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시 34편
- 제목 : 아둘람 굴로 가자
▶ 기도
아버지, 다윗의 신실함과 연약함이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내가 잘해서 받는 구원이 아니요, 내가 이루어가는 여정도 아니요, 오직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아버지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산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안에서 만나게 하셔서 주 품에 오늘을 살게 해 주십시오.
▶ 본문살핌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부제가 붙었다. 삼상21장의 기록에 의하면 아비멜렉이 아니라' 가드 왕 아기스'라 쓰여있다. '아비멜렉'이란 명칭은 블레셋의 왕을 대변하고는 했으니(이집트의 '파라오'처럼) 블레셋 5대 성읍 중 하나인 가드(수13:3)의 수장이던 아기스 왕이 아비멜렉이라 적혀 있다해서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고 ESV 주석은 안내한다. 가드땅은 후일 다윗이 왕위에 오른 뒤 점령되어(대상18:1) 요시야 왕 때까지 이스라엘의 영토였다가 B.C 9세기경 시리아에 빼앗겼다(청지기사전). 아이러니한 것은 다윗이 죽인 블레셋 군사 골리앗도 가드 출신이었다는 것이다(삼상 17:4).
이 가드성은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파악되며 현재의 지명은 '텔엣사피'라고 한다(텔에스 사피). 예루살렘과의 거리는 약 30km 정도인듯 하다. 정리해 보자면, 친구 요나단으로부터 도망치라는 메세지를 전해받은 후 허겁지겁 도착한 곳인 놉 땅의 성막에서 지성소의 빵을 얻어먹고, 거기 안치해 두었던 골리앗의 칼을 받아 무기로 삼아 겨우 도망친 곳이, 자신의 원수이자 하나님을 모욕한 민족 블레셋의 요새인 가드 성이다. 거기서 정체를 숨기고 용병처럼 지내려 한듯 한데, 왕의 신하들이 정체를 알아보는 통에 미친 사람 흉내를 내어 가까스로 다시 탈출한 사건이 오늘 시편의 배경이 되겠다.
그런 상황에 지은 시의 첫 구절이 너무 아름답다. "내가 여호와를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34:1-4).
▶ 묵상
여전히 쫓기는 신세인데 제 발로 들어간 적군의 땅에서 무사히 도망쳤다고 감사할 일인가 싶다. 당도한 곳은 아둘람 굴로써 요새처럼 된 바위산이라고 주석이 설명한다(삼상 22:1,GBS). 이곳에서 그를 따르는 자 400여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환난 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다고 기록되었다(삼상 22:2).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어떻게 34편처럼 큰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공감은 잘 안되지만, 그가 사울 왕의 손과 블레셋 왕의 손에서 어찌됐든 건짐을 받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하나님의 살아있는 손길을 더 깊이 느끼고 감사하게 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처럼 상처 입고 배배꼬인 상태가 아니라 아직은 어리고 맑은 청년시절의 다윗이니 말이다. 나는 이런 시절이 다시 찾아온다면, 환난과 곤고가 엄습한다면 다윗처럼 의연하고, 긍정적이고, 밝고 투명하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을까? 없다. 결단코 없다. 하기 싫음이 아니라 주제파악이다.
그런데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다윗보다 더한 배신과 고통을 겪으시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까지 맛보신 구주 예수의 굴, 그 무덤에 찾아가는 것이다. 400명의 상처입은 영혼들이 아둘람 굴의 다윗을 찾아 갔듯이, 나는 무덤에 장사되어 내 대신 고통과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나의 고통의 무게를 그대로 가지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실 분이시며, 시험을 맛보시고 유혹을 당하셨으되 죄는 짓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면 내 마음도 다윗 같이 되겠구나 싶다. 이 찌질하고 비참한 상황에서의 기도가 눈물대신 찬송으로 범벅이 되고, 심지어 오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하는 예언시로서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34:20 -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다윗이 하나님 안에서 먼저 구주를 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단 생각마저 든다.
내 고통의 무게를 내가 지고 괴로워 결국 자폭상태였던 과거가 떠오른다. 돌아보니 구원자 신드롬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다윗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닌 줄 알았다면 아둘람 굴의 다윗을 찾아가듯이 예수님의 무덤에 연합하여 부복하는 영혼의 소생을 그때도 얻었을 것인데...
인생의 파고가 어떤 연유로든지 다시 오게 된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무덤 - 자기주장과 의지가 모두 죽은 옛 사람의 실체가 목격되는 그 굴 속 - 에 들어가 주님의 심판이 합당하고 옳으심을 고백하고 싶다. 이미 그 분의 심판은 참되고 옳으며, 나의 오늘이 이만큼 살아지는 것도 그분의 은혜다. 내 성질과 판단, 지은 죄와 허물대로 보응을 받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릴 기회도 없이 이미 스올에 영혼이 내려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의 오늘은 그분의 무덤에 연합되었는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옳으시다는 것과, 내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그분의 손에 붙들리지 않은 것이 하나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나는 말씀안에서 구주의 흔적을 찾으며 영혼의 생명에 양식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 기도
아버지... 구주 예수의 무덤에 연합하는 신비에 더 가까이 가기 원합니다. 구주를 더욱 얻고 그 안에서 기뻐하여 생명하기 원합니다. 오늘의 삶을 바르게 인도하소서. 자기주장 의지가 올라올 때 무덤에 연합된 옛사람의 실체가 다시금 환히 폭로되어 힘을 잃게 하옵소서. 애매한 것은 저의 자율보다 주님의 뜻을 묻는 마음으로 발전하게 가르치고 인도해 주옵소서. 오늘을 의탁합니다. 주님 바람대로 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