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공서라고 권위있는 기관이라고 다 믿을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진작부터 그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권위는 권위라 모르는 일이 있으면 찾게 되고 의지하게 된다. 특히 나처럼 아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언어에 대해서는 한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더하리라.
요즘 인터넷에서 떠도는 '쉰김치'라는 단어를 보았다. 내용을 읽어보면 익은 김치인데 그 김치를 쉰김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내심 못마땅하던 차에 이웃과 쉰김치를 다룰 일이 있었다. 그 김치가 신김치였는지 아니면 그냥 익은 김치였는지 모르되 김치볶음밥을 했다는 걸로 보아 익은 김치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 김치를 일러 '쉰김치'라고 표현했기에 덕분에 쉬다와 시다를 구분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 표현이 등장했다.
국어사전은 '쉬다'를 시금하게 변해서 상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쉬다'는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쉰김치라면 먹지 못할 김치가 되어야 옳다. 날이 따뜻해지면 김치는 빨리 익는다. 익어서 도가 지나치면 신김치가 된다. 신김치가 더욱 시어지면 초가 된다고 말한다. 이는 신맛을 지닌 식초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 그 초가 된 김치를 먹을 수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이는 극히 드물어 대부분은 버리게 된다. 하긴 초가 된 그 김치가 더 발효하면 신맛마저 없어진다. 그러나 그런 김치를 쉰김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국어사전은 '날이 따뜻해서인지 김치가 쉬이 쉰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옳은 용법이 아니라고 항의했더니 틀리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게다가 묵은 김치는 익은 김치라는 말까지 곁들였다. 묵은 김치가 익은 김치인가. 다음은 국립국어원의 답변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쉰 김치’와 ‘신 김치’ 가운데 묵은 김치를 가리키는 말로 좀 더 적당한 것은 ‘신 김치’로 볼 수 있습니다. ‘신 김치’는 잘 익어서 신 맛이 나는 김치를 뜻하지만 ‘쉰 김치’는 지나치게 익어서 손대기 어려운 상태의 김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전에서 ‘쉬이’의 용례로 쓰인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김치가 쉬이 쉰다.’에서 ‘김치가 쉬이 쉰다.’를 특별히 잘못 쓰인 표현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는 날씨가 따뜻해서 김치가 손대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가 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답변을 읽고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큰일났다. 묵은 김치가 왜 신 김치인가. 왜 쉰김치가 지나치게 익어서 손대기 어려운 상태의 김치인가.
묵은 김치는 한마디로 해서 해묵은 김치다. 해를 넘긴 김치라는 뜻이다. 묵은 쌀은 햅쌀이 아닌 한해 묵은 쌀이고 묵은 거지, 묵은 논, 묵은 때, 묵은 상처, 백년 묵은 여우, 천년 묵은 구미호처럼 해를 넘겨 오래 된 김치를 묵은 김치라고 말한다. 물론 억지를 부리자면 묵은 김치가 익은 김치라고 할 수 있겠다. 해묵기는 해도 익지 않을 수 있으므로 옳은 표현은 아니지만. 하지만 신 김치가 묵은 김치일까? 여러 해 묵은 김치도 있다. 여러 해 묵은 김치란 담아서 봉해두었다가 고의로 여러해 묵힌 다음 꺼내 먹는 김치로 반드시 시다고 할 수는 없다. 김장 김치를 잘 봉해두면 다음 해 오유월, 간혹은 칠월까지도 먹는다. 요즘은 김치냉장고가 발달해 여러 해 묵은 김치 먹기가 어렵지 않아졌다. 그러면 그 묵은 김치가 '신 김치'인가? 잘 익은 김치는 반드시 신맛이 나는가? 잘 익은 김치가 신 김치라는 공식은 없다. 익었다고 해서 신맛이 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김치 하면 익은 김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익은 김치가 반드시 시지는 않다.
이번에는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김치가 쉬이 쉰다를 보자. 쉬다라는 것은 상했다라고 하는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여름철이면 밥이 쉬이 상하고 음식이 쉬이 상한다. 변질된다는 뜻이다. 변질과 발효가 같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변질은 못먹게 되는 것이고 발효는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김치는 발효식품이다. 발효가 지나치면 물론 먹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쉰김치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김치로 요리를 해서 김치 부침개, 김치 찌개, 김치 볶음등등을 만들었을 때 그 김치가 쉴 수는 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쉬다의 개념은 열을 가해 익힌 음식이 상했을때 쉰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땀을 잔뜩 흘렸을 때도 쉰내가 난다고는 한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열이 관련되므로 발효해서 쉰내가 난다고는 하지 않는다. 엄연히 익는다와 쉬다는 다르므로. 하긴 쉰쌀이 있기는 하다. (불려놓은 쌀이 쉬기는 한다.)
인터넷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여과되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공간이므로 '쉰김치'라고 하는 저런 용법이 떠돌수는 있다. 저 쉰김치를 많이 보았으나 잘 알지 못해서 나온 용법이려니 하고 보아 넘겼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은 다르다. 온 나라의 국어 사용법의 기준을 세우는 곳이다. 인터넷에서 '귀저기'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옳은 단어는 '기저귀'라고 일러주어야 옳다.
날이 따뜻해서 김치가 쉬이 쉰다라고 말하면 김치가 쉬이 시어진다 내지는 김치가 쉬이 익는다라고 잡아주어야 옳지 않은가. 김치가 쉬이 쉰다에서 그 쉰다가 시어진 나머지 손대기 어려울 정도라고 고집한다면 꼭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읽는 이는 그 문장의 옳은 뜻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즉 날이 따뜻해서인지 김치가 빨리 익는다=>너무 익어서 시어진다=>시어짐이 도를 지나쳐 쉬어버린다. 물론 쉬다의 올바른 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국립국어원의 답변에 꿰어맞추어 순서를 생각하자면 저렇다. 저 문장을 읽은 사람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까?
하나 더, 김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깍뚜기, 오이 소박이, 나박김치, 열무김치, 동치미, 고들빼기, 고춧잎 김치, 백김치, 갓김치, 총각김치, 파김치, 보쌈김치, 섞박지 등등 내가 담아 먹었던 것만 해도 이 정도고 아마 조사해보면 훨씬 더 많은 종류의 김치가 나올 것이다. 이 모든 김치가 변질되면 쉰김치라고 말하는가? 내 삶이 짧아서, 내 경험이 한정되어서 그럴 것이지만 저런 표현은 들어본 적이 없다.
저처럼 분명히 다른 개념들이 왜 저리 혼동되는지 알 수 없다. 국립국어원의 대답이 저렇다면 어디로 가서 물어봐야 하는가?
평상시 사용하는 저 흔한 단어에서조차 이처럼 혼란스러워하고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른다면 외국어를 아무리 잘한들 무슨 소용인지. 매일 먹는 김치에 관한 표현조차 저리 흔들린다면 대체 우리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첫댓글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