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꽃길 따라(3)
(2022년 8월 13일∼15일)
瓦也 정유순
곤한 잠에서 깨어 눈 비비고 일어나 <대구불로동고분군>으로 향한다. 이 고분군은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에 있는 삼국시대 횡구식석실분(橫口式石室墳) 등이 발굴된 무덤 군으로 1978년 6월 사적(제262호)으로 지정되었으며, 불로동과 입석동의 구릉 서남사면에 분포한다. 해방 이전인 1938년 11월 조사 때 입석동쪽 고분 2기를 조사하여 학계에서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에 속해 있어‘해안면고분’으로 보고되었으나, 그 후 대구광역시로 편입되면서 ‘대구불로동고분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구불로동고분군>
봉토의 지름은 21∼28m 내외이고 높이는 4∼7m 정도가 보통이다. 그러 해안면 제1호분의 경우 서쪽에 같은 규모의 또 다른 봉토가 접해 있어서 외형이 마치 표형분처럼 보인다. 표형분(瓢形墳) 형태는 두개의 봉토(封土)가 이어 붙어 있는 표주박 모양으로, 초기 신라에만 유행한 독특한 묘제양식(墓制樣式이다. 봉토는 깬 자갈로 형성하고 표면만 흙을 덮어 마치 적석총(積石塚)과 같은 형상으로 고조선의 청동기시대 대구 분지의 고인돌 및 관련 유적 분포가 신라 전기의 고총 고분군의 분포와 유사한 점이 주목된다.
<대구불로동고분>
대구지역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고총 고분군 가운데서 가장 양호한 상태로 잔존해 있는 고분군으로 서쪽으로는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18호분과 22호분이 조사되었고,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활발해지는 80년대 즈음하여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가 되었다. 정비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는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91호와 93호를 발굴조사 하였다.
<대구불로동고분군>
모두 장방형의 평면형태를 갖는 석곽을 채용하고 있으며, 하나의 석곽 안에 격벽(隔壁)을 두어 주곽(主槨)에는 시체를 안치하고, 부곽(副槨)에는 부장품만을 격납(隔納)하였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다. 특히 불로동 갑호분에서는 상어 뼈가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경북지역 제사상의 특징으로 돔베기를 올렸는데, 그 시원이 아닌 가 추정하기도 한다. ‘돔베기’는 상어고기를 토막 내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고기를 지칭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돔베기 - 네이버캡쳐>
고분군 부근에서 조반을 하고 몸은 밀양 표충사로 향한다. 한반도의 등골인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질 때 태백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 주왕산과 가지산과 금정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낙동정맥이다. 이 안에는 운문산(1188m), 가지산(1240m), 천황산(1189m), 재약산(1108m), 간월산(1083m), 신불산(1208m), 취서산(1058m) 등이 모여 <영남 알프스>를 이룬다. 이 산들의 정기가 한 군데로 모여 응집된 산이 <재악산>이고, 이 기운을 받은 대표 절집이 표충사다.
<영남알프스>
그런데 표충사의 안내판에는 천황산과 재악산을 주산(主山)으로 같이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꼼수가 숨어 있다. 밀양에는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등 독립운동가가 많이 나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었는데, 이러한 의협심을 잠재우기 위해 일제는 재악산(載岳山)을 일본의 천황을 뜻하는 의미로 천황산으로 바꾸었고, 수미봉을 재약산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산의 이름을 원래대로 환원하려 하였으나 울산광역시의 반대로 아직도 일제잔재를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재악산표충사일주문>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악산에 있는 표충사(表忠寺)는 경상남도 기념물(974년 12월)로 지정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호국정신이 깃든 절이다. 654년(태종무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竹林寺)라 하였으며, 829년(흥덕왕 4) 인도의 승려 황면선사(黃面禪師)가 현재의 자리에 중창하여 영정사(靈井寺)라 이름을 고치고 3층 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것으로 전한다.
<표충사 수충루>
일주문을 지나 表忠寺(표충사) 편액이 걸린 누각 밑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사명대사의 사당 표충사(表忠祠)와 표충서원이 있고, 이 사당을 중심으로 우측에 유물관(호국박물관)이 있다. 1286년(충렬왕 12)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국사가 이곳에서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법을 일으켰다. 1839년(헌종 3)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선사(月坡禪師)가 사명대사의 고향인 무안면(武安面)에 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이 절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라 고치게 되었다.
<표충서원(좌), 표충사(表忠祠, 중앙), 유물관(우)>
사천왕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좌측으로는 배롱나무 붉은 꽃이 제철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삼층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이 탑은 남북국시대 후기신라의 3층 석조불탑이며 196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석탑은 단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랐지만, 받침돌이 단층이어서 차이가 있다. 지붕은 흘러내리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다. 그 끝에는 풍탁(風鐸)이 달려있다. 이 석탑과 석등은 사당이 옮겨올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표충사 배롱나무>
<표충사 삼층석탑>
표충사는 중심 불전을 대웅전이 아닌 대광전(大光殿)이다. 이 전각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질병과 무지를 다스리는 약사불(藥師佛)을, 서쪽에는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하였다. 그 이전인 1715년(숙종 41)에 중건한 사실이 있으나 1926년에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건물 네 귀퉁이에 추녀가 쳐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4개의 활주(活柱)를 따로 두었다.
<표충사 대광전과 팔상전(좌)>
표충사는 대한불교조계종으로 1980년 발생한 10·27 법난의 피해사찰이다. <10·27법난>이란 1980년 10월 계엄사령부의 합동수사본부 합동수사단이 불교계 정화를 명분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의 승려 및 불교 관련자를 강제로 연행·수사하고, 포고령 위반 수배자 및 불순분자를 검거한다는 구실로 군·경 합동으로 전국의 사찰 및 암자 등을 수색한 사건이다. 표충사에는 표충서원(表忠書院)·대광전(大光殿) 등 지방문화재를 비롯한 25동의 건물과 사명대사의 유물 300여 점이 보존되어 있다.
<표충사 대광전 앞 마당>
표충사를 나온 발길은 밀양시 단장면 범도리에 있는 반계정으로 향한다. 버스에서 내려 단장천(밀양강)을 따라 약 1㎞쯤 걸어 들어가는데, 길옆에는 거북을 닮은 거북바위가 길을 안내한다. 맑은 물이 여울지는 강에는 다슬기 잡이가 한창이다. 동의보감에서 다슬기는 간염, 지방간, 간경화 등의 간질환 치료와 숙취해소에 좋다고 하였다. 특히 1급수에서 서식하는 다슬기는 반딧불이 애벌레의 먹이가 되기 때문에 다슬기가 서식하는 한여름 밤에는 자연스럽게 반딧불이 축제가 열린다.
<거북바위>
<다슬기 채취>
반계정(盤溪亭)은 조선 영조 때 산림처사(山林處士)였던 반계(盤溪) 이숙(李潚, 1720∼1807)이 단장천(밀양강)이 감도는 언덕 반석 위에 별장 건물로 지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를 읊던 곳이다. 이숙은 세속을 떠나 시골에서 글을 읽으며 지내던 선비로 유명하였다.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고 고종 때 5대손인 이소구(李韶九)가 건물을 해체 복원하였으며 후손에 의해 계속 보수되어 왔고, 문화재자료(제216호, 1995년 5월)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여주이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반계정 입구>
<반계정 내부>
또한 손사익(孫思翼), 신국빈(申國賓), 안인일(安仁一), 남경의(南景義) 등 고을 명사들과 어울려 풍월을 읊던 곳이다. 이곳의 경치를〈반계정십이경(盤溪亭十二景)>으로 이를 담은 역대 문인들의 글과 시가 편액으로 걸려 있는데, 대문이 굳게 닫혀 확인하지 못하고, 발돋움으로 담장 너머 건물만 바라본다. 입구의 배롱나무는 붉은 꽃이 한창인데,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 행선지인 전남 장흥으로 가는 길목인 경남 창원시 의창구 북면에 있는 신촌저수지 부근 식당에서 오전을 마감한다.
<반계정 배롱나무 숲>
<반계정 배롱나무 숲>
※ 4편에는 전라남도 장흥군 송백정과 강진군 백련사가 소개됩니다.
https://blog.naver.com/waya555/222857415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