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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세상에 내가살면서
민20;1-13,벧전1;13-25
배부른 황새 한 마리 물가에서 무엇을 할까하며 서성대고 있었습니다.
마침 살진 잉어들이 떼를 지어서 물결을 거슬러 오라오고 있었습니다.
배부른 황새는 잉어 떼를 보면서 "조금 있다가 잡아먹어야지" 하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시장해진 황새가 잉어를 먹으려고 보았더니 그 잉어들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다시 잘 보았더니 이번에는 가물치가 나타나 헤엄치고 다녔습니다.
황새는 "에이 황새가 이런 형편없는 물고기를 먹을 순 없지" 하고 또 기다렸습니다.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자 잉어도, 가물치도 모두 가고 피라미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황새는 생각합니다. "
에이 아까 그 형편없는 가물치라도 잡아먹을 걸..."
이 유머는 인간이 결정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것을 꼬집은 겁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내일, 다음"이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삶을 가장 잘 파괴하는 단어는 "내일, 다음"이라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내일, 다음"이란 단어를 잘 쓰는 사람 대부분은 가난하고 불행하며 실패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일부터 무엇을 시작하겠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일이 오늘이 되고 다음이 지금이 되었어도 그걸 시작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
내일, 다음"이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지금"은 승자의 단어가 되었고 "내일, 다음"은 패자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고를 바꾸어야 하고 말을 긍정적인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어떤 말을 바꾸어야 할까요?
그건 "내일, 다음"을 "오늘, 지금"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말을 해도 핑계가 아닌, 진정한 말을 해야 하고 실천하면 복이 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더 좋아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유난히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건 싫증나지 않는 한 계속 하지만 싫어하는 건 처음부터 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자기가 잘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통해 삶의 의욕과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다 보면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우리들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세상 여러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더 나아가 집착해서 매이기까지 합니다.
세상에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그것에 매력을 느껴 집중합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겁니다. 성도는 그분을 바라보고 집중해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집중해서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마음속에 세상에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많을수록 우리는 거기에 시간과 마음을 빼앗깁니다.
심지어 물질까지 드려가면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통한 기쁨과 즐거움을 찾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못하게 되면 그것을 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을 좋아하고 사랑할수록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것을 좋아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소홀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소홀함이 계속되면, 결국 무관심으로 변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반면,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시간과 경비를 아낌없이 드립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세상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멀리하고, 버리기까지 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에 대해 죄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모른 체하거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처럼 간과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것을 더 사랑하고 소유하는 걸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 좋아하고 사랑한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에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많으면, 마음이 풍성해보여도 영적으로는 가난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세상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영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채워주십니다.
아니, Θ을 사랑할수록 영적으로 부유하고 세상에서도 우리를 건강하게 세워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것을 포기할수록 하나님이 허락하실 은혜와 축복이 넘쳐납니다.
첫째로; 잠시사는 세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세상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좋아하고 원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영혼이 자유해서 건강해지며 세상 것에 없는 신령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가 내려놓음으로 말미암아 세상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내려놓는다는것이 음말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떼어내는 아픔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채워 주실 풍성한 은혜를 바라보며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음은 아쉬운 고통, 슬픔, 아픔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과 자유함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영육 간에 부요와 만족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잠시사는 세상에서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나에게 임재하십니다.
믿음의 조상들도 우리처럼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의 조상 하면 아브라함을 떠올리고 고난하면 야곱을 떠올립니다.
그 분들이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살펴보면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내하지 못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애굽 여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고 그 후손들이 지금 아랍 민족입니다.
아랍민족이 세운 "이슬람교"는 지금도 우리 "기독교"의 큰 위협과 대적이 되었습니다
교활한 야곱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빼앗고 늙은 아비를 속여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자기보다 한 수 높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연단 받았습니다.
어린 요셉은
형들에게 "장차 당신들 모두 내 종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형들의 미움에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감옥에서 하나님의 혹독한 훈련과 연단을 받았습니다.
혈기 왕성한 모세는 살인 후 광야로 도망쳐 40년 동안 고독과 인내 훈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다윗도 13년 동안 사울 왕을 피해서 도망쳐서 훈련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부녀 밧세바를 범한 잘못을 저지르고 남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이런 믿음의 조상들이 쓰임 받았다면, 부족한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혹, 여러분이 한 때의 실수와 잘못으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연단 중에 있습니까?
그러면 기쁨으로 그 연단을 잘 견딘 후에 순종하면 도리어 축복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단을 인내하고 잘 받은 야곱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잘 통과한 요셉은 나이 30에 당시 초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40년 광야 생활을 거친 모세는 애굽의 노예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는 잘못을 저지른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다 부족하고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전 7: 20절에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마음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연단 중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욥처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붙잡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지, 세상 사람들과 같은 교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떠한 상황에 쳐해 있습니까?
믿음의 조상과 욥이 만난 환란처럼 시험과 환란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환경까지 축복으로 바꾼 믿음의 조상과 욥의 인내를 배우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은석이 부모를 토막내 살해해서 세상이 경악했습니다.
아들 이은석은 왜 그런 끔직한 범죄를 저질렀나요?
그는 명문대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학대와 모욕을 일삼은 엄마, 애정은 손톱만큼도 없었던 권위적인 아빠,
학교, 군대에서의 집단 따돌림과 심한 무력감과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인기피증 등이 충동적인 살인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심리학적인 판단입니다.
그의 형은 부모가 작은 배려와 관심만 보였어도 이번 일은 없었을 거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사랑해" "널 믿어"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 가슴에 못을 박았다는 겁니다.
왜 사랑해 널 믿어 라는 말을 못할까요?
자존심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권위 의식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지나서 므리바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마실 물이 없자, 모세를 향해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백성들 앞에선 모세는 화난 지팡이로 므리바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지 못한 결과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출애굽 지도자 모세에게는 예수의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분노를 드러낸 결과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소망을 가진 성도가 사랑을 실천해야 할까요?
또 어떤 사랑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이기 때문에 성도는 예수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셋째로; 잠시세상에살면서 예수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했습니다.
그것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생활 속에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로 아주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금식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 어려운 것일까요?
그것은 상대방이 사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잘못된 회개가 가져온 일방적인 생각으로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실제 사랑하셨으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여호수아는 승리로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에 넘쳐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 않고 3천 명의 군사로 작은 아이성을 쳤지만, 대패했습니다.
아간의 범죄 때문에 36명이 죽고 민족 전체가 정신, 물질, 영적인 피해를 당했습니다.
제비뽑기로 아간을 찾아낸 여호수아는 아간을 "내 아들아!"하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성품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넷째로; 잠시사는 세상에서 분하고 격한 말을 들어도 참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참고 견디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참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적은 게 아닙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참으라는 것은 490번이나 되는 많은 것입니다.
이렇게 오래, 많이 참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빠른 것을 좋아하는 경우에는 더 참지 못합니다.
그런데 참는다는 것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격동되지 않도록 훈련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분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경고했습니다.
무릇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큼 세상에서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마음을 격동시킬만큼 분하고 격한 말을 들어도 참으라는 것입니다.
참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참지 못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도발해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죽기까지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 덩어리이신 예수를 품은 우리들이 죽기까지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잠 16:32절 말씀에 "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입술을 지켜서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섯째로; 잠시사는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겸손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겸손해서 섬기라는 말은 교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만하지 않았더니 저절로 겸손해지더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부르셔서 가까이 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평생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건 예수님이 지신 멍에를 메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배우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교만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저절로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의 작은 것까지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조그마한 능력을 자랑합니다. 표현은 거칠고 과격합니다.
그래서 상처를 주고받고 관계가 깨지며, 하나님까지 멀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겸손해짐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찾아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말씀만 하지 않으시고 삶의 행동으로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직접 다가가시고 찾아가셨습니다.
그것은 겸손하지 않고는 어렵고요,
사랑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렇게 겸손하고 낮아지셔서 끝까지 섬기신 사랑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사랑처럼 겸손하고 낮아져서 끝까지 섬기면 어찌될까요?
세상이 바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정함이 사라져서 사랑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사랑하셔서 겸손하게 낮아져서 끝까지 우리들을 섬겨주셨습니다.
잠시사는 세상에서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면 바로 그곳이 샬롬이 넘쳐서 행복이 가득한 천국이 될 것입니다.
결론으로; 잠시사는 세상에서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심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사랑을 심으십시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심으십시오.
가난이 있는 곳에도 예수를 심으십시오. 고통이 있는 곳에도 예수를 심으십시오.
미움이 있는 곳에도 예수를 심고 절망이 있는 곳에도 예수를 심으십시오.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까지 예수를 심어서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죽기까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일은 겸손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9:27절 말씀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을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