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채우시는 주님
요한복음 2:1-11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절 둘째 주일이다. 본문은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다. 주현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메시야로서 신비를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째 사건의 무대로 혼인 잔치 현장을 보여준다. 혼인 잔치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기회였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는 여러 가지 메시지를 준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따라 저마다 제목이 다를 수밖에 없다. 포도주인가? 혼인 잔치인가? 조건 없는 믿음인가? 메시야에 대한 증거인가?
빈 항아리 같은 내 삶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채우시는 예수님의 능력인가, 요한의 결론대로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낸 첫 번째 신비적 사건인가,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인가? 여러분은 어떤 주제를 선택하겠는가?
요즘은 혼인 잔치를 꼽을 사람이 많다. 결혼식이 귀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색동교회는 올해 6가정에서 혼인 잔치를 예정한다. 이미 한 가정은 연초에 딸의 혼인 잔치를 하였다.
내 기대에 내년에는 더 많은 가정이 혼인 잔치를 위해 준비할 줄로 믿는다. 젊은이가 천생연분의 자기 짝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가정마다 그런 기쁨과 감사로 함께 하기를 소망한다.
1)
요한복음이 전하는 공생애 첫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주님이 내게 어떤 의미를 주시는 분이신가를 보여준다.
4세기 말에 70인 역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교부 히에로니무스가 있다. 영어로 제롬이라고 부른다. 그는 교황의 명령을 받아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머물렀다. 그는 ‘불가타’ 성경을 완성한 사람답게 성지에 관심이 많았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동굴에서 번역 작업을 했을까? 그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마을 나사렛에서 가나가 보였다고 한다.
그런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열렸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잔치에 참여한 것은 자연스럽다. 작은 마을에서 혼인 잔치는 인근 동리에서도 손님이 찾아올 만큼 큰 잔치였을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혼인 잔치는 일상의 즐거움이며, 또 미래의 구원과 기쁨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비유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인 잔치와도 같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5).
혼인 잔치는 당사자들이나, 손님들에게나 즐거운 날이다. 모처럼 음식도 풍성하다. 그러니 정성껏 인사치레를 한다. 주인공은 물론 하객도 단장한다. 모두 즐거워하는 행복한 순간이다.
예수님도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가나에서 열린 혼인 잔치에 예수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제자들과 함께 참석한 이유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즐거움과 같이 하신다.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2).
2)
가나의 혼인 잔치가 널리 유명한 까닭은 맹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기적 때문이다.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 본문으로 말씀을 전한다면 사흘은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오죽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드러낸 첫 사건일까?
혼인 잔치가 열린 가나는 그 지명의 의미가 ‘갈대’라는 뜻이다. 출애굽기는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이 당시 홍해, 즉 갈대 바다라는 뜻을 가진 바다를 건너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였다고 전한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새로운 시대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런데 잔치 중간에 큰 문제가 생겼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 여전히 손님은 남아 있었고, 아직 파장은 아니었다. 졸지에 혼주와 신랑 신부에게 근심이 일었을 것이다. 가까운 친척들의 얼굴도 어두워졌을 것이다.
잔치에서 포도주는 필수품이었다. 평상시에도 포도주는 일상적인 음료이다. 차라리 ‘포도주를 즐기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빅토르 위고는 “신은 불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포도주를 치하하였다.
이런 난감함이 없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면 잔치 분위기를 깨뜨릴 것이다. 가나는 아주 작은 마을이어서 당장 포도주를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준비했던 포도주가 최선을 다한 것이며, 더 준비할 능력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손님은 여전히 술을 찾는다. 궁할수록 사람들이 더 찾는 법이다. 일상에서도 뭔가 부족하면 계속 모자라는 것만 보이는 법이다.
잔치집에서 웃음과 기쁨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잔치가 아니다. 잔치의 가장 큰 특징은 기쁨인데, 그 즐거움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포도주는 종말적인 기쁨과 삶의 풍요를 상징한다.
이러한 결핍 상황을 보고 어머니가 먼저 걱정하신다. 아들에게 도와주라고 눈치를 주신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3).
그런데 예수님은 냉정하게 대답하신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4)다고 하시면서, 포도주가 떨어진 일에 대해 무심해 하신다. 어머니의 심정처럼 잔치집 주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몰라주는 듯하다.
그런데 어머니의 입장은 더 초조해진 듯하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5).
이제 예수님이 나설 차례가 되었다. 예수님은 마당 한켠에 놓여 있는 물 항아리를 가리키며 물을 가득 부으라고 하셨다. 하인들이 속으로 의아했을 것이다. 이 항아리는 정결 예식을 위해 물을 준비해두는 항아리였다.
그 항아리의 물은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손과 발을 씻는 용도였다. 이미 물도 바닥 난 상태였다.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인들이 빈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8)고 명령에 따라 순종했더니, 문제가 싹 해결되었다. 그래서 기적같은 일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나서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빈 항아리의 물은 유대인의 정결례에 사용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지금은 정결례를 행할 때가 아니라 잔치를 지속해야 할 때이다.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워야 할 이유를 몰랐다. 그럼에도 단지 시키니까 그대로 했을뿐이다. 항아리에 물이 다 채워지고, 그 물을 나눌 때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근심이 깃든 잔치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근심이 웃음으로 바뀌고, 파장이 될 뻔한 잔치가 칭찬과 감탄으로 변했으니 기적이 따로 없다.
이 기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잔치의 즐거움은 최상급 포도주와 함께 무르익어 갔다.
3)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은 세계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기적이다. 특히 애주가들이 꼽은 가장 사랑받는 복음임에 틀림없다.
예전에 독일에서 한 지붕 아래 살던 슈타인-뷔테 목사님이 들려주신 농담이다. 독일 생활이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인데도, 그가 독일말로 하는 이야기를 대개 알아들었다. 워낙 유명한 에피소드여서 쏙쏙 귀에 들어왔을 것이다.
스위스 국경 가까이 사는 독일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스위스에서 쇼핑을 한다. 술과 담배를 사기 위해서다. 세금이 붙지 않으니 훨씬 값싼 느낌이 들어 자동차 뒤 트렁크에 가득 채워온다. 물론 불법이다. 어떤 사람이 국경 세관 단속에 걸렸다. 트렁크를 열어 술을 확인한 세관 공무원을 보고 그는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분더바! 물이 술로 변했도다.” 그냥 그걸 농담이라고 하길래, 내가 그 마음을 알아서 웃어 주었다.
지금도 가나 포도주가 유명하다. 이스라엘로 성지 순례 가면 꼭 두 가지를 구입한다. 가나에서 빚은 포도주와 요단강 세례용 물이다.
요한복음은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을 그냥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새로운 개념 ‘표적’이라고 부른다. 기적과 표적은 이렇게 구분한다. 기적은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표면적인 이야기’이다. 표적은 더 큰 믿음을 지닌 사람이 볼 수 있는 ‘더 깊은 말씀의 부요함’이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
예수님은 행여 기적을 일으키는 마술사처럼 보일까 싶어 주저하신다. ‘단순한 표면적인 이야기’에 그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커녕 기적만 부각되고 회자될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주님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이다. 바로 요한복음이 말하려는 ‘표적’이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단순한 마술 같은 기적이 아니다. 인간의 연약한 삶을, 인간의 빼앗긴 기쁨을, 한 가정의 근심을 변화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일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표적들을 통해서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해 ‘더 깊은 사랑의 부요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믿음의 부요함으로 이 사건을 보면 메시야의 현현에 의미가 두루 보인다. 그래서 주현절의 메시지가 된 것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항아리를 가득 채운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은 중요한 상징이다.
옛 언약의 경건한 물이 이제는 새 언약의 구원의 피로 바뀐 것이다. 유대교 전통의 정결항아리 물로, 혼인 잔치의 포도주를 마련하신 일은 율법의 질서를 은혜의 질서로 바꾸심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선물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스스로 새 포도주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
또한 은혜의 질서를 다시 율법의 질서로 되돌리지 말라고 하신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우리의 인생은 여유나 만족보다, 늘 결핍투성이다. 계획한 대로, 또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별로 없다. 그때는 빈 항아리조차 은총이 될 줄 모른다. 도대체 빈 항아리에 물을 붓는 일과 내 결핍된 상황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주님은 우리를 향해 내 안에 머무르라고 하신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나와 함께 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은총의 선물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은 내가 걱정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버’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의 믿음으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는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기도요, 은혜요, 내 삶을 변화시키는 기적이 된다.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잔칫집처럼 기쁨과 웃음으로 무르익어갈 것이다. 맹물 같은 인생이 최상급 포도주와 같은 인생으로 변화될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시키는 대로,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인생 항아리를 가득 채우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내 빈 항아리에 은총으로 채우시길 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기쁘게 따르라. 내 삶에 하나님의 표적이 드러나게 하라.
기도는, 순종은, 감사는 ‘그가 시키는 대로’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개입은 이미 내 삶의 문턱에 이르렀음을 명심하라.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인생에, 여러분의 가정마다 빈 항아리의 은총으로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