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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지난 20년 동안 힘들게 이룬 절제의 덕을 단 15분 만에 포기하기를 진정으로 바라십니까?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1567~1622)는 프랑스 남동쪽과 스위스 서쪽에 위치한 사부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영재였습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던 아버지의 뒷받침도 제대로 받았습니다. 12살부터 파리로 유학을 떠났으며, 소르본 대학, 파도바 대학에서 수학을 했습니다. 불과 25세 나이에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따냈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변호사 자격도 취득했으며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렇게 앞날이 창창하던 살레시오는 아버지의 큰 반대를 무릅쓰고 26세의 나이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뜻밖의 상황에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아버지였지만, 아들 살레시오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에 차선책을 찾았습니다. 이왕 사제가 되었으니, 고위층 성직자가 될 수 있도록 밀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살레시오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칼뱅교도가 득세한 샤블레 지역으로 파견됩니다. 2만 5천명이나 되는 주민들 거의 모두가 칼뱅교로 넘어가고 가톨릭 신자 수는 백 명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종교적 적대감정이 가득한 샤블레 지역에서 살레시오가 보여준 선교 방식은 오늘 우리가 눈여겨 볼만 합니다. 살레시오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적개심과 반발심으로 가득한 주민들에게 개별적으로 접근합니다.
지역 주민에게 친근감을 주려고 어려운 사투리를 힘겹게 배웠습니다. 선교 효과가 미미하자 작은 전단지를 만들어 일일이 대문 밑으로 밀어 넣거나 거리의 기둥이나 벽에 붙였습니다.
결국 살레시오가 샤블레 지역 선교를 성공하게 된 비결은 한 명 한 명과의 성실한 대화, 무엇보다도 진지한 경청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 특히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 안에 선함을 존중했습니다. 살레시오가 지닌 무한한 인내심과 온유함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무장해제시켰으며, 그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살레시오와 함께 방문 수녀회를 창립한 프란치스코 요안나 드 샹탈의 증언은 수시로 분노하는 우리에게 큰 성찰거리를 건네주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살레시오 주교님이 화를 내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분에게 방문 수녀회에서 겪고 있는 어떤 난관에 대해 왜 분노하지 않으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힘들게 이룬 절제의 덕을 단 15분 만에 포기하기를 진정으로 바라십니까?”
“진정으로 인내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된 운명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동정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자연스럽고, 진실하게 받아들입니다. 절대로 중얼거리거나 불평하거나 확대해석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성공하는 사람이 반드시 가진 세 가지는?>
복음: 마르코 4,1-20
오늘은 연중 제3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의 복음이 무엇인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은총과 진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안에 은총과 진리가 떨어지면 믿음의 씨앗이 자라나서 그 믿는 대로 우리 삶이 이루어지게 되겠죠. 열매를 맺게 되겠죠. 씨가 뿌려지는데 땅에서 똑같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씨는 같지만, 땅의 종류에 따라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하고, 또 열매를 맺더라도 차이가 30배 60배 100배도 나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는 씨를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자세, 곧 의지의 문제일 것입니다. 길가는 교만을, 돌밭은 육욕을, 가시밭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삼구를 이기지 못한 밭에 떨어진 하느님의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국의 마윈이라고 하는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이 포레스트 검프를 보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마윈은 뭐를 해도 항상 떨어졌는데, 인생은 알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도 IQ가 70밖에 안 되는데 엄마가 “초콜릿을 먹을 때 무슨 맛이 안에 들어있을지는 안 보인다. 그러니까 뭐라도 끝까지 해봐라. 한 번 할 때는 최선을 다해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성공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마윈에게도 떨어졌고 그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교육할 때 자녀들에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세속, 육신, 마귀를 없애서 내가 하는 말이 단 한 톨이라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마음을 바꾸어 놓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먼저 길과 같은 마음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길은 사탄이고 교만입니다. 모든 인간의 선택은 행복을 기준으로 하기에 사탄은 행복의 방향만 틀어 놓습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자기 연민에 빠진 이들은 그 씨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부터 행복하여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에 유익한 존재가 되려는 마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 연예인이 관객에게 행복을 주어야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당신 자신과 싸우신 것처럼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돌밭처럼 쉽게 포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철봉을 잡으면서 고운 손바닥을 바라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밭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탐욕에 깃든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투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크게 성공할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에 대한 투자를 아끼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양팔 없는 파일럿 제시카 콕스가 있죠. 이 사람은 양 팔이 없이 태어났지만, 20대 때에 이미 경 비행기 조종사가 됐습니다. 물론 자동차를 운전하고 요리하고 글씨를 쓰고 책을 읽고 수영하고 피아노를 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엄마가 뿌린 “할 수 있다.”라는 씨앗을 잘 키웠습니다.
자이온 클락이라는 허리 밑부분이 없이 태어난 사람도 카일 메이나드라는 손발이 없이 태어났지만, 엄청난 성취를 이룬 사람의 책 ‘변명은 없다’를 읽고는 크게 변했습니다. 처음엔 자기 연민에 쌓여 살았지만, 자신도 메이나드처럼 남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벌써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다음은 육체와의 싸움이 기다립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두세 배는 더 고생해야 했습니다. 그는 돌밭도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물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계발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하였습니다. 가시밭도 극복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워렌 버핏도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라. 그러면 누구도 그거 빼앗아 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모든 사람도 1. 이웃 사랑이 행복임을 알고, 2. 자기를 죽여야 함을 알며, 3. 탐욕에서 자유로워야 함을 압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법칙이나 같습니다.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듭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게 될 것입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1-20: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3절) 그분은 믿음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 나오셨다. 당신의 가르침은 씨요, 인간은 밭이며, 당신 자신은 씨 뿌리는 사람이라 하신다.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3절) 씨 뿌리는 사람은 골고루 구별 없이 밭에 씨를 뿌리듯 주님께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말씀이라는 선물을 주신다(로마 5,15 참조). 그런데 인간은 그 씨앗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는 땅, 곧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의 탓이다. 인간이라는 밭이 어떠냐에 그 결실이 달려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씨 뿌리는 분 탓이 아니라,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탓이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싹은 돋았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뿌리가 없어 말라버렸다고 한다. 싹이 말라버린 것은 뜨거운 열 때문이 아니라,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6절) 이런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씨처럼 마음이 거칠고 무심하고 부주의하다. 돌밭에 떨어진 사람들은 나약함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7절) 하느님의 말씀이 숨 막혀 버렸다면, 그것은 가시 때문이 아니라, 가시덤불을 그냥 내버려 두는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가시덤불이 자라지 못하게 막고, 우리의 재물을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 걱정이라 했고, 재물의 유혹이라 했다(19절). 세상과 재물을 탓하지 말고 타락한 의지를 탓해야 한다.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8절) 땅도 좋고, 씨 뿌리는 분도 한 분이시고, 씨도 같은데, 어찌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은 것인가? 이것은 땅의 준비 상태에 달려있다. 좋은 땅이라고 해도 땅의 준비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잘못은 농부나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는 땅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과연 어떤 마음의 밭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있는가? 내 마음의 굳은 땅은 쟁기로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야 한다. 사랑의 뿌리가 내릴 수 없는 단단한 땅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떤 결실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며 말씀의 씨앗을 잘 가꾸어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은총의 삶을 주님께 청하며 기도하자.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 4, 3)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의 정성에서 참된 희망을 만납니다.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우리에겐 시들지 않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희망입니다.
하느님의 희망은 우리를 향한 확고한 믿음에서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 마음의 밭을 버리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은 이 모든 것은 가능한 희망의 자리입니다.
씨앗을 뿌리신 하느님만이 아시는 기쁨이며 행복입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분은 언제나 씨를 뿌리시는 씨앗의 하느님이십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서는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삶의 보람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인 우리 마음의 자리에 하느님께서는 씨를 뿌리십니다.
농부의 지혜는 기다림의 지혜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농사의 시작입니다.
정성을 쏟으시는 하느님의 힘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씨앗을 받아들이는 겸양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살리는 하느님의 씨앗이며 하느님을 알게하는 하느님의 씨앗입니다.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께서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진실로 믿는 오늘 되십시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면 의사소통이 힘들어집니다. 물론 손짓과 발짓, 그림을 그리거나 몸짓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표현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하겠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는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잘 맞는 부부도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부부보다도 금실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니까요.”
이 부부에게 언어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사랑의 언어로는 일치했던 것입니다. 사실 맞지 않는 이유를 계속해서 찾았던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상대와 맞는 이유만을 찾으며, 또 이 안에서 상대에게 감사를 자주 표현합니다. 단순히 지금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의 언어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일치와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같은 언어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용하셨던 아람어를 우리도 써야 할까요?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써야 할까요? 그런 언어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 주셨던 사랑의 언어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셔서, 당신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언어를 우리 역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비유로 자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깊은 뜻을 쉬운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면서 우리가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길에 떨어진 씨앗, 돌밭에 떨어진 씨앗,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있습니다. 모두 좋은 씨앗이지만, 어떤 땅에 떨어지는가가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이라는 좋은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려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좋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언어를 쓰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가 되어야,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들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일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과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었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니까요.”
오늘의 명언: 사랑은 파도보다 위대하고 두려움보다 강하다. 나는 팔이 두 개일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인생도 서핑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파도 밑에 처박혀도 곧바로 일어나야 한다. 파도 너머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믿음이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베서니 해밀턴)
6)이병우 루카 신부님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4,3)
'평화의 땅!'
오늘 복음(마르4,1-20)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비유의 설명'입니다.
'말씀의 씨'가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과 좋은 땅에 떨어진 비유를 통해,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실행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길에 떨어진 말씀'은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돌밭에 떨어진 말씀'은 환난과 박해 앞에서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상태를...
'가시덤불에 떨어진 말씀'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한 상태를...
'좋은 땅에 떨어진 말씀'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여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은 상태를 말합니다.
나는 어떤 상태인가?
어제는 오전에 나가사키 평화 공원과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원폭 피해 박물관을 방문했고, 점심 때부터는 테마공원인 하우스텐보스를 다녀왔습니다.
1945년 8월9일(목) 오전 11시02분에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27만 명 가량의 원폭 피해자가 생겨났고, 7만 명이 희생되고, 이 중에서 2만 명이 한국인이었다고 합니다.
원폭 투하 근처에 우라카미 성당이 있었는데, 성당에서 성모승천대축일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신부님 두 분과 신자들 24명이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우라카미 성당 전체 신자 12,000명 중에서 8,500명이 원폭으로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핵 전쟁은 절대로 안 됩니다.
핵 전쟁의 도발을 자극하는 행위도 절대로 안 됩니다.
핵 전쟁은 모두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평화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평화는 모두가 함께 사는 길입니다.
'평화가 넘치는 땅이 좋은 땅'입니다.
평화를 지켜냅시다!
첫댓글 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르 4,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