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8 가해 연중2주일
이사 49:1-7 / 1고린 1:1-9 / 요한 1:29-42
메시아를 찾는 사람들
서양 고전음악 장르 중 오라토리오(oratorio)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오페라와 유사하지만, 둘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페라는 일종의 음악극으로서 노래뿐 아니라 무대장치, 소품, 의상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연기 등도 중요시하는 반면에,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무대연출을 최소화하면서 음악 본연의 모습에 집중합니다. 또한 그 소재도 오페라는 역사, 신화, 성경 등 다양하게 다루는데 비해서 오라토리오는 대본이 주로 종교적 텍스트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 이유는 오라토리오라는 말 자체가 기도 혹은 말(言)이라는 라틴어 ‘oratio’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예배 때 성가대가 힘차고 장엄하게 부르는 <할렐루야>노래는 1741년 헨델(Handel)이 작곡한 <메시아>의 일부로서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오라토리오입니다. 헨델은 성공회 기도서와 영어성경의 고전인 킹 제임스 성경을 바탕으로 <메시아>를 작곡했습니다. 특히 <할렐루야>에서 다음과 같이 부활하신 메시아를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다스리시니, 이 세상 왕국은 우리 주이신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며, 그가 왕 중의 왕, 주 중의 주님으로 영원토록 통치하신다. 할렐루야! (Hallelujah! For the Lord God omnipotent reigneth, the kingdom of this world has become of our Lord, and of His Lord; and He shall reign for ever and ever,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Hallelujah!)
그러면 메시아(Messiah)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의 어원이 되는 히브리어는 ‘마쉬하(מָשִׁיחַ)’입니다. 그 뜻은 ‘기름을 바른 자’입니다. 이 단어는 지위가 높은 자, 지도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데 향료를 몸에 바르는 예식에 따라 대사제, 왕, 예언자 등이 해당됩니다. ‘마쉬하’는 후에 기름부음 받는 자를 뜻하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 그 말 속에는 ‘예수는 기름 부은 받으신 분’, ‘예수는 구세주’라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그리고 유대인들로부터 모든 민족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찾고 기다라는 메시아라는 존재는 어떤 분인가요?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느님의 인도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지만, 끊임없이 주변민족들의 위협 속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길 희망했습니다. 일종의 정치적 성격을 지닌 메시아 상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고, 마침내 남과 북 모든 왕국이 이민족에게 멸망당해 유배를 당하는 민족의 고난을 겪으면서 정치적인 메시아에 대한 기대에서 보다 깊은 차원의 메시아 이해로 심화되었습니다. 지난 주일과 오늘 우리가 들은 이사야서는 메시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묘사하는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아 라기보다는 괴로움과 상처를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심지어 죄인으로 묻히는 ‘고난의 종’입니다. 그럼으로써 메시아는 신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벽을 허물고, 이 세상을 죄로부터 구속(救贖)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는 단지 이스라엘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민족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의 종으로서 할 일은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살아남은 이스라엘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 (이사 49:6)
이런 맥락에서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예언자들이 기다리고 찾았던 그 메시아 모습을 예수님께서 구현했고, 부활을 통해 죽음의 장벽마저 허물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하나로 연결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로고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으로 되신 메시아 예수를 사람들은 어떻게 알아봤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을 때 보았던 장면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아라.’ 하고 말씀해 주셨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요한 1:33-34) 그런데 여기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어린 양과 결부시킵니다.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29) 일반적으로 ‘어린 양’이라 함은 단순히 제사 때 바치는 희생제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고통받는 주님의 종에서도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 “(이사 53:7)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민족의 고난에 대한 깊은 성찰 속에 이사야 예언자와 같은 분들이 메시아에 대한 보다 깊은 영적인 차원이 있다는 것을 깨달었다고 하더라도, 대다수 유대인들은 이민족의 압제에서 당장 자신들을 해방시킬 영웅을 원하는 그런 정치적 메시아를 더 강하게 찾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단지 정치적 메시아를 뛰어넘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어린양과 메시아를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린양은 그저 제사의 희생제물로서의 어린양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중개자로서의 어린양이자, 하느님과 인간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게 하시려고 자신을 바친 어린양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어린양이자,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사람들이란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라 목적의식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 목적이란 바로 메시아를 찾고, 그 메시아를 따라 가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복음 저자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을 언급합니다. 한 사람은 안드레아였고, 다른 한 사람은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맥을 놓고 볼 때, 그는 요한복음 저자이자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 사도 요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예수께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요한 1:38)라고 말합니다. 아직 그들은 예수님을 그저 선생님 정도로만 인식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문하생들이 선생님 집에 가서 경전과 율법을 배웠던 대로 예수님의 거처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집주소를 가르쳐 주시는 대신에 그저 당신한테 와서 보라고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당신을 알고 신뢰를 쌓으십니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은 변합니다. 예수가 평범한 선생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토록 찾고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안드레아는 이 발견을 형인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메시아를 찾고 있던 베드로는 동생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베드로를 눈 여겨 보시며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과거의 이름인 요한의 아들, 현재 이름인 시몬, 그리고 미래의 이름 반석이란 뜻인 게파, 즉 베드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시적으로 꿰뚫어 보시는 구세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그리고 예배 때 ‘예수 그리스도’를 부를 때마다 우리는 “예수는 구세주이십니다”라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구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가 구세주라는 그 고백 안에는 여러가지 것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왕과 같은 정치적 영웅인 구세주를 원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현재 겪고 있는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서 빼내 줄 구세주를 갈망할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도 힘든 이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영원한 나라로 하루속히 데려가실 구세주를 염원할지도 모릅니다. 비록 서로 다른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우리 모두는 궁극적 행복을 꿈꿉니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고백하는 구세주는 궁극적 목표를 이루기까지 고난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를 거쳐 부활에 이른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세주를 찾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우리 역시 그 목표를 위해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감내하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이 결단은 우리 자신이 바위처럼 단단해서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시몬을 보시고 베드로라고 부르신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고난을 외면하고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예수와 화해한 삶에서 보여주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만이 우리는 굳건해질 수 있고, 마침내 구원의 목표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은 시몬처럼 연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로 끝까지 머문다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단단한 게파가 됩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찾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 주시고 굳건하게 해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