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다 림 / 어느 여인의 순애보
어느 해 봄, 히말라야 산 밑 작은 마을에 젊은 서양 여인 한 사람이 찾아 들었습니다.
마을의 한 여관에 숙소를 정한 여인은 곧장 마을 앞의 계곡으로 내려가 큰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는
말없이 산 위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녹은 눈과 흙이 섞여 탁하게 흐린 물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며 어둠이 내릴 때까지 석고상처럼 앉아 있던
여인은, 사물의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질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한 곳에서 계곡물을 바라보며 그해 봄과 여름을 보내고는
눈이 내리고 다시 물이 얼어붙기 시작할 때쯤 그녀는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산 위의 얼음이 녹기 시작할 무렵 마을을 다시 찾은 그녀는 같은 계곡의 바위 위에 앉아
물끄러미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여름까지 지내다가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쯤 마을을
떠났습니다.
여인의 이러한 행동은 해를 반복해 백발이 되고 허리가 굽어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어느 날,
이젠 흐려진 눈으로 계곡 아래를 바라보던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내려가
물줄기 사이 바위 틈에 걸린 새파랗게 젊은 청년의 시신을 품에 안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히말라야로 등반을 떠났다가 조난으로 얼음 속에 오랫동안 파묻혀 있다가 얼음이 녹으면서
떠 내려온 그녀의 옛 약혼자였던 것입니다.
우화인지 실화인지,
히말라야 산 밑 어느 마을에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는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 <샘터>라는 잡지의 뒤 표지에 올라있던 내용입니다.
현실적으로 쉽게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기다림'이라는 추상어(追想語)가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로 그려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조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젊은 시절의 약혼자를 그리며 평생을 기다린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끔 이 이야기가 떠오를 때면 '기다림'이라는 명제(命題)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대한 기다림은 그 자체가 지닌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의미 때문에
오늘날처럼 적극적인 생활 자세가 요구되는 세태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삶의 태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오직 적극적인 생활 자세로서 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때때로 한 발 물러서서 지나온 과정 속에 쏟아 부었던 노력의 결실을 기다리며
삶을 관조하는 여유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에는 '피정(避靜)'이라는 신심 과정이 있습니다.
이는 '피세 정념(避世靜念)'의 줄임 말로 '세상을 피해 마음을 고요히 가짐'을 의미하지요.
이 피정의 영어 'retreat'는 '한발 뒤로 물러섬'의 원의(原意)를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의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의 사무실에는 갯벌에 걸린 한 척의 배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지금은 썰물이어서 배가 뜰 수 없지만, 언젠가 바닷물이 가득 밀려오면 배가 그 위에 떠서 드넓은
대양으로 항해해 나갈 수 있을 것이고, 그때를 기다리며 자금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낸다는 의미가
그 그림 속에 담겨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적극적인 삶으로 한 분야에서 제 일인 자가 되고자 했던 카네기에게
이러한 기다림의 철학이 있었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크다 하겠습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에 얽힌 고사는 너무 유명하여 새삼스럽게 그 뜻을 부연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려운 일이나 기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새롭게 전개될 일들을 조용히 기다리는
변방 노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생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새옹(塞翁)'이 가르쳐 준 '기다림의 지혜'를 인용하여
'희회기(熙晦機)'라는 중국 원나라 승려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지요.
"인간사 길흉 화복은 새옹지마 같으니
(人間萬事塞翁馬),
퇴침 헌에서 빗소리 들으며 잠이나 자려네.
(退枕軒中聽雨眠)."
그것이 젊었을 때 조난 당한 약혼자이든, 사업의 번창이나 세속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든,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가끔 한발 뒤로 물러서서 바라는 것들을 조용히 기다려보는 자세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쉼 없는 노력과 쟁취를 향한 투쟁만이 우리의 삶을 성공과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받은 메일 옮김>
첫댓글 항상 좋은 글을 주심에 감사드리며,
항상 영육간에 건강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시화 님! 찾아주시고 좋은 말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한가위 행복 가득한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