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태어났니.
십대일 때 친구 생일을 축하한다며 모여 생일을 맞이한 친구를 가운데 엎드리게 하고는 등을 마구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지랄 같은 세상에
왜 태어났니”
친구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불러주었던 굉장히 짓궂은 생일축하 노래였다. 정말 왜 태어났느냐고 나무라는 노래였겠는가. 개구쟁이들이 아주 친하니까 그렇게 놀리는 것이 서로를 더 즐겁게 한 것이다.
그땐 세상이 마냥 분홍빛이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나고 세상을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세상은 도리어 고통스럽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한 곳이고 너무나도 자주 잔인하고도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서로를 상처 나게 하는 무서운 곳이었고 알고 보니 모두가 지쳐 신음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왜 태어났니’라는 어릴 때의 생일축하 노래가 불현듯 실감이 나는 게 아닌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실감하지 않아도 될 아픔들, 그리고 위험스러웠던 순간들, 또 많은 고통과 상처들….
그러나 우리 모두 숙명적으로 태어났다면 이 세상에서 부디 행복했으면 한다. 불가피하게 이곳을 살아가야 한다면 지혜롭고 복되게 순례 길을 갔으면 한다. 비록 만물이 신음하고 있지만 그래도 간간히 주어지는 아름다움과 행복의 순간들을 누림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의 정체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한 사탄이 사로잡은 죽음의 시공간이다. 그리하여 인생은 사탄이 파놓은 깊은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다행히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을 배반하고 떠난 인간을 그냥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받을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전가된 원죄로 말미암은 저주와 죽음에서 우릴 건지시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이요 그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죄인이 받을,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속 주(나 대신 죽으신 은혜로우신 구주)로 인정하고 그분께 나를 맡기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고 이 세상이란 곳의 정체는 그러하다. 즉 우리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죄로 인해 죽든지, 아니면 그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나를 대신해 그 죗값을 치르며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깨달아 인정하고 그분께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구원을, 생명을 값없이 받든 지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운명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왜 태어났니’가 맞는 말이기도 하고, 또 그에 대한 대답은 본질적 죄인의 형벌을 안고 이 땅에 왔지만, 그대로 사탄의 올무에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창조주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여 영원히 살 것인가를 선택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러하니 결코 인생을 막연히 즐기거나 향유 하기보다는 치열하게 이 영원한 생명을 이루는 절체절명의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야 비로소 세상은 아름답고 복된, 천국의 모형인 지상의 천국이 될 것이다.
실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태어남은 지극히 복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