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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희 지]
중국의 서예가 왕희지(321-379)는 동진인 이다
자는 逸少(일소)이고, 원적은 낭야 임기(산동성)로
회계산음(會稽山陰, 지금의 절강성 소흥)에서 살았다.
벼슬은 우군장군, 회계내사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를
사람들은 우군장군이라고 불렀다.
그는 어려서 위부인에게 글씨를 배웠고, 뒤에 여러
명가들의 장점을 취하여 깊이 연구하였다.
초서는 장지(張芝)를 법으로 삼았고, 해서는
종요(種繇)에게서 득력하여 고법을 가감하였다.
한(漢), 위(魏) 이래로 내려온 질박한 서풍을 바꾸어
곱고 부드러운 서풍을 만들었다.
후세의 비평가들은 그의 글씨에 대해
“천변만화하니 자연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서예에 있어서 탁월한 그의 서예적 성취 때문에
그의 글씨자료는 역대 여러 서예가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다. 그래서 세상에서 ‘서성’(書聖)이라고 불렸다.
그의 법서각본은 <낙의론(樂義論)>, <난정서(蘭亭序)>,
<십칠첩(十七帖)>, 등이 있고, 세상에 전하는
모본묵적곽전본(摹本墨迹廓塡本)은 <쾌설시청(快雪時晴)>,
<봉귤(奉橘)>, <상란(喪亂)>, <공시중(孔侍中)>, 및
당나라 스님 회인이 집자한 <성교서(聖敎序)> 등이 있다.
왕희지의 서론(書論)은 『제위부인「필진도」후(題衛夫人「
筆陣圖」後』가 송나라 진사(陳思)의 『서원청화(書苑菁華)』
제 일권에 수록되어 있고, 『서론(書論)』은 일단이
주장문(朱長文)의 『묵지편(墨池編)』등에 실려 있고,
『필세론십이장병서(筆勢論十二章並序』일권은 『묵지편』과 『
서원청화』 등에 실려 있으며, 『용필부(用筆賦』는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제 오권에 수록되어 있다.
書 論
무릇 글씨라고 하는 것은 심오하고 미묘한 기예라서 만약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거나 뜻있는 선비가 아니라면 배움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대저 글씨는 모름지기 배우겠다는 절실한 생각이 있어야 하니 내가 이사
등이 필세를 논한 것과 종요의 글씨를 보고서 골력이 심히 가볍지 아니함을 느꼈다.
자손들이 기억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서술하여 이를 논한다.
대저 글자는 평정하고 안은함을 귀히 여긴다. 먼저 모름지기 용필에는
누운 것, 쳐다보는 것, 기울어진 것, 쓰러진 것, 비껴진 것 등이 있으며
혹은 작고 큰 것, 길고 짧은 것 등이 있다. 무릇 한 글자를 쓸 때에도
전서나 주문과 유사하기도 하고 학두서 같기도 하며, 또한 산예(예서)
같기도 하고 팔분에 가깝기도 하다. 또한 벌레가 나뭇잎을 갉아 먹은 듯
하거나 물 속에 있는 올챙이 모습 같기도 하며, 장사가 칼을 차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부녀자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 같기도 하다.
글씨를 쓰고자 할 때 먼저 근력을 이룬 다음 장속(꾸밈을 차림)을
하는데 반드시 유념할 점은 찬찬하면서 우아하게 붓을 일으켜 펴면서
면밀하고 소활한 것이 서로 적당하도록 해야 한다.
매번 한 점을 찍을 때 반드시 손을 들고서 하여야 하며 하나의 파책을
할 때는 큰 붓을 누른 다음에 끌어내야 한다. 매양 한 글자를 쓸 때에도
모름지기 여러 종류의 필의를 사용하야 하니 가령 횡획을 팔분처럼 해서
나타나는 것은 전서나 주문처럼 한다.
혹 세로로 당기는 획은 깊은 숲 속의 교목과 같이 해서 전절하는 부분이
마치 강철 갈고리 같이 하여야 한다. 또한 위가 뾰족한 것은 마른 줄기
같이 하거나 아래가 가는 것은 바늘이나 까끄라기 같이 하여야 한다.
둥글게 기운 형세는 마치 나는 새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하며
모서리가 기운 형태는 마치 물이 굽이쳐 흐르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
한 글자를 쓰면 횡획과 수획이 서로 향하게 하고 한 행을 쓰면 아름답고
고움이 서로 호응을 이루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름지기 근력을
갖춘 장봉을 운용하되 그 자취를 없애고 붓끝을 갈무리해야 한다.
첨필(뽀족한 붓)을 사용할 때 낙봉이 뒤섞여 이루어져야 하며
호가 드러나서 들떠 있거나 속됨이 없게 하여야 한다.
새 붓을 들 때는 상쾌한 정신이 있은 즉 점획의 결점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한 글자를 쓸 때 여러 체가 모두 들어 있어야 한다.
만약 한 장의 종이에 글씨를 쓸 때 모름지기 글자마다 필의가 달라야 하며 서로
같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글씨 쓰는 종이가 부드럽다면 강한 붓을 사용하고,
종이가 강하다면 부드러운 붓을 사용해야 한다. 강약이 고르지 못한다면 차질이
생겨 먹물이 제대로 스며들지 않는다.
무릇 글씨는 침착하고 조용한 것을 귀하게 여기니 뜻이 붓 앞에 있어야 하고
글자는 마음 뒤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글씨를 쓰기 전에 마음으로 생각한
바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이에 하필(붓을 대어)은 급하게 해서는 안되며
따라서 반드시 더디게 해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붓은 장군과 같기 때문에
반드시 더디면서 신중하여야 한다. 마음이 조급하면 의당 더딜 수 없다.
왜 그런가? 마음은 화살촉과 같다.
화살은 더딜 수가 없다. 만약 더디면 사물을 맞추어 뚫을 수 없다. 대저 글자는
느리고 급한 것이 있다. 한 글자 가운데 어떤 것이 느리고 급한 것이 있는가?
예컨데 ‘鳥’자에서 아래 한 점을 찍을 때 점은 모름지기 빨라야 하며 횡획은
곧으니 모름지기 더디게 한다.
‘鳥’의 다리는 빨라야 하니 이것은 바로 그 형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매양 글씨를 쓸 때 열이 더디면 다섯은 빠르게 하고, 열이 굽으면 다섯은 곧게 하고,
열을 감추면 다섯은 나오게 하고, 열을 일으키면 다섯은 엎드리게 하여야만 비로소
글씨라 할 수 있다. 만약 붓을 곧게 해서 급하게 안으로 끌어당기면 이것은 얼핏보면
글씨 같지만 오래 음미하면 무력함을 느낀다.
이에 모름지기 붓으로 먹을 드러내되 아래로 붓의 3분 정도 묻혀야 하며,
먹물이 너무 깊이 침투하면 힘을 얻지 못하니 붓털이 약해져서 무력해진다.
먹은 송절(소나무 마디)을 사용하여 함께 갈면 오래오래 변하지 않고 더욱 아름다워 질 것이다.
집자성교서 전문
集字聖敎序全文<집자성교서> 해석
大唐三藏聖敎序, 太宗文皇帝製 弘福寺沙門懷仁 集晉右將軍王羲之書
(대당삼장성교서, 태종문황제제 홍복사사문회인 집진우장군왕희지서)
太宗文皇帝가 序文을 짓고. 弘福寺의 중 懷仁은 晉나라 右將軍 王羲之의
글씨를 集字하다,
盖聞二儀有像 顯覆載以含生 四時無形 潛寒暑以化物 是以窺天鑑地
(개문이의유상 현복재이함생 사시무형 잠한서이화물 시이규천감지)
듣건데 天地에 모양이 있어 天은 덮고 地는 실어서 만물을 생성시키고,
춘하추동의 四時는 모양은 볼 수 없으나, 춥고 더운 無形의 힘으로써 만물을 생육시킨다 하였다.
이런 까닭에 우러러 하늘을 보고 엎드려 땅을 살펴보면,
庸愚皆識其端 明陰洞陽 賢哲罕窮其數 然而天地苞乎陰陽 而易識者以其有像也
(용우개식기단 명음동양 현철한궁기수 연이천지포호음양 이이식자이기유상야)
아무리 凡庸(범용)한 사람일지라도 그 一端을 알 수 있지만, 음양의 이치를 밝게 깨우침은 賢人이나 哲人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천지에 대하여는 그 일단을 알 수가 있으나 음양의 변화를 연구하여 심원한 도리를 안다는 것은 현인이나 철인도 이에 통달하기란 매우 쉽지 않는 것이다. 천지가 음양을 그 속에 포용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분별 할 수 있는 것은 천지에는 형이 있기 때문이고 음양은 천지간에 충만하면서도
而難窮者 以其無形也 故和像顯可徵 雖愚不惑 形潛莫覩 在智猶迷 陰陽處乎天地
(이난궁자 이기무형야 고화상현가징 수우불혹 형잠막도 재지유미 음양처호천지)
이를 알기가 어려운 것은 음양에는 형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형이 있는 것은 비록 愚者(우자)라도 이를 볼 수가 있어서 미혹하는 일이 없으나 형이 없는 것은 智者(지자)에 있어서도 오히려 미혹하다는 것이다.
況乎佛道崇虛 乘幽拱寂 弘濟万品 典御十方 擧威靈而無上 抑神力而無下
(황호불도숭허승유공적 홍제만품 전어십방 거위령이무상 억신력이무하)
하물며 불교는 허무를 숭상하고 幽寂(유적)을 취지로 하여 진여의 이치를 窮究(궁구) 하고 만류를 제도하여 유위의 제상으로부터 수탈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그 교의가 廣大無邊(광대무변)함은 그 높이에 있어서나 그 깊이에 있어서나 上도 없고 下도 없으리만큼 실로 심원하고 미묘한 것이니,
大之則彌於宇宙 細之則攝於豪釐 無滅無生 歷千劫而不古 若隱若顯 運百福而長今
(대지칙미어우 주세지칙섭어호리 무멸무생 력천겁이불고 약은약현 운백복이장금)
이를 크게 하면 우주에 가득 차고, 이를 작게 하면 아주 작은 것 속에서도 섭취되어서 숨어버리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또 생멸이 거래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망견으로 본래는 생도 없고 멸도 없어 천만년을 지나도 옛 것이 되지 않으며 숨은 것 같고 나타난 것 같아 만류에게 백복을 얻게 하면서도 영원토록 그 생명은 새로운 것이다.
妙道凝玄 遵之莫和其際 法流湛寂 挹之莫測其源 故和蠢蠢凡愚 區區庸鄙 投其旨趣 能無疑或者哉
(묘도응현 준지막화기제 법유담적 읍지막측기원 고화준준범우 구구용비 투기지취 능무의혹자재)
그 묘도인 심원한 도리는 실로 유현하여 불가사의한 지경이며 불법이 광대함은 이를 손으로 잡아당겨도 그 근원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이 심오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불교임으로 무지한 세속이 무리나 구구한 소지의 범용한 자들이 이를 듣고 疑惑(의혹)하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然則大敎之興 基乎西土 騰漢庭而晈夢 照東域而流慈
(연칙대교지흥 기호서토 등한정이교몽 조동역이류자)
불교는 서쪽 인도에서 발상 하였으나 그것이 중국에 미쳐서 漢(한)의 明帝(명제)의 꿈에 현몽하여 東士를 비쳐 恩澤(은택)을 베풀게 되었다.
昔者分形分跡之時 言未馳而成化 當常現常之世 民仰德而知遵
(석자분형분적지시 언미치이성화 당상현상지세 민앙덕이지준)
釋迦(석가)가 출생하기 이전에는 方便力(방편력)으로서 十方(십방)에 분신하여 成佛(성불)의 相(상)을 냄으로서 곳곳에서 有緣(유연)의 중생을 교화하였고, 석가가 在世한 시대에는 인민은 그의 덕을 우러러 그의 敎(교)를 遵守(준수)하였다.
及乎晦影歸眞 遷儀越世 金容掩色 不鏡三千之光
(급호회영귀진 천의월세 금용엄색 불경삼천지광)
그런데 釋迦如來(석가여래)가 모습을 감추고서 眞如(진여)에 돌아가 모습을 바꾸어 入滅(입멸)한 후에는 세대를 멀리 멀리함에 이르러서는 그 모습은 空虛(공허)하게 되었고, 三千의 威儀(위의)는 이미 우러러 볼 길이 없고,
麗象開圖 空端四八之相 於是微言廣被 拯含類於三途 遺訓遐宣 導群生於十地
(려상개도 공단사팔지상 어시미언광피 증함류어삼도 유훈하선 도군생어십지)
아름다운 모습은 그림이 되어 헛되게 三十二相을 나타내고 있음에 불과하나 그 대신 또한 부처의 深遠(심원)한 말씀이 널리 대중에게 선포되고, 그것이 퍼져서 인민이 또 그의 敎化(교화)에 의하여 三惡道(삼악도)의 苦惱(고뇌)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 부처의 遺訓(유훈)이 한층 더 멀리까지 전하게 되어 모든 중생을 그 氣根(기근)에 應(응)하여 敎導(교도)하게 된 것이다.
然而眞敎難仰 莫能一其旨歸 曲學易遵 邪正於焉紛糺
(연이진교난앙 막능일기지귀 곡학이준 사정어언분규)
불교는 이와 같이 盛(성)하기는 하나 진실한 교리는 이를 전하여 듣기가 어려워서 불교의 窮極(궁극)의 旨歸(지귀)를 명확히 알기는 因難(인난)하다. 또 曲學(곡학)에는 사람들이 이에 따르기 쉬움으로 世俗(세속)에 迎合(영합)하는 자가 생겨서 正邪(정사)의 論(논)이 서로 어지럽게 紛糾(분규)하여
所以空有之論 或習俗而是非 大小之乘 乍沿時而隆替
(소이공유지론혹 습속이시비 대소지승 사연시이륭체)
불교의 교리를 논함에 있어서 俗論(속론)으로서 시비를 가리는 따위의 불미한 일도 많고, 이로 말미암아 大乘(대승)과 小乘(소승)의 敎(교)도 또한 시대에 따라서 盛衰(성쇠)하기에 이르렀다.
有玄奘法師者 法門之領袖也 幼懷貞敏 早悟三空之心 長契神情 先苞四忍之行
(유현장법사자 법문지령수야 유회정민 조오삼공지심 장계신정 선포사인지행)
여기서 玄奘法師(현장법사)라는 자가 있으니 이는 當今(당금)의 불교계의 領袖(령수)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바르고 지혜가 뛰어나서 일찍이 三空의 도리를 깨닫고 장성하여서는 盟哲(맹철)하여 四忍(사인)의 菩薩(보살) 行(행)을 勉勵(면려)하였으니,
松風水月 未足比其淸華 仙露明珠
(송풍수월 미족비기청화 선로명주)
그 맑고 아름다움을 松風(송풍)과 水月도비교할 수가 없고, 그 明朗(명랑)하고 潤澤(윤택)한 모습은 仙露盤(선로반)위의 이슬이나 光輝(광휘)있는 주옥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詎能方其朗潤 故以智通無累 神測未形 超六塵而逈出 雙千古而無對
거능방기랑윤 고이지통무루 신측미형초육진이형출 쌍천고이무대)
(그의 지혜는 無累(무루)에 통하여 自在하였고 그의 정신은 아직 형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까지도 헤아려 알 수가 있어서, 六塵(육진)의 境界(경계)를 초월하여 분명히 그 위에 나타나 있었다. 실로 그야말로 千古에 걸쳐서 다시비할 자가 없는,
凝心內境 悲正法之陵遲 栖慮玄門 慨深文之訛謬 思欲分條柝理
(응심내경 비정법지릉지 서려현문 개심문지와류 사욕분조탁리)
불교계의 高德(고덕)으로서 마음을 불교에 專注(전주)하고서는 정법의 衰頹(쇠퇴)함을 슬프게 생각하고, 마음을 불문에 머물게 하면서도 경전의 訛謬(와류: 잘못됨)가 많음을 개탄하여 다시 그 교리를 깊이 探求(탐구)하여 오류를 바로 잡고 허위를 끊고 진리를 繼承(계승)하여
廣彼前聞 截僞續眞 開玆後學
(광피전문절위속진 개자후학)
前(전)에 見聞(견문)한 바를 다시 넓히고 아울러 후학을 위하여 길을 열 것을 祈願(기원)하였다.
是以翹心淨土 往遊西域 乘危遠邁 杖策孤征 積雪晨飛 途間失地
(시이교심정토 왕유서역 승위원매 장책고정 적설신비 도간실지)
이에 현장삼장은 마음을 淨土(정토)로 생각하고 西域(서역)을 거쳐 印度(인도)로 불교의 진리탐구를 위한여행에 나섰다. 기나긴 遊行(유행)임으로 위험이나 因難(인난)도 적지 않았으나 홀로 지팡이를 짚고 혼자 가는 유행을 계속하였다. 積雪(적설)이 아침에 날라서 때로는 길을 잃고
驚砂夕起 空外迷天 萬里山川 撥煙霞而進影
(경사석기 공외미천 만리산천 발연하이진영)
砂塵(사진)이 저녁때에 일어나는 일이 있으면 동서의 방향도 모르게 되었으나, 萬里(만리)의 산천을 걸어서 煙霞(연하)를 뚫고 나아가니,
百重寒暑 躡霜雨而前蹤 誠重勞輕 求深願達
(백중한서 섭상우이전종 성중로경 구심원달)
많은 寒暑(한서)를 거듭하고 서리와 비에 젖어 가면서도 전진을 계속하여 나아갔다. 이때의 현장삼장의 심정이란 오직 불교의 심원한 교리를 탐구하는 일에만 쏠렸고 途中(도중)의 艱難辛苦(간난신고)따위는 眼中(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周遊西宇十有七年 窮歷道邦 詢求正敎 雙林八水 味道飡風
(주유서우십유칠년 궁력도방 순구정교 쌍림팔수 미도손풍)
西域(서역)의 諸國(제국)으로부터 인도지방을 周遊(주유)하기를 十七年이었으니 이 사이에 불교가 성행하는 나라들을 빠짐없이 巡歷(순력)하여 불교의 正道(정도)를 찾아 구하였다.
鹿菀鷲峯 瞻寄仰異 承至言於先聖 受眞敎於上賢 探賾妙門 精窮奧業
(록원취봉 첨기앙이 승지언어선성 수진교어상현 탐색묘문 정궁오업)
釋尊(석존)이 入滅(입멸)한 娑羅雙樹(사라쌍수)의 숲에서부터 인도의 八大河인 恒河(항하), 등 여러 하천변에 이르기까지 그 땅의 교화의 形便(형변)을 吟味(음미)하고 또 그 풍속에 젖어서 鹿野苑(녹야원)이라든지 靈鷲山(령취산)의 奇勝(기승)과 異景(이경)을 우러러 보았으며先輩(선배)의 高德(고덕)으로부터 至極(지극)의 說(설)을 듣고 上賢(상현)으로부터는 眞實(진실)의 敎(교)를 받아 妙門(묘문)의 敎旨(교지)를 탐구하여 오의에 정통하였다.
一乘五律之道 馳驟於心田 八藏三篋之文 波濤於口海
(일승오률지도 치취어심전 팔장삼협지문 파도어구해)
이에 一乘五律(일승오률)의 道(도)는 삼장의 마음을 달리고 八藏三篋(팔장삼협)의 문은 입에서 물결치게 되었다.
爰自所歷之國 摠將三藏要文 凡六百五十七部
(원자소력지국 총장삼장요문 범육백오십칠부)
玄奘(현장)은 그가 遊歷(유력)한 나라로부터 經律論三藏(경률논삼장)의 주요한 經文(경문)을 무릇 六百五十七部(육백오십칠부)나 지고 돌아와서
譯布中夏 宣揚勝業 引慈雲於西極
(역포중하 선양승업 인자운어서극)
이것을 번역하여 중국에 널리 퍼지게 하여 佛陀(불타)의 뛰어난 교리를 高揚宣布(고양선포)하고 있다.
注法雨於東垂 聖敎缺而復全 蒼生罪而還福
(주법우어동수 성교결이부전 창생죄이환복)
이는 마치 가믐에 慈雨(자우)가 쏟아져서 이를 적시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한때 없었던 불교의 경전도 완비되어서 罪障(죄장)이 깊은 중생도 이에 의하여 구원을 받아 행복하게 되어
濕火宅之乾燄 共拔迷途 朗愛水之昏波 同臻彼岸
(습화댁지건염 공발미도 랑애수지혼파 동진피안)
火宅(화택)의 迷惑(미혹)에서 구출되고 또 愛欲(애욕)의 물결에 떠서 헤메고 있는 자들의 前途(전도)를 밝게 하였으며 만민으로 하여금 다 함께 깨달음의 境地(경지)에 도달케 하였다.
是知惡因業墜 善以緣昇 昇墜之端 惟人所託
(시지악인업추 선이연승 승추지단 유인소탁)
이에 알 수 있는 것은 因果(인과)의 理法(이법)이라는 것이다. 業報(업보)라고 하여 善惡(선악)의 원인이 있으면 이에 대하여 반드시, 또한 善惡(선악)의 應報(응보)가 있게 마련이다. 善業(선업)은 樂(락)의 果(과)를 가져오는 惡業(악업)은 苦(고)의 果(과)를 낳게 된다. 一切(일체)의 사물은 모두 因緣(인연)에 의하여 생기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람이 極樂(극락)에 가느냐 지옥에 떨어지냐도 전혀 이 인연에 의한 것으로 사람이 몸을 依託(의탁)하고 마음을 依寄(의기)하는 여하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譬夫桂生高嶺 雲路方得泫其花
(비부계생고령 운로방득현기화)
예컨대 저 桂樹(계수)나무가 높은 山嶺(산령)에 크면 구름이나 이슬이 그 꽃을 적시고,
蓮出淥波 飛塵不能汚其葉 非連性自潔
(련출록파 비진불능오기엽 비련성자결)
蓮(연)이 맑은 물속에서 자라면 塵埃(진애)도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는 蓮(연)의 本性(본성)이 淸潔(청결)하기 때문이 아니고,
而桂質本貞 良由所附者高 則微物不能累 所憑者淨 則濁類不能沾
(이계질본정 량유소부자고 칙미물불능루 소빙자정 칙탁류불능첨)
또 계수나무가 본래부터 貞良(정량)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가 자라는 곳이 높기 때문에
飛塵(비진)이 이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 그가 의지하는 곳이 淸淨(청정)하기 때문에
燭類(촉류)도 이를 더럽히지 못하는 것이다.
夫以卉木無知 猶資善而成善
(부이훼목무지 유자선이성선)
이와 같이 無智(무지)한 草木(초목)마저도 善地(선지)에 生(생)하면 善(선)하게 되는 것이
善根善緣(선근선연)에 의하여 妙果(묘과)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况乎人倫有識 不緣慶而求慶 方冀玆經流施 將日月而無窮 斯福遐敷 與乾坤而永大
(황호인륜유식 불연경이구경 방기자경류시 장일월이무궁 사복하부 여건곤이영대)
바라건데, 이 經文(경문)이 널리 世間(세간)에 유포되고 길이 후세에 전하여서 이 경문의
공덕이 日月(일월)이 무궁함과 같이 중생에게 善根(선근)과 妙果(묘과)를 가져오기를 바라며
天地(천지)와 더불어 限(한)이 없이 구원하며 또한 크기를 바라는 바이다.
朕才謝珪璋 言慙博達 至於內典 尤所未閑
(짐재사규장 언참박달 지어내전 우소미한)
朕(짐)은 才識(재식)이 모자라서 言辭(언사) 또한 전달치 못하고 더욱이
佛典(불전)에 대하여 가장 門外漢(문외한)이다.
昨製序文 深爲鄙拙 唯恐穢翰墨於金簡 標瓦礫於珠林
(작제서문 심위비졸 유공예한묵어금간 표와력어주림)
그런데 昨日(작일)에 序文(서문)을 씀으로써 아마도 金簡(금간)을 墨(묵)으로 더럽히고
瓦礫(와력)을 珠林(주림)속에 던진 것과 같은 것이라고 그것이 매우 鄙拙(비졸)한
序文(서문)이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忽得來書 謬承褒讚 循躬省慮彌益厚顔 善不足稱 空勞致謝
(홀득래서 류승포찬 순궁성려미익후안 선불족칭 공로치사)
도리어 來書(래서)를 받아보니 賞讚(상찬)의 말에 接(접)하게 된 것은 스스로 반성하여
더욱 부끄러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禮狀(례장)을 보내는 번거로움을 끼치게 된 것은 미안하다.
皇帝在春宮述三藏聖記
(황제재춘궁술삼장성기)
여기서 말하는 皇帝(황제)란 高宗(고종)이다. 太宗(태종)이 聖敎序(성교서)를
쓴 貞觀(정관)二十二年(이십이년)에 高宗은 皇太子(황태자)로서 春宮(춘궁)에 있었던바
太宗의 서를 보고 또 보고 현장의 청에 의하여 이 성교서기를 찬하였던 것이다.
夫顯揚正敎 非智無以廣其文 崇闡微言
(부현양정교 비지무이광기문 숭천미언)
불교의 正法(정법)을 顯揚(현양)하고 그 敎(교)를 넓히는 것은 智者(지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고 經文(경문)의 微言(미언)을 闡明(천명)하는 것은
賢者(현자)가 아니면 그 趣旨(취지)를 정할 수가 없다.
非賢莫能定其旨 蓋眞如聖敎者
(비현막능정기지 개진여성교자)
생각건대 眞如(진여)의 聖敎(성교)는 제법의 근원이오,
衆經(중경)의 根幹(근간)이 되는 것으로서
諸法之玄宗 衆經之軌躅也 綜括宏遠 奧旨遐深 極空有之精微
(제법지현종 중경지궤촉야 종괄굉원 오지하심 극공유지정미)
宏遠(굉원)한 도리를 총괄하고 또 그 奧義(오의)는 空宥(공유)와 生滅(생멸)의 이치를
설명하여 精微(정미)를 다한 것으로
體生滅之機要 詞茂道曠 尋之者不究其源 文顯義幽 履之者莫測其際
(체생멸지기요 사무도광 심지자불구기원 문현의유 리지자막측기제)
文詞(문사)는 繁瑣(번쇄)하고 설명하는 도리는 廣大(광대)하여 이를 탐구하는 자도
그 근원을 窮究(궁구)하기가 어려우니 문장으로는 알 수가 있으나 그 意義(의의)는
深奧(심오)하여 명확하게 할 수가 없으며 이를 이행하고자 하여도 그 際限(제한)을 헤아려 알 수가 없다.
故知聖慈所被 業無善而不臻 妙化所敷 緣無惡而不剪
(고지성자소피 업무선이불진 묘화소부 연무악이불전)
부처의 慈悲慈愛(자비자애)가 미치는 곳에서는 善業(선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고
敎化(교화)가 미치는 곳에는 惡緣(악연)을 끊지 않음이 없으니
開法網之綱紀 弘六度之正敎 拯群有之塗炭 啓三藏之秘扃
(개법망지강기 홍육도지정교 증군유지도탄 계삼장지비경)
불교의 法網(법망)은 여기서 열리고 六度(육도)의 正敎는 여기에서 넓혀져서 衆生(중생)을
塗炭(도탄)의 苦痛(고통)에서 구하고 三蔣(삼장)의 奧義(오의)가 이에 의하여 열리는 것이다.
是以名無翼而長飛 道無根而永固 (시이명무익이장비 도무근이영고)
여기에서 부처의 名聲(명성)은 날개가 없어도 먼 나라까지 메아리쳐 들리고 佛道(불도)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堅固(견고)하여
道名流慶歷遂古而鎭常 赴感應身 經塵劫而不朽
(도명류경력수고이진상 부감응신 경진겁이불후)
옛 부터 永劫(영겁)에 이르도록 영원히 변함이 없으며 천하에 은혜를 베풀고 靈感(령감)과
利福(이복)을 衆生(중생)에게 주어서 億萬年(억만년)을 지나도 썩는 일이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