 하다
2005년 5월 내 수중에 현금이라고는 달랑 200만원 남짓있었다.
진짜 지금 생각하면 앞이 깜깜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춘천 직업전문 학교에서 이공계 대학 졸업한 학생들을 6개월 과정으로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대학졸업후 군기간은 제외라서
졸업 2년 미만으로 갈수 있게 되었다.
숙식 제공에 월 30만원 학비 보조금 지급, 직업교육 잘 배운후 취업 알선.
지금 생각하니 내가 지금처럼 그나마 자리 잡을수 있었던 것도 이때였던거 같다.
그래도 대학시절 학점은 안 좋았지만 공부는 꽤 했었다.
군전역하고 1년정도 숙식 해결되는 상태에서 공무원 공부 했으면 9급 공무원 정도는
금방 들어갈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모델링과 과대표를 맡았었다. 학생수 25명쯤 되는데 그래도 과대표를 맡으니
군대 생각도 많이 나고 같이 공부 하던 동생들도 많이 돕고 싶었다.
그때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었던거 같다. 기숙사에서 친한 친구들, 후배들도 만나고...
그때는 안정된 생활을 기반으로 영어공부부터 시작해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많이 했었다.
그러나 6개월이 다 되어 갈 무렵 당시 나이 31살인 나를 데려갈려는 회사들이 없을때 나는
진짜 절망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 나이 먹은것에 대한 분노 등등
그 모델링이라는 직종이 젊은 사람들을 많이 선호했었다.
뭐 당시에도 놀고 있었던건 아니다. 춘천에서 자그만한 회사에서 영업직으로 아르바이트 비슷하게 했으니...
2005년 9월 14일은 내 인생 최초의 전환점이 었던거 같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나는 공무원 7급, 9급 시험에 연거푸 떨어지면서
대단히 심하게 낙심했었다. 취업도 제대로 안되고...
그러다가 그날 나는 시설관리 공단에서 직원 모집한다는 내용을 동기생과의 통화에서
듣게 되었다. 그때 당시 공고문이 여기 국방 취업지원센터하고 제대군인 지원센터에 떴었다.
동기생이 같이 넣어 보잔다. 같이 넣었다. 서류전형을 합격했다
그리고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였던지라 그리 어렵지 않게 간단한 일반상식과 국사시험을
합격했다. 면접 받기 전에 여기 조대리님하고 권대리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고 공단근무자라는 선배한테 메일도 보내고 그랫엇다. 2005년 10월 25일은 내 생일이면서 동원훈련 받던 날이었다.
경남 진해의 동원 훈련 장에서 최종합격 했다는 소식과 함께 28일까지 공무원 신체검사서와
신원 진술서 제출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27일이 훈련 끝인데... 담당하던 분에게 예기를 하고 외출을 나가 마산 삼성의료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27일 동원 훈련이 끝나고 다시 수원으로 밤을 세워서 운전해서 올라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 28일 드디어 서류를 넣었다.
그렇게 나는 2005년 11월 11일 시설관리공단 정규직 직원이 되었다.
그때의 기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입사하고 연수 받는 날 같이 근무하게 될 계약직 여직원이
빼빼로를 선물로 주더라.
직장 생활하면서 진짜 열심히 일했다. 우리 직장은 청소년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는데
밤 10시 넘게까지 남아서 일하고...
토요일 일요일 당직도 다른 분들이 일이 있다고 하면 바꿔주고...
그렇게 바쁜 와중에 그래도 계속 공부를 했었다. 지겹도록...
이때도 참 행복했었다. 뭐 32살 되도록 결혼 못한게 서러웠지만...
시집간 누나한테 돈도 좀 빌려 보증금 1,000만원에 월 25만원짜리 집을 구했다.
그리고 월급에서 한달에 40만원(방세 포함) 정도만 쓰고 누나한테 빌린돈 800을 5개월 만에
갚았으니 진짜 소금처럼 짜게 살았던듯 하다.
참조로 군에서 받았던 퇴직금과 군인 공제회 합쳐서 6,800중 6천은 2004년 증권사 입사시기에 누나한테 맡겼더니 누나가 보험회사에 3년 짜리 넣어서 해약하면 본전도 못찾는 상황이었다.
2006년 여름이 끝날부렵 맛선을 보게 됐다. 당시 공단에서 같이 근무하시던 분중에 시에서
근무하다가 공단이 되면서 넘어 오신분이 있었다. 그분의 소개로 지금도 잊지 못할 맛선을 보게 되었다. 뭐 그분이 시 공무원으로 있을때 친하게 지냈던 분이란다. 당시 나이 29세
맛선대상이 여자 공무원이었는데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기능 9급 공무원이었는데 맛선 자리에서 대뜸 연봉과 집이 있느냐 등등 경제적인 면을
물어보더라! 당시 내 연봉은 군호봉 인정 받아서 2200정도(매월 평균 실수령액 16정도?) 되었고
집이라고는 보증금 1,000만원의 월세가 다였으니...물론 보험회사에 들어가 잇던 퇴직금은 있었지만...
그래도 사실 32살의 나이에 그게 창피해서 조금 아주조금 사기를 쳐서 연봉은 대충 2400정도
되고 전세에서 산다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는 공무원이고 나중에 공무원 연금 받고, 대출 좀 받았지만 수원에 24평짜리 작은 아파트도 있고...하면서 자기 자랑을 하더라!
뭐 물론 잘 안됐다. 시원하게 뻥 하고 내가 차였으니...
생애 처음 본 맛선은 이렇게 아픔만 주고 끝이 났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 은근히 공무원에 대한 욕심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직장도 진짜 괜찮았는데... 왜 욕심을 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자존심이 무척 상해서 그랬던거 갔다.
2006년 하반기 공무원이란 공무원 시험은 다 원서를 냇던거 같다.
내 기억에 8번 정도 시험을 쳤으니 해경부터 시작해서 지자체 까지....
그러나 매번 간당간당하게 떨어졌었다. 진짜 아쉬움을 남기고...
한번은 면접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좀 억울한 감도 있다.
2006년이 끝나갈 무렵 그날도 시험을 치고 나오는데 감이 좋았다.
그날따라 이런문제가 많았다. 4지 선다형인데 확실히 답이 2개는 아니고 2개중에 답이 있는데
어느건줄 몰라서 찍어야 되는 상황...
그때 까지 그런 경우 대부분 틀린 답을 적었었다. 그러나 그날은 감이 진짜 좋았다
운이라고 해야 할까?
매법 공무원 시험에서 3 ~ 5점 차이로 떨어졌었는데 진짜 그날은 왠지 될거 같은 그런 기분...
그리고 됐다. 드디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전역하고는 총 17번째 친 공무원 시험이고 ...
그때 해경 순경과 교육청 기능직 시험, 국가직 일반직 9급 합격
이렇게 3개를 동시에 합격하니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었다.
그리고 자형과 누나와 의논해서 일반직 9급으로 입사했다.
2007년 2월 입사했다. 그리고 다시 맛선(?)을 봐서 2007년 10월 결혼햇다.
맛선도 디게 우꼈다.
공무원 되니까 맛선자리가 3군데 정도 들어 왔다.
근데 그중 하나가 우리학교 동문이라는 것이었다. 나이 같은 33세,
그래서 혹시나 대학때 아느 여자 동기생 만날까 하고 나갔었다.
근데 왠걸 맛선 나온 여자(지금 울 와이프)가 내 대학 1년 선배였다.
하하하! 이걸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2007년 7월 맛선을 보고 맛선 본지 3개월 10일 만에 대학 여선배와 결혼했다.
지금은 2년동안 힘을 합쳐 집도 장만하고 자그만한 상가도 하나 분양 받고 그래살지만...
진급도 빠르고 별불만은 없지만...
사람은 욕심이라는게 있어서 계속 발전하는 것 같다.
요즘은 석/박사 학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와이리 부러운지...
얼마전 2009년도 해군장교 예비역 소령진급 갔을때 동기생이 공학 박사인데
그 명함이 그래 부러울수 없었다.
이젠 그만 줄여야 할듯 하고...
끝으로 처음은 다 어렵습니다. 작성자 김영남 하고 치시면 자유게시판 보면 제가 올린 글들이
있을 겁니다.
계약직 부터 줄기차게 글을 올렸으니 당시당시의 제 생각과 행동들을 보시면 ...
때로는 제생각과 어리석은 행동에 창피한 마음이 들때도 있고 때로는 내가 당시 저렇게 냉정하고
논리적인 판단을 했었던가 하고 지금 돌이켜 보아도 감탄할때도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이젠 전역 5년차의 사회인이지만 아직도 더 배우고 발전할 길이 많다고요!
속칭 우리나라는 가방끈 길고, 사회적인 직위가 높고, 돈 많으면 살기 좋은 사회입니다.
그렇다고 나쁜짓 해서 돈벌라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 7년동안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바치고 살았듯이
이제 남은 시간은 우리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며 우리의 꿈을 향해 나가야 될때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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