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3일 부활 5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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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3.mp3
중차대한 문제 앞에서 나는? 우리는?
지금 초대교회 앞에 놓인 문제는 실로 중차대합니다.
중차대하다는 말은 무겁고 또 크다는 뜻인데 여기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교회가 도로 유대교로 돌아가거나
우리 교회가 둘로 쪼개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여전히 박해하는 유대인들이 있는 중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유대인들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만,
유대전통을 고집하며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하니 이들로 인해
초대교회는 지금 크나큰 위기에 처해있고 그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초대교회는 아주 훌륭하고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지금 우리보다도 훨씬 훌륭합니다.
그것은 왕이 없고 그래서 왕에게 주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개개인에게 주권이 있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개개인이 똑같이 존중이 된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사실 민주주의 시대라는 지금 왕만 없을 뿐 아직도 힘 있는 사람에 의해
결정이 이루어지는 비민주적인 행태가 참으로 많고,
당연히 갑질도 많고 힘없는 사람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당시로는 아웃사이더/비주류인 이방인들과
이방인을 대변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정말로 존중하잖습니까?
오늘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서 드러나듯 차별하지 않습니다.
다름 또는 차이가 있고 그것을 인정하지만 차별은 없는 거지요.
제가 생각할 때 그것은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름을 존중하기에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차별이 많은 우리 세상에서 차별하지 않으려는 것만도 훌륭하지만
차별하지 않으려는 것은 차별이 있기에 차별하지 않으려는 것이고,
차별하지만 않을 뿐 존중하는 것이 아니니 아주 훌륭하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니 초대교회가 다름을 존중하고 약자를 똑같이 존중하는 것은 대단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신앙인인 우리에게 더더욱 훌륭한 이유는
이 존중이 바로 신앙에서 나왔고 신적인 차원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박해시대 우리나라는 여전히 양반과 상민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백정은
천민중의 천민이었지만 백정인 황일광을 똑같은 형제라고 존중했기에
그는 늘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곤 했는데 천민과는 상종도 않는 그때 정말 지체 높은 양반인 이존창,
정약종 같은 분들이 가장 귀한 신앙을 나눠주고 교류한 것은 참 대단하지요.
이는 초대교회나 우리교회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는 주님 말씀대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주님의 계명인 사랑을 나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또한 성령 안에서의 사랑이고 일치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교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는 많은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자신을 뽑으신
하느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똑같은 성령을 주셨고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고 얘기합니다.
이런 성령의 사랑과 신앙에 밑바탕을 뒀기에
초대교회는 중차대한 문제를 인간끼리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해결할 수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입만 열면
그렇게 떠드는 를
그때 이미 이룰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며 아직도 하느님 없이 인본주의적으로 평등을 이루려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배제하고 민주주의적으로 결정을 하려는
우리의 실천적 무신론을 또 다시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 출처: 원글보기; ▶ 작은형제회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