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5월,
베링 사업단장 하 정수 은퇴(70세)
2대 사업단장 하동수 취임(49세)
신임 사업단장의 첫 과제는 24개에 달하는 철도역 건설공사였다. 세기의 입찰로 떠들썩 했던 공사를 수주한 3개국의 5개 건설업체들이 7개 공구로 구분된 20여개 현장에서 일제히 작업에 착수했다.
사업단은 자치주의 경제자립기반을 위해 공단을 조성할 계획이다.
따라서 모집 인력은 시한부 현장인부보다 이민유치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민자들의 수용시설은 일단 건설현장 숙소로 해결되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족들까지 거주할 주거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단 입주업체들의 문제였고 사업단의 몫은 도시계획을 세우고 구획을 정해주는 데까지다.
건설사들이 당면한 난관은 인력조달이었다.
혹독한 기후 때문에 인력모집은 어려웠다. 후한 조건을 내세워도 응모자가 적어 업체들은 안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진즉 예측했던 사업단 측은 김기수 라인을 동원해 탈북자들을 대규모로 모집하는 한편 업체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인력지원의 반대급부로 내세운 조건은 공단조성에 필요한 기반시설.
“현장인력들이 거주할 아파트를 지어 달라. 기능공 양성시설과 함께.”
어차피 지을 현장용 막사에 약간의 추가비용만 부담하면 되는 이 제안을 업체들은 환영했다.
이윽고 자치주 전역에서 타워 크레인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업단의 복안은 탈북자들을 기능공으로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천명 규모의 연수원이 최우선적으로 건설되었다.
기능공 양성은 물론 이주민들의 소양교육장이기도 한 이 시설은 숙소를 겸한 복합건물로 설계되었다. 단순한 주거시설로만 알았던 건설업체측은 과잉설비라며 투덜댔다.
소요인력은 디젤해머, 불도저, 트럭 등 토목 공사용 설비의 운전, 정비인력들이다. 연수원에 상주하는 교수진과 보조 인력들은 교사인 동시에 공사장비의 정비 등 현장지원 인력이기도 했다.
초기이민은 탈북자들이 위주였다.
이들은 이르쿠츠크의 김기수 루트로 모집되었다. 탈북자들과의 접촉이 쉬운 하바롭스크에 인력모집 사무소를 개설한 사업단은 1995년부터 은밀히 모집한 탈북자들을 베링지역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한두 명씩 찾아오던 그들은 베링 사업단이 정치와 무관한 민간단체이며 취업까지 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삽시간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루에 50여 명 까지 오는 날도 있었다.
첫 해에 취업한 2천여 명은 모두 남자들이라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이들은 적응훈련을 겸한 기능교육을 마치자 바로 현장에서 활약했다. 일단 이들을 써본 시공업체들은 더 이상 연수원 등의 시설이 과잉이라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이곳까지 온 탈북자들은 마치 전투에 임하듯 맡은 바 작업을 수행했고 이들의 성실한 태도는 건설업체들을 감복시키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듬 해부터 서서히 애로사항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족과 함께 오는 탈북자들이 늘어난 탓이었다. 가족을 나누어 수용할 수는 없다. 당장 숙소난이 발생했고 보육시설과 학교도 필요했다.
물론 이런 시설들도 건설계획의 뒷부분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리 발생한 문제라 사업단은 긴급대책 수립에 들어갔다.
결론은 간단했다.
“수년 뒤에 어차피 지을 시설 아닌가? 당겨짓자.”
본격적인 콘크리트 공사가 지반건조가 끝난 2000년부터 시작되었다.
공사는 완성 후의 안전을 위해 영상의 온도에서만 진행했다.
영상인 기간은 3개월 내지 6개월.
대신 여름은 밤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짧고
추코트 반도와 알라스카 지역은 아예 백야가 계속된다.
그래서 여름이면 2~3교대로 돌관 작업을 진행했다.
베링지역의 여름은 24시간 내내 이어지는 작업열기로 뜨거웠다.
하지만 여름이 지나면 갑자기 썰렁해지면서 동면기로 들어갔다.
철도 작업이 동면기를 맞는 겨울이면 작업자들은 캄챠카로 이동해
지열발전소 건설에 투입된다.
캄챠카에는 발전소 건설팀이 있었다.
캄챠카 반도에는 22개의 활화산을 포함한 120개가 넘는 화산과 무수한 온천들이 있다.
발전소는 베링철도의 핵심시설이기도 했지만 공단과 그 배경도시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날 에너지 수요에도 대비해야 했다.
건설팀은 지열 발전소를 건설해 세계에서 가장 싼 전기를 공급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고온암체高溫岩体 발전공법은 마그마 층 가까이 묻은 파이프를 통해 물을 순환시켜 끓는 물을 얻는 원리다. 대량의 파이프라인을 매설하는 지열발전소의 면적은 웬만한 도시와 맞먹는 방대한 규모였다.
발전에 사용된 물은 난방용으로 순환되고 난방을 마치면 다시 마그마 층으로 보내 가열한다. 지열은 무한동력이고 소요 투자는 파이프라인 설치비가 전부였다. 세계에서 가장 싼 방식으로 조달한 전기와 난방은 무상에 가까운 낮은 가격으로 제공되었다.
덕분에 극지생활에 가장 필요한 자원, 즉 에너지는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비닐하우스는 햇빛대신 태양광 파장의 조명으로 야채를 재배했다.
극지 특유의 질병인 괴혈병은 비타민 부족이 원인이다. 그러나 야채가 흔해진 베링지역에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
혹한을 피해 일할 수 있는 캄챠카 현장은 시베리아의 추위에 지친 이민자들의 휴양지였다. 온천과 사우나 후 한 잔을 즐기는 장소가 늘어가면서 현장부근에는 소비향락문화가 서서히 자리 잡아갔다. 이 기간은 지역민들의 단합을 도모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베링지역에 취업하면서 짧게는 6주 길게는 4개월씩 교육받기 때문에 누구나 수십명 씩의 동기생들이 있었다. 극한상황 속의 긴장은 이들을 결속시켜주었고 그렇게 맺어진 이들의 유대의식은 강했다. 동기생을 여러 현장으로 나누어 배치하는 방침 때문에 이들은 1년에 한 번씩 캄챠카에서 모이는 때를 고향에 가는 것처럼 기다리곤 했다.
자치주는 이 기간 동안 기술을 가르치고 교양을 겸한 정신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교육이수 점수가 승급심사의 참고사항이기 때문에 주민들은 매년 일주일 이상씩 교육을 받았다. 출신지역과 인종이 제 각각인 주민들의 동질감은 이런 과정을 통해 서서히 배어들어갔다.
동수의 주요 업무는 자원개발과 공단조성 문제였다.
자치주의 환경은 지구의 마지막 공원이라 불릴 만큼 깨끗하다. 때문에 초기부터 환경을 오염 없는 개발방식 연구에 고심해왔고 지열 발전과 난방과 발전도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자치주는 금속, 화학 등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입지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표적 공해산업들이기도 했다.
때문에 초기부터 입주 업체들에게 환경보호시스템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렇게 되자 입주신청을 하려던 업체들은 주춤거렸다. 철도완성까지는 20년 이상 남았기에 사업단 역시 입주업체 선정을 서두르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입주업체 유치에 전기를 마련해준 것은 빅 죠지였다.
신천지를 구경하러 왔다면서 자치주로 이민오는 부하들을 대동한 그는
불쑥 동수를 방문했다.
“얼음 구덩이에서 뭐 하나? 배트 매스터슨.
말쑥한 외투에 러시아식 털모자 샤프란으로 멋을 부린 죠지가
카멘스코예의 사업단 사무실로 들어서자 동수는 입을 딱 벌리며 반가워했다.
용건 따위는 일체 묻지 않고 그저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동수와 포옹한 죠지도 그러한 동수가 기꺼웠던 모양이다.
“자네가 채용시킨 한국인들 말이야. 아주 좋더라구.
지금은 식구들 셋 중 하나는 한국인일 만큼 많아.
그런데 이 친구들이 요새 몽땅 베링 바람이 들어서 말이야.
죠지는 머리를 가르키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보였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꼬이실래 그런지 한번 보러왔네.
“꼬인 적 없는데--?
싱글대며 죠지를 바라보는 동수.
“하지만 지금부터 미합중국의 빅 죠지 보스를 꼬여 봐야겠는데.
“그럴 만한 게 있을까?
싱긋 이빨을 드러내는 빅 죠지.
“일단 손님들과 인사부터 하고, 혹시 한국말을 하십니까?
같이 온 야무져 보이는 한국계에게 물었다.
“전혀, 하지만 약간 알아듣기는 합니다.
보스와 친해 보이는 동수에게 그들은 주눅이 들어있다.
“식구들은?
“샌프란시스코에 있습니다. 자리 잡히면 데려올 생각입니다.
“됐어요. 헬리콥터 준비되는 대로 한번 둘러봅시다.
발 뻗고 살만한 덴지 시찰부터 하셔야지.
잔을 부딪친 네 사람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넣었다.
“덕분에 술 마시는 게 한국식이 되어버렸어. 홀짝 거리는 게 싫어.
헬리콥터는 소년단 탐사코스를 따라 날아갔다.
오호츠크 해에서 캄챠카를 횡단하면서 화산과 평야지대,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보여준 후 베링해로 빠져나가는 코스.
풍성한 어장과 화산, 온천이 어우러진 자연공원의 경관
이 코스에는 자치주의 잠재력을 보여주려는 뜻이 담겨 있다.
“10여년 후면 하와이 못지않은 관광지가 될 걸세.
그 때를 대비해 터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들어오고 있지.
죠지는 갸웃했다.
“관광지가 될까? 무슨 매력이 있다고 여기까지 돈을 쓰러오지?
“있다가 보여주지.
동수가 씨익 웃었다.
네 사람은 내리자마자 귀빈 숙소의 사우나로 직행했다.
외투를 입었다지만 난방이 시원찮은 헬리콥터에서 두 시간이나 지낸 그들은 동태가 되어 있었다.
추위에 떤 후에 하는 온천욕의 쾌감이란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소나무 향이 은은한 욕조와 사우나 실을
두어 번 들락거린 죠지는 흐뭇한 눈치다.
그리고 가운 차림으로 안마를 받은 후 포도주와 훈제 연어, 캐비어를 곁들인 점심을 들면서 드디어
“어이, 배트 제법 괜찮은데.
하는 소리가 나왔다. 고급음식과 시설에 익숙한
그가 그렇다면 그 부하들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다 스키장, 술집, 에스키모 쇼, 통나무집, 호텔 등을 잘 섞어놓으면 사막 복판에 세운 라스베가스보다는 훨씬 나은 관광지가 될 걸로 보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유흥시설 쪽은 전혀 몰라서.
눈을 가늘게 뜬 죠지가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동수를 응시했다.
“생각만 있다면 편의를 제공할 용의가 있네. 우린 20년 가까운 친구 아닌가?
동수의 표정은 진지했다.
“베가스를 생각하고 있군. 나쁘지 않은데... 한번 생각해 보지.
하지만 자치주는 혼자 상대하기는 너무 큰 덩치야 적당한 지역을 골라야겠지?
죠지는 두 한국계 부하를 향했다.
“자네들 말이 맞았어. 여긴 정말로 자네들이 발 뻗고 지낼만한 신천지라구.
캄챠카 관광산업은 이렇게 샌프란시스코와 맺어졌다.
샌프란시스코는 캄챠카의 활어시장으로 성장해
동부의 보스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해산물 공급창구가 되었다.
일없이 찾는 방문객은 드물었던 캄챠카에 관광지가 형성되면서
님도 보고 뽕도 따려는 방문객이 늘어갔다.
온천과 스키, 그리고 도박장과 해산물 요리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자 자치주의 공단부지 역시 인기가 올라 신청업체가 몰리기 시작했다.
개척의 댓가
2009년, 다이오미드 섬의 현수교 건설 현장.
벽이 없는 현장 엘리베이터를 타면 청룡열차 같은 스릴을 느낀다.
내려갈 때면 뱃속이 싸르르 해지는 속도감은 열 번 넘게 타보았는데도 늘 긴장시킨다.
“언제 이런 거창한 공사를 또 보게 될까?
올 때마다 하는 소리를 되풀이하며 동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지상에서 보면 현기증이 일던 70미터 깊이의 바닥.
승강기 타워 너머로 좁아진 하늘이 보인 다.
“함경도 산골에 천평리라고 하늘이 천 평밖에 안 되는 부락이 있다던데
여기 와 보면 형님 할 겁니다.
동행한 교량과 강 선임.
“대단한 작업이었습니다.
바닥에 작업자들이 기념으로 이름들을 써 놓은 게 보일 겁니다.
평평하게 깎인 암반에 페인트로 쓴 이름과 싸인들이 보였고
한 군데는 할리우드의 스타 거리처럼 시멘트에 손자국을 찍어놓았다.
“얼마까지 파면 될 거라는 예상은 있었습니다만,
강 선임은 바닥을 가르켰다.
“그보다 훨씬 더 파도 암반층이 나오지 않아 불안했습니다.
암반층이 나타났을 때는 만세를 부르고 서로 얼싸 안으면서...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렇게 파낸 구덩이를 콘크리트로 덮어버린다니까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유치하기는... 사내자식들이.
강선임, 남자가 여자한테 옷 사주 는 이유 알아?
느닷없는 질문에 벙 찐 강 선임.
“뻔하지. 다시 벗기려는 거야. 안 그래?
“히히--, 단장님도 참
“어차피 메꾸려고 판 구멍이잖아, 사준 옷 벗기는 거나 뭐가 달라?
정 그러면 기념 행사라도 한 번 하던지...
“글쎄요. 그런 데까지는 미처 생각이....
강선임은 머리를 긁었다.
저만치서 현장 책임자 이 만수 직장이 환히 웃으며 걸어온다.
큰 공사를 무사히 마무리한 그는 요즘 얼굴에 희색이 넘친다.
케이불을 양 쪽에서 당겨 현수교를 지탱할 20만톤의 앵커를 마주 보고 있는
대소 다이오미드 섬에 각각 설치하느라고 원주민이 다 되어버린 사람이다.
“기념 행사요? 거 조옷치요. 야구 시합 어때요?
이 직장은 듣자마자 찬성했다.
“야구는 다 할 줄 알까나?
“그럼요. 50여 명 중에 야구하는 녀석들이 반은 넘을 걸요.
남는 애들은 족구하면 되죠 뭐.
역시 현장 사나이답게 시원시원 하다.
“ 좋았어! 운동 기구랑 뒤풀이 준비는 내가 맡지.
지저地底에서 벌어지는 야구 시합!
홍보팀에 알리면 카메라를 메고 득달같이 달려올 것이다.
소프트 볼 시합이 되어 버리기는 했지만 현장 사람들은 대 만족이었다.
때마침 들린 베링 소년단까지 동참하는 바람에 시합은 성황을 이루었다.
그냥 메꾸어 버리기가 아쉬웠던 현장 팀은
무슨 용도로든 한번 사용했다는데 만족했고
소년단은 역사적인 경기에 출연했다며 좋아했다.
시합이 끝나고 사람들과 장비가 빠져나간 구덩이는 더 거대해 보인다.
메꾸기 작업이 시작되면 그 곳은 현수교를 지탱하는 케이블을
다리 양쪽에서 움켜쥔 거대한 콘크리트 산으로 변할 것이다.
수십만 년에 걸쳐 떨어져있던 두 대륙은 이 다리 위에서 상봉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것이었다.
“ 이런 데서 공을 때려보기는 첨이야.
“메아리치는 게 되게 신기하지? 들어봐, 야아--호
골짜기처럼 메아리치며 여운을 끈다.
시합을 마치고 샤워실로 몰려 가는 소년단원들은 현지인들과
회식까지 있다는 소식에 싱글벙글 하고 있었다.
“자네들 몇 기지?
그들과 어울려 샤워실로 가던 동수가 물었다.
“ 78깁니다. 단장님.
그가 베링 사업단장임을 아는 소년이 존칭을 붙인다.
78기라면 1,600명 가까이 배출되었다는 의미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우리 딸도 10여 년 전에 여기 다녀갔는데 그 땐 알라스카 소년단이었지.
“대 선배님이시네요.

10년도 더된 극동 연구소 시절의 어느 날.
극동연구소 기술부에는 자기부상 열차팀, 해저터널팀, 그리고 도호꾸 대학 유학생 출신을 중심으로 구성한 교량팀의 3개 팀이 있었다.
교량팀의 임무는 두개의 섬을 연결하는 현수교 개발.
해저터널을 통해 대륙으로 연결되는 두 개의 다이오미드 섬 사이는
해저지형이 불안정한 지역이다.
때문에 터널을 피해 현수교로 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뿐만 아니라 대륙을 나누는 분기점이라는 상징적 의미도 담겨있었다.
아직 유례가 없는 세계 최장의 현수교!
적절한 공법을 찾아 교량 팀은 길다는 현수교는 모두 조사했다.
그러나 5km를 넘는 현수교 건설은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교량팀 책임연구원이 보고하자 하 동수 단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암울한 분위기가 세미나실을 휩쓸었다.
이때 열차 기술팀의 유 이근이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다른 부서에서 고생하신 결론에 대해 발언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좋으실런지요?
열차팀과 교량팀은 서로의 업무에 정통하다.
기술부장은 끄덕엿고 주눅 들어있던 교량팀은
은근히 기대 하는 기색마저 보인다.
“라인더스 사 말이 현대의 교량은 토목 공사라기보다 첨단 기술의 집약체라 했습니다.
공법에 앞서 정밀성와 강도를 갖춘 부품,
그리고 그 부품의 소재개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지요.
이 분야 업체들과 접촉해보면 Idea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도호꾸 유학생 출신인 교량팀의 젊은 연구원이 말했다.
“우수 소재업체들과 이미 접촉해 봤습니다만 모두 고개를 저었습니다. 현수교의 핵심은 다리 무게가 실리는 강선과 교각, 그리고 양 끝에서 강선을 당겨주는 앵커입니다.
강선부터 말씀드리면
피아노 줄을 쓰는 현재의 강선으로 5km가 넘는 다리르 지탱하는 와이어를 만들면
너무 굵어져 와이어 자체 무게만 50만톤이 넘습니다.
따라서 가늘면서도 강한 신소재가 개발되지 않는 한 5km짜리 현수교는 무리라 했습니다.
또 그만한 길이의 현수교는 350m가 넘는 교각이 필요한데 이건 120층 높이입니다.
그런데 파도와 결빙 압력을 버텨야하는 해상 구조물은
육상보다 더 정교한 안전성이 요구됩니다.
교각의 타워블록은 ±0.04mm이내의 정밀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한 개가 방 3개짜리 아파트 크기인 블록을 200개 정도 쌓으면서
수평을 유지하려면 이만한 정밀도는 불가피하지요.
북극해에서 일류샨 열도로 흘러가는 빙산이나 유빙도
안전을 위협하는 무시 못 할 요소구요.
일교차나 계절 편차가 심한 베링 해에 이만한 정밀도를 유지하는 구조물을
세울 실력을 가진 업체는 아직 없는 실정입니다.
구조물 제작기술이 부족하다기보다 그만한 소재를 공급할 업체가 없어요.
소재업체들은 그런 강도나 정밀도를 가진 소재를 개발할 계획조차 없답니다.
“이 선임, 고생 많았어요.
불편한 설명을 하느라 와이셔츠가 땀으로 축축해진
이 선임을 위로하는 유이근.
“업계 스스로 개발하기를 기다리기보다
우리가 OEM으로 개발하면 어떨까요?
극한에 도전하는 프로젝트이니만큼 우리가 원하는 Spec.의 물건을
찾기는 무리하더라는 경험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유 이근 책임연구원도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나이다.
이 자리의 간부들 대부분은 반평생을 베링 프로젝트와 함께 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프로젝트가 곧 인생이고
프로젝트의 성패는 곧 인생의 성패였다.
사람들은 끄덕였지만 교량팀 사람들은 시큰둥한 표정.
“전용소재 개발에는 최소한 천만불 이상이 들고
빨라도 5년에서 10년 또는 그 이상의 개발기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또 신규 라인도 깔아야 하는데 다리 한 개 물량을 납품하겠다고
그만한 투자에 나설 업체가 있겠습니까?
“프로젝트의 비전을 설명하면 장래를 보고 투자할 업체도 나오지 않을까요?
“글쎄, 아직 그런 식으로는 접근해보지 않았습니다.
재량을 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눈을 감고 듣던 하 동수 단장이 진 현구 소장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수백억 달라 프로젝틉니다. 개발투자는 지속적으로 필요하고
일단 개발되면 첨단기술을 확보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신 없는 표정의 진 소장.
“그래도 위험 요소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일단 더 조사해보고 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이번에는 교량팀과 환경 문화부 합동팀을 구성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숨 쉴 구멍을 찾아 겨우 화색이 돌아온 교량팀을 진소장이 격려했다.
“프로젝트 홍보안을 정리해 적절한 협력업체를 찾아보세요.
그렇게 발굴한 업체는 단순한 부품공급업체보다는 협력업체로 대우합시다.
사람이란 게 비전이 제시되고 신바람이 나면 무서운 걸 모르고 대드는 속성이 있으니까---.
자기부상 열차팀을 보세요. 신들린 사람들 모양 밤낮을 잊고 매달려 있잖아요.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지만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타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기술부장께서 조금만 더 고생해 주시지요.
그리고 교량팀 이 사람들아, 얼굴 좀 펴.
기죽을 필요 없어. 성공이든 실패든 결론 내는데 드는 노력은 꼭 같은 거야.
보통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아낸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성과야.
오늘은 그동안 고생한 교량팀에 내가 한 잔 사지.
어디 보자아---, 그래 지형이도 따라와.
우리 마스코트가 있어야 오빠들도 신나지. 안 그래 오빠들.
코가 죽 빠진 연구원들을 진 소장이 다독거리자 동수가 거들었다.
“소장님, 사실은 약주 생각이 나서 한 건 엮으시는 거지요?
웃음소리가 나오면서 침통했던 분위기가 겨우 밝아졌다.
숨도 크게 못쉬며 구석에 앉아있던 지형이가 휘유 하는 표정으로
양손에 V자를 만들어 흔든다.
어릴 적부터 신날 때면 나오는 버릇.
쳐다보자 얼른 손을 내리며 딴청 피우는 소녀.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
*************
오늘 잔치는 원주민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하기로 되어있다.
소년단원들이 막대기에 꽂아 모닥불 주위에 세워놓은 에스키모 식 바비큐를 보고 있다.
막대기에 저민 연어를 꿰어 오그라들지 않도록 갈비처럼 전나무 가지를 엮어놓으면 돛대가 완성된다. 모닥불 가에 그 돛대를 세워두면 열과 연기에 서서히 익으며 연기냄새가 배어드는 토속 조리법. 과메기 비슷하다.
테이불에 차린 뷔페식 음식들은 훈제 연어, 구운 연어포, 연어알 하는 식으로 연어가 중심
야채와 섞어 먹는다.
원주민 들은 연어 살에 아무런 소스도 얹지 않고 먹는다.
그게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고 했지만 동수는 별로였다.
모닥불을 여러 곳에 피웠는데도 모기들이 성가시게 달려든다.
얼른 취해 무감각해지는 방법 외에는 달리 대책이 없다.
이윽고 통나무와 북으로 연주하는 원주민 전통음악이 시작되자
커다란 물고기 모양의 탈을 쓰고 나와 춤을 추는데
애조를 띄면 서도 활기가 넘쳐 자못 이국적인 정취가 있다.
흥이 난 베링 소년 단원들도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배웠다는
러시아의 민속 무용으로 답례를 했다.
주로 동양계로 구성되었지만 백인, 흑인, 동양계가 뒤섞여 추는 소년단의 군무는
힘차고 발랄해서 원주민들과 현장팀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터널팀 수석 연구원 황 남수는 헬멧을 벗고 땀을 닦았다.
먼지범벅이 된 땀이 시커멓게 수건에 묻는다.
땅 속이 시원하다는 것은 강원도 종유석 동굴에서나 맞는 말이고
터널 굴착기가 작동 중인 지하 현장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시험적으로 파는 선도 갱 작업에 동원된 쉴드 굴진기는 직경 5m의 소형
좁아터진 제어실은 열기와 기름 냄새로 가득하다.
1996년, 프랑스의 카레에서 영국 도버까지 55km를 뚫을 계획으로 진행한 해저터널 TBM
유럽인들의 꿈이 담긴 대 역사였기 때문에 본격적인 착공도 하지 않은 시점이지만
이미 ‘채널 터널’이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머리 위 60m는 바다 밑이고 또 그 수십m미터 위에
수십만 톤급 탱커들이 떠 있습니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닐걸요.
프랑스 쪽에서 일하는 일본 기술자 한 명이 굴진기의 제어실에서 해준 말이었다.
굉음이 울리는 지하현장에서는 소리를 질러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말하는 습관이 생겨 누가 보면 싸우는 줄 안다.
영국과 프랑스,
양 쪽 현장을 모두 견학하고 있는 황 남수에게는 대조적인 국민성에서 비릇된
양국 기술진들의 스타일 차이가 뚜렷이 보였다.
잘 재단된 프랑스 팀 유니폼은 회색 잠바소매에 같은 색의 바지
청색과 적색의 옆줄이 들어간 멋들어진 디자인이다.
영국 유니폼은 그저 활동하기에만 편한 자루처럼 헐렁한 모양새의 오렌지색.
양 팀이 사용하는 쉴드 머신에는 이름이 있다.
프랑스 쪽은 ‘캐더린’ 이라는 여자 이름을 붙였는데
영국은 그냥 ‘TBM No.6'라는 무뚝뚝한 모델명으로 부른다.
영국 측은 굴착용 쉴드 머신을 자국 제품만으로 통일했지만
프랑스는 일제를 섞어 썼다.
영국이 거북한 프랑스 인의 심리를 드러낸 시사만화가 인기를 끌었다.
‘깜짝 리셉션’ 이라는 제목
영국에서 오는 열차가 터널에서 나오면 일도양단 할 기세로
프랑스 쪽 터널 입구 에서 기다리는 살기등등한 길로틴.
빠리 일간지에는 영국 부동산을 소개하는 광고가 연일 게재되고
영국 언론들은 대륙의 졸부에게 영국 땅을 넘긴다는 것은 수치라며 여론을 부추긴다.
분방한 아가씨, 프랑스와 콧대 높은 영국 양반들의 적나라한 자존심 경쟁은
공사에 동원되는 첨단기술 경쟁 못지않은 구경꺼리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굴착기의 텅스텐 칼날은
해저의 바위 층을 꾸준히 영.불 양쪽에서 깎아 들어갔고
황 남수는 매일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이 모든 작업을 카메라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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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부터 베링 자치주에는 X자 형 철도 받침대들이
지상 3m 의 높이로 솟아 끝없이 뻗어가기 시작했다.
20m 간격으로 늘어선 이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는 모노레일 모양의
자기부상 궤도가 부설되고 있었다.
궤도는 바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앙 궤도보다 30cm정도 솟은 좌우의 벽이
모두 강력한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추진 궤도였다.
자기부상열차는 개개의 객차나 화물차 모두가 선로와의 자기반발력에 의한
추진력을 가졌기 때문에 사실상 적재 능력에 한계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자기부상열차는 승객과 화물량에 상관없이
항상 최적 규모인 플랫 홈 길이에 맞춘 차량편성으로 운행될 예정이었다.
여유차량의 운임은 정상요금의 1/3에 불과하다
연료를 싣고 다닐 필요가 없을뿐 아니라 공중에 떠서 달리는 특성상
노후화가 적은 자기부상 열차는 운행되기도 전에 이미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기부상 열차의 시험운행은 캄챠카 반도로 가는 지선과 시베리아로 가는 본선이
갈라지는 반도 북부의 현장에서 2006년에 실시되었다.
10km의 궤도가 부설되고 라인더스 철도 기술팀과 도호꾸 대학 공학부 팀,
그리고 극동 연구소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실시된 첫 시험은 성공작이었다.
소리도 없이 부 드럽게 출발한 육중한 열차는 삽시간에 시속 200km까지
속도를 올려 매스콤들은 ‘세계 최초의 자기부상 열차 개발 성공!’ 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이미 여러 차례 시험해온 사업단 관계자들에게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실험은 은행을 포함한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홍보용 행사였다.
진짜 문제점은 정상적 가속도가 붙을 만큼 긴 100km이상의 궤도가 확보되는
4년 후에나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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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작가님,
천하를 경륜하는 썰을 만들고 푸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어제가 중복이지만 이번 일요일 산행 때 배다리 병 속에 인삼 하나 넣겠습니다. ㅎㅎ
Infra, Industry, Man-power, Amenity 챙기시랴,
사소한 엔지니어링까지 챙기시랴...
그런데 제가 한 말씀 보충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실드(Shield) 터널 장비는 보통 TBM과 구분합니다. 도버해협 유로터널에 쓴 것은 일본 카와사키 중공업의 TBM인데,
실드터널기계가 아닙니다. "실드"라는 말은 막장 지층이 암반이 아니고 연약하거나 여러가지 토사가 섞인 혼합지반이어서
막장이 붕괴하지 않도록 실드를 굴착기 정면 상부에 쒸우거나 굴착 때 무너지지 않도록 막장
에 토압을 가하는 방법을 쓰면서 동시에 굴착이 끝난, 즉 굴착기가 통과한 공간은 세그멘트(Segment)라는 콘크리트 모듈을 레고블럭처럼 조립해서 원통을 만들어 공간을 보호하지요. 복합지층이나 간척지가 많은 동경만에 많이 이용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부산에서 많이 활용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정작가님이 묘사한 암반층이라면 쉴드 또는 실드라는 말을 빼고 그냥 TBM(전단면굴착기)라는 말이 더 정확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