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매축지의 현장'과 역사를 찾아서
일제의 야욕으로 바다 매축해 이룬 도시…이젠 따뜻한 삶이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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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동구 좌천동 매축지마을 전경. 부산은 바다를 매축해 평평한 땅을 더 많이 확보하면서 근대적인 도시로 바뀌어갔다. 옛날 풍경을 간직한 이곳은 영화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 백한기 선임기자 baekhk@ |
- 부산진역 철로~북항 부두
- 일제강점기 군사 목적과
- 부산 거주 일본인 근대화 등
- 대륙진출 교두보 시설 위해 매축
- 거미줄처럼 이어진 매축지마을
- 한국전쟁에 밀려든 피란민 정착
- 시간이 멈춘 듯한 근현대 정취에
- 영화 '친구' '마더' '아저씨' 촬영
지난 27일 필자가 근무하는 동아대 다우미디어센터 박현재(24·경여정보학과3) 송혜민(22·일본학과3) 김승연(20·신문방송학과) 학생과 부산의 매축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도심여행을 시작했다.
먼저 용두산공원 부산타워를 찾았다.
63빌딩 높이에 해당하는 전망대에 오르니 부산의 3분의 2가 사방으로 보였다.
박현재 학생이 "제가 해양경찰 의무경찰로 부산 바다에서 군 복무를 했는데
부산의 많은 곳이 매축한 땅이라는 사실은 잘 몰랐습니다. 저 아래 어디가 매축지인가요?"라고 물었다.
■ 매축으로 이룬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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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연(동아대 신문방송학과) 학생이 매축지마을에서 오래된 종을 울려보고 있다. |
"부산은 지형상 산기슭이 바로 바다에 박히는 형국이어서
평지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저기 보이는 중앙로가
바닷가였습니다. 저 아래 남항도 일제강점기에 방파제가 축조됐고,
매축도 많이 이뤄졌지요.
남포동 해안가는 자갈이 많은 남빈해수욕장이었지요.
롯데백화점 광복점은 용미산으로 불렀는데 일제강점기부터
부산시청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용두산은 원래 귀두산(龜頭山)으로 불렀지요.
동구의 구봉산이 거북의 몸통이라면 이 산은 머리에 해당한답니다.
그리고 저기 부산세관 건물과 부두로를 따라 인근의 북항 지역도
모두 매축지이고, 쭉 이어 '적기'라 불리던 우암동과 감만동 일대도
매축지이지요. 일제의 활발한 매축은 조선에 대한 이권 침탈의
한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매축권을 획득한 일본인 사업가들의 이익과 일본의 국가적 이익,
용두산공원 인근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살던 일본인들의 생활거주지
확장 등 여러 이해 관계가 맞물려 매축이 진행되었다고
이해해야겠지요."
영선고개 이야기, 복병산과 영선산을 삭평한 토사로 매축하고 도로를 내어 초량과 동래까지 쭉 이어
지금의 중앙로를 개설한 이야기 등을 학생들과 나누다 몇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차를 타고 부산세관 앞을 지나 부두로로 나왔다.
"지금 북항을 개발하느라 매립한 터를 고르고 있는데, 그러면 이 부두로도 매축한 것가요"라고
송혜민 학생이 물어왔다.
"일제가 이 북항 매축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일본열도와 배로 오가는 항구인 데다 경부선 철로를 통해 우리나라는 물론 만주와 대륙까지
일제가 침략 야욕을 펼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북항 매축 역사에 대해 간단히 알아볼까요?"
일본인이 거주하던 지역과 초량을 가로막는 산과 바다를 평지로 만들고,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는 일은
대륙 침략과 부산의 일본인 도시화를 위해서 필수적이었다.
북항 매축은 이 모든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첫 단추였다.
그 뒤의 경부선 개통, 부관연락선 취항, 압록강 철교와 안봉선(安奉線) 공사를 통해 일본과 대륙은 연결됐다.
이를 위해 항만 및 철도 시설이 필요했다.
북항 매축은 1902~1905년, 1907~1908년 두 차례 진행됐다.
매축을 담당한 회사는 부산매축주식회사였다.
이런 점에서 북항 매축은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기반이었고,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에게는
부산을 근대도시로 만드는 한 계기가 된 측면이 있다.
■ '친구' '마더'…촬영지로 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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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축지마을에서 만난 '양곡쌀상회'. 예스런 모습에 정감이 간다. |
제1기 매립지는 3277만952평으로, 사역 인부는 하루 평균
일본인 약 2000명, 조선인 약 900명이었다.
제2기 매립은 1907년 4월 1일 기공해 1908년 8월 31일 준공되었으며,
매립지는 6665평이라고도 하고 8747평이라고도 한다.
매축이 완료되면서 새로운 시설이 들어섰다.
일제는 가장 시급한 시설부터 만들어 나갔다.
경부선 종착역과 항만 시설 확충이었다.
일제가 대륙으로 나가기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한 시설이기도 했다.
학생들과 부두로와 접한 범일동 매축지마을로 갔다.
지난해 생긴 매축지문화원에 들어가니 매축지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벽면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러면 이 매축지마을도 매축하였다 해서 붙은 이름인가요?"라며 김승연 학생이 질문했다.
"그렇습니다.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영화 '친구' '하류인생' '마더' '아저씨' 등의 촬영지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매축지마을은 부산진 매축과 관련이 있지요. 부산진 매축과 관련해서도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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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축지문화원에 전시된 이 마을의 역사 자료. |
부산 매축의 역사에서 특히 부산진은 거류지 주변의 부산항 배후지로,
장차 공업지구로 기능해야 할 곳으로 주목받았다.
이처럼 부산진 매축은 부산항 근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부산진 매축은 공장 및 시가지 건설을 염두에 두고 추진되었다고 한다.
조선기업주식회사 측은 40만 평을 3기로 나눠 제 1기 약 13만7000평,
제 2기 약 17만 평, 제 3기 잔여 평수 매축을 계획했다.
하지만 철도국이 매입하기로 한 제 1기공사만 1922년 마치고
이 회사는 1923년 해산을 결의하고 매축을 그만둔다.
철도국은 1905년 개통 당시 경부선 종착지였던 초량역에서 1910년 신축한 부산역에 이르는 선로의 면적이
좁았고, 공작창을 만들 수 있는 부지도 필요했다.
이런 필요에서 철도 관련 시설 부지는 8만 평 정도로 계획했다.
그 위치는 오늘날 부산진역 주변이었다.
지금의 매축지 마을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16만여 평을 매축하는 부산진 제2차 매축공사 시기에 조성됐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피란민이 밀려와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어 지금까지 생활터전으로 사람들이 살고 있다.
■ 동부경찰서에는 매축 기념비
매축지 문화원 바깥으로 나와 마을을 둘러보았다.
필자는 결혼하여 신혼집을 이곳에 얻어 첫아이를 낳고 두 번 더 이 마을에서 이사하여 3년을 살았다.
새삼스러웠다. 골목이 참 많다.
큰 길에서 곳곳으로 숨어 들어가는 좁은 길, 골목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막다른 길이 가로막는다.
"그리고 1930년대에 부산 적기만의 매축도 이루어집니다.
적기만은 현재의 우암동과 감만동 일대로 북항의 끝단인 7, 8부두가 있는 지역이지요.
적기만 매축은 1934년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가 부산진매축주식회사에서 매립 면허권을 받아
시행했고, 1937년 8월 전 구역이 완성됐습니다.
10만 평 적기만 매축공사를 완료한 이케다는 곧 기존 매축구역 중 A 구역을 확장하는
적기만 2, 3기 추가 매축을 시작해 1944년 말까지 약 5만 평을 새로 조성하지요.
이 사람이 남항 매립도 했습니다.
그는 1929년 2월 제 1기 매축 공사에 착공하여 1930년 12월 제1 방파제를,
1931년 7월 제 2방파제를 준공했습니다.
1932년 12월 제 1기 매축공사로 남포동과 부평동 해안 매립 및 2000t급 선박접안용 안벽을 축조했지요.
1934년 11월에는 초장동 해안을 매립하였고, 1935년 10월에는 남항매립지에 창고를 건설했습니다.
1938년 6월에는 충무동 해안을 매립하는 제3기 매축공사를, 1942년 5월에는 제 4기 공사를 준공했지요."
일행은 부산 동부경찰서로 향했다.
이곳에는 1937년 4월 23일 부산진 매축을 마친 뒤 세운 부산진매축기념비가 담장 안에 서 있다.
동아대 다우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