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수문화
고쿠락추천 1조회 2722.10.02 18:06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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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수 문화
김문억
홀수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정신문화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까마득한 옛날부터 민족의 혼 속에 이어져 내려온 민족문화다.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의 넉넉한 관습에서 얻어진 지혜의 소산으로 홀수는 아귀가 맞는 짝수에 비해서 넉넉하고 여유롭다. 그중에서도 특히 숫자 3을 선호하고 있지만, 나머지 숫자인 1, 5, 7, 9 모두가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우선 국경일이라든가 명절이 모두 홀숫날이다. 뿐만 아니라 때 맞춰 돌아오는 절기가 거의 홀숫날에 들어있다. 설날과 추석이 그렇고 정월 대보름, 삼짇날, 단오, 칠석, 백중이 그렇다. 9월 9일은 구일(九日)이라 하여 남자들은 시를 짓고 여자들은 국화전을 부쳤다. 천고마비의 살찌는 계절을 즐기던 조상님들의 흐뭇한 얼굴이 떠오른다.
생활 곳곳에 뿌리내린 홀수의 쓰임과 의미는 더욱 다양하다. 사람이 죽으면 삼일장 아니면 오일장을 치르는 것이 보통이지 사일장이나 육일장은 없다. 장례 이후 치르는 삼우제(三虞祭)와 49재라는 추모의 날 또한 어김없이 홀숫날이다. 이렇듯 망자 앞에서도 홀숫날을 택하여 최대의 예우를 지키는 것이 뿌리 깊은 전통이다. 심지어 제물을 올려도 홀수로 올리지 짝수로는 차리지 않는다. 돌탑을 쌓아도 3, 5, 7, 9 등의 홀수로 층을 올렸을 때 시각적으로 안정감이 들면서 보는 마음을 편하게 한다. 아기를 낳고 금줄을 치고는 세 이레[三七日] 동안 출입을 삼갔다. 신성한 생명을 지키면서 축복하자는 삼신할미의 준엄한 고지(告知)다. 봉투에 돈을 넣어도 우리 서민들은 두 자릿수가 아닌 이상 삼만 원 아니면 오만 원을 넣었지 사만 원이라든가 육만 원짜리 기부 촌지는 보기 어렵다. 심지어 상납금을 강요하는 교장이 교감에게 넌지시 말씀하셨다고 한다. ‘짝수로 인사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이제껏 그런 것도 모르느냐’ 호통을 치는 바람에 백만 원을 더 얹어서 바쳤다고 한다. 쥑일 놈 같으니라구!
특히 3이라는 숫자는 우리 생활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춥고 긴긴 겨울을 삼동(三冬)이라 했고 무더운 여름을 건너가려면 삼복(三伏)을 견디어야 한다. 무리를 일컬어 삼삼오오(三三五五)라 했고 색깔을 이야기할 때도 삼원색이 근원이다. 상고(上古_시대에 우리나라 땅을 마련해 준 삼신(三神)이 있다 하여 생명 신으로 섬긴다. 삼재(三災)가 있는가 하면 또 삼재(三才)가 있다. 현대에는 시위문화에서 삼보일배(三步一拜)라는 것이 새로 생겼다.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의 극치다. 가까운 이웃을 일컬어 삼이웃이라는 좋은 표현이 있는가 하면 잘 하면 술이 석 잔 못 하면 뺨이 석 대다. 힘겨루기 판을 벌여도 5판 3승제를 하며 만세를 불러도 삼창(三唱)까지 해야 속이 후련했다.
짝수는 죽은 자의 숫자란 말이 있고 홀수는 산 사람의 숫자란 말도 있다. 그래서 제사상에는 과일을 홀수로 올리고 절을 두 번 하지만 산 사람에겐 절을 한 번만 하면 된다. 삼 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목적한 것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생활 속 곳곳에 숨어있다. 그만큼 3이라는 숫자는 우리 생활의 디딤돌이요 구름판으로 안정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은 왜 홀수를 선호하게 된 것일까? 음의 기운인 달을 기준으로 생활해 온 동양사상이 어쩌면 짝지어지는 것을 은연중에 터부시하면서 살았는지 모른다. 즉 빈틈없이 맞아떨어진다는 강박감을 거부했으리라. 아귀가 척척 맞아떨어지기보다는 좀 더 후덕한 인성과 넉넉한 생활 관습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셋 넷쯤을 말하는 것마저 서넛이라고 했다. 셋이라는 표현보다는 같은 숫자이면서도 훨씬 더 넉넉해 보인다. 그 위에 한 개쯤 더 얹으면 더 좋고 한 개쯤 빠져도 부족하지 않아 아무 유감이 없는 말맛이다. 그러고 보면 3은 4보다 크고 9는 10보다 넉넉하다. 어쩌면 덤 문화도 여기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닐까. 정부에서 아무리 정찰제를 권장해도 뿌리 깊은 덤 문화는 값을 깎고 실랑이하는 중에서 실거래값이 매겨지는 걸 보면. 그런 습관은 비록 저울에 근을 달아서 시세대로 팔더라도 한 주먹 더 후하게 얹어 주어야만 서운치가 않지 그렇지 않으면 야박하다면서 고약한 인심 취급을 받는다.
홍익인간을 추구했던 환웅에게 찾아온 곰과 호랑이 중 곰은 삼칠일[21일]을 견디면서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로 변신했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한다. 고조선을 개국하기까지의 단군신화를 보더라도 우리 민족의 홀수 문화는 태생적인 면이 있다. 포악하고 영악한 호랑이보다는 느리지만 순하고 지혜로운 곰을 택하고 있는 신화에서부터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홀수를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3을 선호하는 우리 민족은 확실히 넉넉함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그것은 어쩌면 하늘을 섬기고 땅을 믿었던 인간의 근본정신 天 地 人의 우주 근본 원리를 숭배했던 사상에서 본받은 것이리라 여겨진다.
아무리 세상이 바뀐다고 해도 중심은 사람이고 운전대 역시 사람이 잡고 있다. 가끔 웃기는 충청도 버전을 보면서도 함부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그 특유의 글세유 역시 홀수 문화에서 파생된 넉넉함이 함유하는 느림의 미학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몰라서 망설이는 것이 아니고 입 떼기가 진중한 탓이다.
생각해 보니 다섯 손가락을 짚어가면서 증평 장 내수 장날을 셈하던 아버지의 얼굴에도 석삼(三) 字가 아니면 내천(川) 字가 써 있었다. -(시인. 초정리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