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호형 미안해/유현식
어린 시절 바로 앞집에 씨돌이형이 살았다. 그 형을 아는 사람들이 ‘씨돌이, 씨돌아, 씨돌네,...’라고 하는 바람에 그 형의 이름이 씨돌이인 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어린 나는 아무런 의구심도 없이 ‘씨돌이형, 씨돌이형’하며 형을 따랐다.
씨돌이형네 마당에서는 가끔 넓다란 송판으로 배를 만드느라 톱질, 대패질, 망치질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금강변에 위치한 우리 동네 딴펄(땅펄)은 강에서 조개를 채취하는 조갯배, 고기를 잡는 고깃배뿐만 아니라 샛강 건너 맛바위나 수작골을 가려면 나룻배가 필요했기에 나무로 만든 배가 꼭 있어야만 했다. 송판을 구부리고 이어 붙여서 배 모양을 만드는 광경은 어린 나에게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볼거리 중 하나였지만 아무나 이런 혜택을 누릴 수는 없었다. 씨돌이형의 앞집에 사는 행실이 안좋은 똥태에게는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엿판을 짊어진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밭 머리에 하얀 고무신을 벗고 일하는 어른들의 신을 훔쳐서 엿을 바꿔먹는, 손버릇이 나쁘기로 소문난 애였다.
배를 만드는 동안은 하루도 빠짐없이 형네집에 놀러가서 조금씩 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경했다. 어른들은
‘꽝~’
‘꽝~’
함마질을 하며
‘이거 유씨네 집에도 이 소리가 들리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면 나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와서는
‘우리집에서도 들려유.’하면 사람들은 한 바탕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면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배가 완성되고 강물에 배가 띄워지면 북적대던 마당이 사람의 그림자조차 조용해지고 하루하루가 무료할 때면 씨돌이형은 나를 데리고 소부랄만한 까만 자물통을 열어 헛간에 보관중인 배 만드는 연장을 보여주곤 했다. 여러 종류의 망치와 톱, 끌, 빠루, 함마 등등..., 이는 똥태는 누릴 수 없는 특권이었다.
씨돌이형을 비롯하여 옆집 요한이형, 건너편의 정수형들과 야밤에 마실갔다 오면서 구루마길 위에 똥싸는 장난을 쳤는데, 누구네 엄마가 내 똥을 밟고 넘어졌다고 놀려대는데 ‘하필, 왜 내똥이지?’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은 형들과 뚝방 넘어 호밀밭에 들어가 키보다 높게 자란 호밀을 넘어뜨리고 멍석같은 자리를 만들고 놀고 왔는데, 누가 일러바쳤는지 넙죽이 할아버지가 우리집에 왔다갔다. 마음을 조이며 며칠이 지나도 아버지는 그 일에 대한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길고 긴 겨울 밤이 오면 누나들은 나를 부추켜 아버지의 옛날 이야기 듣고자했다.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며 말머리를 돌렸지만 아들의 요구에는 밤이 새는지도 모르셨다. ‘꾀 많은 토끼', ‘진정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웃집 형들의 행상 소리가 측백나무 울타리 옆에서 들려왔다.
“찹살 떡, 찹쌀 떡.”하면 다른 형은 우리 집을 향해
“앙꼬 모치”라고 외쳤다. 아버지는 큰누나를 시켜서 형들을 불러왔다. 헤벌레 웃음 짓는 형들에게 받아든 ‘앙꼬 모치’는 옆구리가 뜯겨져있었고 누나가 한 소리를하면 아버지는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래겠어.”하며 누나를 향해 눈짓을 하셨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에 아래 딴펄에 살던 우리집은 마을 중앙으로 이사하게 되어서 유년시대는 먼 발치로 밀려났다. 국민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대처로 나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었다. 아래 딴펄에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어릴적 옆집에 살던 요한이형의 신혼집에 가게됐는데, 방에 들어서자마자 화툿장을 손에든 채 나를 올려보며
‘귀한 분이 오셨네...!’했다.
대학을 다닐 때였다. 우연히 우리집 근처로 씨돌이형이 이사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날 나를 보자 씽긋 웃어 보이던 형은 유년 시절의 그 이름이 아닌 성만호였다. 어린 시절 찰떡처럼 붙어다니던 형과의 관계는 어디갔는지 서로가 멋적은 듯 아무말도 못하고 가벼운 목례로 말을 피했다.
유년 시절 아무런 생각없이 ‘씨돌이형, 씨돌이형’라고 불렀던 만호형한테, ‘씨돌이형'라고 불러야 할지 '만호형'이라고 불러야 할지 헷갈렸다.
그 당시 딸 셋에 아들 하나인 씨돌이형이나 누나가 둘이였던 나나 씨돌이였는데, 그 뜻도 모르고 불렀던 '씨돌이형'이라는 호칭,
‘만호형 미안해.’
2024.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