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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해야 할 이단적인 가르침!
2. 처음에 아담은 혼만 있고 영은 없는 상태였다?
김명현 박사는 아담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혼만 있고 영은 없었다는 생전 처음 듣는 요상한 주장을 합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영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2장 7절과 고린도전서 15장 45-46절을 곡해한 데서 나온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 두 구절을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1) 창세기 2장 7절에 대한 곡해!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구절의 "생령"은 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영이라는 뜻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생령의 "생"은 히브리어로 "하이"이며, "살아 있는, 생존하여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령"은 "네페쉬"로 "숨 쉬는 존재, 영혼,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혼(영혼)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김명현 박사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듭니다. 이것을 근거로 아담이 지음받았을 때 영이 없었고 단지 혼적인 존재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 심히 기묘하게 만드셨습니다.
시편 139:13-14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그런데, 사람의 구조 중 가장 신비한 것이 영입니다. 그것은 다음 성구들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습니다.
전도서 8:7-8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전도서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많은 학자들이 이 구절의 "바람"을 실제 바람으로 이해합니다. 저도 과거에는 바람을 뜻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구절들을 읽는데 갑자기 '혹 바람이 영을 뜻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원어를 찾아보았더니 "바람"과 "영" 두 가지 의미가 다 있는 "루아흐"였습니다.
과연 이 구절들에 나오는 "바람"은 바람일까요? 아니면 영을 뜻하는 것일까요? 먼저, 전도서 8장 7-8절에 대해 롤랜드 머피는 이렇게 썼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루아흐를 '바람'으로 해석하기를 좋아하고, 이것이 적절한 해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이어지는 '죽는 날'의 문맥에 따르면 생기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
또, 윌리엄 브라운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지식이 없는 인간은 자신의 생명이나 죽음에 대하여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다(v.8). 그는 생명 숨(루아흐)과 죽음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조절할 수도 없다."
이처럼 바람을 영과 관련 있는 생기나 숨으로 이해했습니다. 또한, 크레이그 바솔로뮤는 이렇게 썼습니다.
"'바람'은 '영'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코헬렛("지혜자"-저자 주)은 여기서 둘 다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바람'은 모든 것이 수수께끼 같으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다는 그의 되풀이되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아무도 바람을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으로 인간의 영이 '끝'나는 것이 그렇다. 곧 죽음에 대한 통제는 인간의 힘 바깥에 있다."
이처럼 크레이그 바솔로뮤는 바람이 단지 바람이 아니라 영을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후 문맥을 볼 때 바람이 단지 영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전에는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전8:7)라고 두 번이나 "장래 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바람은 장래 일과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더구나, 바로 뒤에는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라고 역시 장래 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의 바람이 죽음과 관계있는 사람의 영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전도서 11장 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바람의 길이 어떠함을 ... 네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요한복음 3장 8절을 상기시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 구절은 언어유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프뉴마'(pneuma)는 '바람', '숨' 혹은 '영'을 의미합니다. 이런 일치는 바람의 효과와 성령의 사역 사이의 비교를 끌어낼 수 있게 해 줍니다. 예수님의 강조점은 바람과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은 그 기원과 과정을 헤아릴 수 없지만, 그 결과를 눈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그 기원과 과정을 헤아릴 수 없지만,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은 내적 변화와 외적 열매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비한 것이지만 그 실재를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비한 것이지만 그 실재를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거듭남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영이 거듭나는 것은 설명하기 힘든 신비입니다. 비슬리-머리는 "8절의 비유적 이야기는 그 실재와 더불어 또한 인간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의 불가해성을 예증한다."고 했습니다. 안드레아스 쾨스텐버거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바람의 기원에 대한 신비가 구약과 유대문헌에 상당히 자주 언급된다. 현재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비유의 핵심은 바람과 영적 탄생 모두가 그 기원과 이동에 대해 신비롭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것도 신비지만, 배 속의 아기에게 영혼이 깃드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신비입니다. 그래서 두에인 게릿은 전도서 11장 5절에 나오는 두 가지를 "인생의 미스터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알 수 없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롤랜드 머피는 이 구절의 바람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만일 루아흐가 4절에 나오는 의미인 '바람'으로 번역된다면, 전도자는 '하나님의 행사'로 비견되는(3:11; 7:13; 8:17) 자연의 신비에 관해 두 가지 실례(바람과 파종)를 제시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지 한 가지 비교, 곧 태 안의 루아흐("생기")의 활동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제시된 잉태와 출생에 관한 신비는 시편 139:14-16; 욥기 10:10-11; 제2마카비 7:22 등에 나온다. 5절은 11:3-6의 핵심구절로 전도서 후반부의 기본 주제인 하나님의 행사에 관한 인간의 무지(8:17)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윌리엄 브라운은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원천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 누구도 바람을 진두지휘할 수 없고(v. 4; 8:8), 그렇다고 바람을 따라갈 수도 없다(1:17, 2:26, 4:16, 6:9 참조). 더욱이 바람의 방향을 하늘에서도 예측할 수 없듯이(1:16). 인간은 바람이나 생명의 숨결(루아흐)이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없다(v. 5). 전도자는 바람의 진로와 출생의 신비가 인간의 계획과는 무관하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이클 이턴은 이렇게 썼습니다.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i) '바람의 길이 무엇인지 네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또는 자궁 안에서 뼈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네가 알지 못하는 것처럼'(RV, NIV의 해석을 따르자면), ii) '영의 길이 무엇인지 네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또는 자궁 안에서 뼈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네가 알지 못하는 것처럼'(AV의 해석을 따르자면) ...
두 번째 해석은 루아흐를 인간의 생명이나 영혼을 언급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해석은 그 구절에 어떤 일치성을 가져다 주며, 인간의 태아가 성장한다는 생각과 잘 어울린다. ...
첫째 해석과 둘째 해석 사이에서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절대적인 선택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두 번째 해석이 좀 더 개연성이 있는 것 같다. 인간 영혼의 기원의 신비와 인간 태아의 신비스런 성장은 인간의 무지의 명백한 증거이다."
저는 이 설명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바람도 사람의 영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람의 길이 신비인 것처럼, 아기 속에서 영혼이 어떻게 생기는가도 신비입니다. 그런데 창조 때 어떻게 사람에게 영이 생겨났는가는 더 큰 신비입니다. 성경에도 그것을 자세히 설명한 곳이 없습니다. 간단히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참고로, 케네스 매튜스는 이 구절을 에스겔 37장과 비교하고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숨을 불어넣는다'(나파흐)는 묘사는 에스겔이 마른 뼈를 본 환상(37:9-10)에 아주 밀접한 평행을 두고 있는데, 여기서 다시 조립된 죽은 자의 뼈는 '영'(개역성경은 '생기')이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다시 생명을 갖게 된다. 여기서 에스겔은 '생명의 호흡'(니슈마트 하임) 대신에 '영'(루아흐)을 사용하지만 이 둘은 여기서도 그 외에 다른 곳에서도 흔히 같은 것으로 다루어진다. 이렇게 호흡을 불어넣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담의 육신이 생명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생명의 호흡'이 하나님에게서 기인하고 사람 안에 체화된 생명유지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욥기 27장 3절이 이를 반영한다. '나의 생명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루아흐)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창세기 2장 7절의 "생기"와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생기"는 우리말은 같지만 원어가 다릅니다. 그런데, 에스겔 37장의 "생기"는 "루아흐"입니다. 그래서 생기가 곧 영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고든 웬함의 글도 이런 착각을 부추깁니다.
"'불어넣으시니'(나파흐) ... 가장 밀접하게 평행되는 구절은 에스겔 37:9인데, 거기에서 다시 맞추어진 몸들을 소생기키기 위해 그것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도록 예언자에게 명령한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바람/영으로 채워져서 살아나게 된다."
그러나 케네스 매튜스의 주장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37장의 "생기"는 문맥에 의하면 사람의 영이 아니라 성령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7:14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반면에 창세기 2장 7절의 생기는 문자 그대로 생기를 뜻합니다.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의 내면을 만드신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상 설명해드린 것처럼, 창세기 2장 7절은 영과 혼이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혼(생령)만 언급하고 영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김명현 박사기 이때 아담에게 혼만 있고 영은 없었다는 이상한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때 인간의 영이 지음받았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창세기의 권위자인 엘런 로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 흙으로 만든 몸에 생명의 '호흡'이 불어넣어졌다. 호흡에 해당하는 이 말은 하나님께 그리고 사람에게 주어진 생명에 사용되었고, 동물에게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 이 호흡은 따의 사람에게 단순한 생기 이상을 가져왔다(2:7). 그 호흡은 영적 지각(욥 32:8, 총명)과 활동하는 양심(잠20:27)을 가져다준다."
진실로 이때 인간의 영이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다음 성경구절들이 결정적으로 뒷받침해줍니다.
스가랴 12: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루아흐)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이사야 57:16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더 이상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그러므로 인간의 영과 혼은 하나님이 사람을 처음 만들 때 만드신 것이 분명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먼저 흙으로 인간의 몸을 만드셨습니다. 그 후 그 몸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이때 인간의 영과 혼이 창조되었습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기 위해 하신 일은 사람의 몸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 두 가지뿐입니다. 그래서 생기를 불어넣을 때 영과 혼이 모두 만들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달리, 이 구절에 영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니 혼만 만들어졌고 영은 후에 주셨다고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천지창조를 끝내셨습니다. 그래서 2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1-2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인간 창조를 끝내셨습니다. 그것이 1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26-28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생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때 하나님은 아담은 물론 하와("여자")까지 사람의 창조를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창조가 끝났기 때문에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그것을 다시 반복한 것이고 그 구절 역시 완성된 사람에 대해서 쓴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혼만 있고 영이 없었다면 창조가 끝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절대 옳은 견해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사람을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생령"으로 잘못 번역된 생혼은 짐승에게도 있습니다. 그 증거로, 생령의 원어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것은 창세기 2장과 9장에서 들짐승들과 새들을 상대로 다시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네페쉬 하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9: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네페쉬 하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네페쉬 하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창세기 9: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네페쉬 하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또한, 그보다 전에 창세기 1장에서 바다의 짐승과 물고기들, 그리고 가축과 땅의 짐승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20-2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네페쉬 하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네페쉬 하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네페쉬 하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때문에 그 견해가 맞다면 짐승과 사람의 차이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7절의 아담을 혼만 있고 영은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구절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듣고 보니 하나님이 창세기 2장 7절에서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인간의 혼뿐 아니라 영을 창조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긴 해도 왜 덜 중요한 혼은 언급하고 더 중요한 영은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왜 인간을 최종적으로 생혼이 되었다고 말씀하였을까요?"
앞의 것은 지금 답변할 수가 없습니다. 후에 영과 혼을 본격적으로 설명할 때 설명해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뒤의 것은 지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생령"(생혼)은 동물들에게도 사용된 표현이고 동물들은 살아서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살아서 자의식과 지정의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기를 불어넣어 영에 이어 혼을 만들자 비로소 동물처럼 자의식과 지정의를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권위자인 엘런 로스도 저와 생각이 같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의하면 물질적인 육체와 하나님의 호흡의 결합은 살아 있는 존재(living being)를 만들어낸다."
또한, 가장 권위 있는 주석인 『WBC 창세기』 주석의 저자 고든 웬함도 저와 견해가 같습니다.
"'생령'은 암시적으로 죽은 자와 대조된다(예를 들어, 민5:2; 6:6, 11). 창세기 1, 2, 9장에서 네페쉬 하야라는 문구가 사용된 것을 고려한다면, 2:7의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는 '그래서 사람은 산 존재가 되었다'는 TEV의 번역 이상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아직 생명이 없는 몸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하나님은 사람을 살아나게 하셨다."
참으로 이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생령'의 "영"에 해당하는 "네페쉬"는 "숨 쉬는 존재, 영혼, 생명"이라는 뜻이고, 원어 사전에도 "네페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G. Harder)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냥 혼이라고 하지 않고 살아 있는 혼이라고 했습니다. 강조점이 "살아 있는"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혼은 이미 창조가 완성된 동물들처럼 사람의 창조가 완성되어 의식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런 뜻이지 결코 영은 없고 혼만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요상한 주장에 절대 미혹되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