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고려말 송나라 주희의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도입하면서 회헌 안향 으로부터 동국 도학이 시작합니다. 회헌 안향 -> 국재 권부/ 역동 우탁/ 동암공 진 할아버님/ 이재 백이정/ 덕재 신천 -> 익재 제현 할아버님/ 치암 박충좌 -> 가정 이곡 ->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양촌 권근 -> 야은 길재로 동국 도학의 사승관계가 근 800 여년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퇴계 이황(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 ->
월천/조목 (1524년 ~ 1606년)
고봉 기대승 (奇大升) 1527(중종 22)∼1572(선조 5)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년~1593년)
서애 류성룡(1542~1607)
한강 정구(1543년-1620년)이다.
퇴계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 退溪 - 退居溪上 )·퇴도(退陶). 도수(陶叟),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진사(進士) 증 의정부좌찬성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문신, 정치인, 성리학자이며 시인이다.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작을 사퇴한다. 풍기군수 재직시절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애 류성룡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는데, 후일 동인이 분당된 뒤 박승임의 제자는 남인 일부와 북인 일부로, 류성룡과 그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이어진다.
* 참고
1)월천 조목(趙穆, 1524년 ~ 1606년)은 조선의 학자이다. 자는 사경, 호는 월천, 본관은 횡성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명종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어 유교를 공부하였다. 1571년 선조 때 공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1576년 봉화 현감을 거쳐 1594년 군자감 주부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601년 사재감정을 거쳐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생활이 무척 빈곤하였으나 오직 학문에만 전심하여 대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 <월천집>과 성현의 훈화(訓話)를 기록한 <곤지잡록>이 있다.
2)고봉 기대승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은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관로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한 바 있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한을 교환하였는데,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른바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였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3) 학봉 김성일 (金誠一, 1538년~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조선통신사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겐소(玄蘇)·소 요시토시(宗義智-혹은平義智라고도 불림)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 1589년 11월 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_대마도 답사시 배례
-동인 김성일의 어긋난 보고
1590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 일행이 이듬해 돌아와 한 보고는 서로 상반된 것이었다. 이때 통신사 중 정사는 서인인 황윤길이었고 부사는 동인인 김성일이었다. 1591년 음력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임진왜란 직후
1592년 임진왜란 직후의 음력 6월 28일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김성일을 비꼬며, 그 정도(징후 운운) 이상의 말을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서의 통신사 이야기는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기 전 몇개월 동안이나 기다리면서도 정사인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이 두려움이 앞서 말을 꺼내지 못할 때도 부사 김성일 만이 만남을 독촉하였고, 최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만한 답서에 대해서는 부사 김성일 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한다. 지금도 통신사가 묵었던 곳에 부사를 기리는 비석이 남아있다.-대마도 답사시 배례
-임진왜란과 죽음-전란 초기
1592년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 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적통을 이어받은 수제자로서 왕실의 권력이나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백성을 위한 직언을 하기로 유명하여 경상도의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류성룡 등의 천거에 의해 선조의 사형 명령이 철회되고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된 것이다.
이후 즉시 경상도로 내려가 격문을 지어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으는 한편, 이미 어지러워진 군율을 바로 세우는 데에 몰두한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진주성 전투와 전사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 장군은 당시 군관으로서, 진주 목사와 산에 숨어 있다가 초유사의 명을 받고 진주성을 지키게 되었다. 초유사는 당시 곡창지대였던 호남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왜군이 반드시 경상도에서 호남으로 넘어가기 위해 진주성을 침략할 것임을 내다보고 진주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관군과 의병이 함께 진주성을 지키도록 해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사하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운명과 붕당의 폐단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5) 정구 선생(1543년-1620년)은 청주 정문(鄭門)으로, 호(號)를 한강(寒岡)으로 스스로 지어 불렀다. 도동 서원은 영남 예학을 대표하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선생은 중종대왕 때 성주(星州)에서 태어나서, 성주에서 주로 지내셨다. 선생은 광해군 때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한강은 중앙관직을 되도록 멀리하시고, 주로 지방관직을 스스로 맡아서 지방학문의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영의정으로 추증받았고, 문목(文穆)으로 시호를 받았다. 한강은 남명 조식선생과 퇴계 이황선생 사이를 오고 가면서 학문을 익혔다. 선생의 학문과 인격 수양의 자세는 퇴계를 닮았고, 더 높은 기상은 남명의 모습 그대로이다라고 알려졌다.
기호 예학이 사계(沙溪) 김장생에 의해 이루어졌듯이, 영남 예학은 한강에 의해 체계가 이루어졌다. 선생의 학문은 인조 대왕 때 산림 처사로 알려진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선생과 미수 허목을 거쳐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강문인록(寒岡門人錄)에는 문인이 모두 34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거 합격자는 문인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110인으로, 시호(諡號)가 밝혀진 문인도 9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동 서원은 한강과 여헌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 남인계 한려학파(寒旅學派)를 형성하였고, 대구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 중부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 서애 류성룡(1542~1607),
1545년 (인종 1년) 4세 글을 읽기 시작
1547년 (명종 2년) 6세 대학(大學)을 배우다.
1549년 (명종 4년) 8세 맹자(孟子)를 읽다.
1554년 (명종 9년) 13세 동학(東學)에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강독(講讀).
1555년 (명종 10년) 14세 향시(鄕試) 합격.
1558년 (명종 13년) 17세 부인 전주 이씨(李氏)를 맞이하였음.
1560년 (명종 15년) 19세 10월 관악산 암자에 들어가 맹자(孟子)를 공부함.
1561년 (명종 16년) 20세 고향 하회에 돌아와 춘추(春秋)를 읽다.
1562년 (명종 17년) 21세 9월 도산(陶山)으로 퇴계선생을 찾아뵙고 수개월간 머무르면서 '근 사록' (近思錄) 등을 전수받음.
1563년 (명종 18년) 22세 가을에 진사생원(進仕生員) 동당초시(東堂初試)에 합격.
1564년 (명종 19년) 23세 7월 생원회시(生員會試)에 1등, 진사에 3등으로 합격.
1565년 (명종 20년) 24세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
1566년 (명종 21년) 25세 10월 별시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
1567년 (명종 22년) 26세 4월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
1568년 (선조 1년) 27세 대교에 임명.
1569년 (선조 2년) 28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옴.
1571년 (선조 4년) 30세 3월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됨.
1573년 (선조 6년) 32세 2월에 이조좌랑에 임명됨.
7월 13일에 관찰공(선생의 아버지) 상을 당하다.
1576년 (선조 9년) 35세 1월에 원지정사가 완성됨.
4월에 사간원헌납에 임명. 다시 사헌부장령에 임명.
1577년 (선조 10년) 36세 2월 여강서원의 퇴계선생 봉안문을 짓다.
1578년 (선조 11년) 37세 사간에 임명.
1579년 (선조 12년) 38세 직제학, 동부승지, 지제교로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 겸직.
1580년 (선조 13년) 39세 이조참의를 거쳐 특명으로 상주목사에 임명.
1581년 (선조 14년) 40세 1월에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
1582년 (선조 15년) 41세 대사간, 우부승지,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승진.
1583년 (선조 16년) 42세 1월에 홍문관 부제학에 재임명.
1585년 (선조 18년) 44세 3월에 왕명으로 정충록(精忠錄) 발문(跋文)을 지어 올림.
1587년 (선조 20년) 46세 퇴계선생의 문집을 편차(編次).
1588년 (선조 21년) 47세 양관대제학, 10월에 형조판서에 임명.
1589년 (선조 22년) 48세 봄에 사헌부 대사헌, 병조판서, 지중추부사 역임.
1590년 (선조 23년) 49세 5월 29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
1591년 (선조 24년) 50세 7월에 홍문관 대제학을 겸직.
1592년 (선조 25년) 51세 4월 왜군이 부산 침입. 이를 대비하여 조치함.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
1593년 (선조 26년) 52세 1월에 평양성 탈환.
10월 왕이 서울로 환도하고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설치.
1594년 (선조 27년) 53세 충주를 중심으로 한강 상류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 조령에 관문과 둔전(屯田)을 마련할 것을 건의.
1595년 (선조 28년) 54세 경기, 항해, 평안, 함경의 4도도체찰사에 임명.
1596년 (선조 29년) 55세 군사를 훈련시키는 규칙을 정하여 각 도에 내려 보냄.
9월에 4번이나 사직원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음.
1597년 (선조 30년) 56세 2월에 다섯차례 사직원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음.
1598년 (선조 31년) 57세 11월 19일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의 무고사건으로 파직.
12월 5일 삭탈관직.
1599년 (선조 32년) 58세 2월 16일 하회로 돌아옴.
1600년 (선조 33년) 59세 퇴계선생 연보(年譜)를 초(抄) 함.
1601년 (선조 34년) 60세 3월 5일 백씨 겸암 선생 타계.
8월 21일 어머니 정경부인 김씨 별세.
1602년 (선조 35년) 61세 2월에 신종록(愼終錄)을 짓다.
4월에는 영모록(永慕錄)을 짓다.
1604년 (선조 37년) 63세 3월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짐.
1605년 (선조 38년) 64세 1월에 지행설(知行說)을 짓다. (지행합일설)
4월에 맏이가 죽다. 제왕기년록을 짓다.
9월에 서미동으로 이사.
1606년 (선조 39년) 65세 3월에 서미동에 초당 농환재(弄丸齋)를 마련.
조명(釣名)설을 지음.
1607년 (선조 40년) 66세 3월 3일 왕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였음.
9월에 왕에게 유소(遺疎)를 씀.
조카에게 명하여 유계(遺戒)를 쓰게 함.
1607년 (선조 40년) 음력 5월 6일, 66세를 일기로 농환재에서 서세(逝世).
1) 서애집(西厓集) : 서애 선생의 시문집이다.-목판본, 20권 11책, 1633년(인조11)에 아들 진(袗)이 합천군수로 있을 때 간행하였다.
권 1∼2는 시(詩),권 3∼4는 주문(奏文) ·소(疏) ·차(箚),권 5는 차(箚),권 6은 서장(書狀),권 7∼8은 계사(啓辭),권 9는 정문(呈文) ·서(書),권 10∼12는 서(書),권 13∼16은 잡저(雜著),권 17은 서(序) ·기(記) ·논(論) ·발(跋),권 18은 발(跋) ·전(箋) ·명(銘),권 19는 제문(祭文) ·비갈(碑碣),권 20은 묘지(墓誌) ·행장(行狀) 등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20권 11책으로 되어 있으나 본집 1책을 줄여 10책으로 한 것도 있으며, 또 별집 4권이 있어 시(詩) ·소차(疏箚) ·계문(啓文) ·정문(呈文) ·서(書) ·잡저(雜著) ·비변잡록(備邊雜錄) ·주의(奏議) ·기사(記事) ·발(跋) ·서후(書後) ·명(銘) ·제문(祭文) 등 원집에 누락된 유시문(遺詩文)을 수록하여 모두 24권 13책으로 된 것도 있다.
2) 징비록(懲毖錄
- 1책, 필사본, 국보 제 132호(1969년)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고 군무(軍務)를 지휘하였던 서애 선생이 조정에서 물러나 귀향하여 정리한 저술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가장 대표적인 기본 사료(史料)가 된다.
1592년(선조25)에서 1598년까지 7년간의 기록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교린관계(交隣關係)를 비롯하여, 백성들의 항쟁,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戰況)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징비(懲毖)’란『시경(詩經)』 주송(周頌) 소비장(小毖章)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서애 선생이 직접 밝히고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와 겨레에게 이러한 비참한 전화(戰禍)가 또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참회와 염원으로 그 수난상을 기록하고 이를 『징비록(懲毖錄)』으로 이름지었던 것이다.
필사본『징비록』은 조수익(趙壽益)공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시,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1647년(인조25)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그 이전인 1633년에도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공이『서애선생문집』을 간행할 당시 그 속에 수록한 바 있다.
이 책은 1695년(숙종21년) 일본 경도 야마토야(大和屋)에서도 중간되었는데, 동왕 1712년부터는 나라에서 『징비록』의 일본 유출을 금지하는 명을 내리기도 했을 정도로 소중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됨은 물론이거니와, 호방한 서애의 자필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더해진다. 하회마을 내 ‘영모각’에 소장되어 있다.
3) 난후잡록 (亂後雜錄) <第一冊 /第二冊>)2책, 필사본, 보물 제160-2호(1963)
서애 선생이 임진왜란 뒤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것을 기록한 책으로 ‘유성룡종손가문적(柳成龍宗孫家文籍)’에 들어 있다.
상권(上卷)에는 정토사(淨土寺) 승려가 왜적을 유인하여 죽인 일을 시작으로 유성룡 자신이 16세 때 아버지의 부임지인 의주에서 들은 민요(民謠), 이순신의 승전 그리고 하옥ㆍ재기용 등에 관한 일, 임진난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에 한강이 3일 동안 붉어졌던 일, 곽재우(郭再祐)ㆍ고경명(高敬命) 등이 각 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일, 훈련도감의 설치에 관한 일 등 주로 임진왜란 7년에 얽힌 일들을 36항목에 걸쳐 적었다.
하권(下卷)에는 이엽(李瞱)이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나오는 과정을 시작으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세자(廢世子)에 관한 일, 황희(黃喜)ㆍ안평대군(安平大君)등 조선 전기 명인들의 전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임진전란사 및 고려에서 조선 선조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화 등 역사기록뿐 아니라 시문초고도 여러 편 들어 있어 각 분야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4) 진사록(辰巳錄) <第一冊/第二冊 > (필사본, 보물 제160-1호(1963)
『진사록』은 주로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都體察使), 영의정을 맡았던 서애 선생이 선조 25년(1592) 임진년과 선조 26년(1593) 계사년에 국왕 선조에게 올렸던 군국정무(軍國政務)에 관한 서장(書狀)을 베껴서 엮은 책이다. 그래서 임진년의 '진(辰)'자와 계사년(癸巳年)의 '사(巳)'자 두 글자를 따서 책의 이름을 지었다.
그 내용은 대부분 임진년과 계사년 두 해 동안에 있었던 사실, 즉 왜적의 동태, 명나라 장수와 우리나라 장수들의 작전 태세, 군량의 수집 보급, 무기의 조달, 군인들의 논공행상(論功行賞) 등 전쟁수행에 관련된 각종 문제에 대한 대책 등을 조정에 보고 또는 건의한 것이다.
『진사록』은 그 필적으로 보아 선생의 자질(子姪) 이나 문인(門人)들이 옮겨 베낀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유성룡이 교열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제목(題目), 책의 칸 밖이나 각 편 끝부분에 감회나 의견을 직접 기록해 놓았다.
5) 근폭집 <상>(芹曝集 <上/下>) 2책, 필사본, 보물 제160-3호(1963)
[근폭집]은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ㆍ영의정 등을 맡아 국난 극복에 진력하였던 선생이 선조 25년(1592) 임진년(壬辰年)부터 선조 29년(1596) 병신년(丙申年)까지 국왕 선조에게 올린 군국 정무에 관한 차자(箚子)ㆍ계사(啓辭)를 베껴서 엮은 책이다.
'근폭'의 뜻은 "옛날 송나라 농부가 늘 삼베옷을 입고 겨울을 지내다 봄이 와서 따뜻한 햇볕을 쬐자 마음이 기뻐 임금님께 이 따스함을 드리고 싶다했고, 맛있는 미나리의 맛을 보고는 우리 임금님께 드려야겠다."라고 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비록 몸은 관직을 떠나 있지만 서애 선생 자신의 흔들림 없는 충군, 애국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1) 愚伏 정경세(鄭經世)-1563(명종 18)∼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아버지는 좌찬성 여관(汝寬)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로 가(軻)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어 천자(天資) 가 영오(穎悟)하여 7세에 《사략 史略》을 읽고 8세에 《소학》을 배웠는데, 불과 절반도 배우기 전에 문리가 통하여 그 나머지 글은 스스로 해독하였다 한다.
1578년(선조 11) 경상도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합격하였고, 1580년 유성룡의 제자가 되어 학문에 진력하였다. 1582년 회시(會試)에서 진사에 뽑히고 1586년 알성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98년 2월에 승정원우승지로, 3월에는 좌승지로 승진되었고, 4월에는 경상감사로 나갔다. 경상감사 재임시에는 영남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민력(民力)이 탕갈되고 인심이 각박한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하여주고, 민풍(民風)의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는 도학(道學)의 전수가 정몽주(鄭夢周)에서 창시하여 이황(李滉)에서 집성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같은 여러 현인이 나와 정학(正學)을 강명(講明)하여 이들 모두 수백리 안에서 울흥하였고, 상주는 또한 영남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 서원을 세워야 함을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고,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여 후학으로 하여금 도학의 정통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하였다.
1609년(광해군 1) 4월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 외직을 원하여 나주목사에 배명되어 12월 부임하는 날 다시 전라감사에 영전되어 그뒤 도정(道政)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8월에 정인홍(鄭仁弘)일당의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일변되자 3월에 홍문관부제학이 제수되었다.그뒤 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도(公道)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士論)을 조화하여 국정에 심력을 기울였다.
정경세의 학문은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평소에 주자(朱子)를 흠모하고 존신하였으며, 주서(朱書)를 편람, 정독하여 후진교육이나 조의(朝議)에서나 경연에서 진강할 때 주서에 근거를 두지 않음이 없었다.《양정편 養正篇》은 주자가 편찬한 《소학》과 표리가 되고 《주문작해 朱文酌海》는 이황이 편찬한 《주서절요 朱書節要》와 표리가 되는 것으로 주자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그는 또 경전에 밝았는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그의 제자로는 전명룡(全命龍)·신석번(申碩蕃)·강진룡(姜震龍)·황뉴(黃紐)·홍호(洪鎬)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우복집》·《상례참고 喪禮參考》·《주문작해》가 있다.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2) 수암 유진(柳袗)-1582(선조 15)∼1635(인조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아버지는 영의정 성룡(成龍)이다.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12년 해서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난에 무고로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1623년(인조 1) 인조반정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수령으로 전무(田畝)와 부세(賦稅)를 바로잡았다.이듬해 형조정랑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寃獄)을 해결하여 판서 이서(李曙)의 경탄을 샀다.
1634년 지평으로 장령 강학년(姜鶴年)이 당시 서인정권의 정책을 크게 비판하여 심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를 두둔하여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수암집》이 전한다.
2-1) 졸재 유원지(柳元之)-1598(선조 31)∼1678(숙종 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경현(景顯). 자는 장경(長卿), 호는 졸재(拙齋).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의 손자로, 장령 여(#여02)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군자감정 세찬(世贊)의 딸이다. 할아버지 성룡과 작은아버지 진(袗)에게서 수학하였다.일찍이 황간·진안 등지의 현감을 역임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안동지방의 의병장 이홍조(李弘祚)와 함께 활약하였다.
학문에 열중하여 사서오경과 제자백가에 능하였으며, 특히 성리(性理)·이기(理氣)·상수(象數)·천문·지리·예설 등에 통달하였다.이기설에 있어서 주로 이황(李滉)의 이발기발설(理發氣發說)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이이(李珥)의 설을 반박하였으며, 예설에 있어서는 효종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송시열(宋時烈)이 의정(議定)한 기복제(朞服制)를 부인하고 3년설을 주장하였다.안동의 화천서원(花川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졸재집》 14권 7책이 있다.
3)우원 유세명(柳世鳴)-1636(인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능(爾能), 호는 우헌(寓軒). 안동출신. 운룡(雲龍)의 증손으로, 원리(元履)의 아들이다. 유원지(柳元之)의 문인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75년(숙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78년에는 검열을 지내고, 이어 사관(史官)·이조좌랑을 거쳐 1689년에 지평·교리·헌납을 역임하였다.1689년 3월 홍문록에 등재되고, 다시 윤3월에 재차 홍문록에 등재되었다. 또 그해 12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한때 공충도도사(公忠道都事)로 있을 때 서천군수의 비행을 탄핵하여 파면시키어 도내가 숙연하였고, 교리로 있을 때는 부교리 민창도(閔昌道)와 함께 노론의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김석주(金錫胄)에 대한 엄벌과 민정중(閔鼎重)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차자(箚子)를 올려 민정중을 뒷날 벽동(碧潼)으로 유배하게 하였다.
그는 읽지 않은 글이 없다고 할 만큼 많은 책을 섭렵하였고, 궁리하지 않은 이치(理致)가 없다고 할 만큼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며, 늘 혼자서 자신을 성찰하는 공부에 열중하였다.
4)주일재(主一齎) 류후장(柳後章 1650~1706)의 아호이다. 이 집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증손인 류만하 공이 충효당에서 분가할 때 지은 집으로 그의 아들인 류후장공이 증축하였다.
5) 남야 박손경
6) 임재 정동조
7) 강고 유심춘(柳尋春)-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상원(象元), 호는 강고(江皐). 유성룡(柳成龍)의 후손으로, 광수(光洙)의 아들이다. 발(潑)에게 입양되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거쳐 익위(翊衛)가 되었다.1800년(정조 24) 경연을 열어야 된다고 상소하였다.1830년(순조 30) 왕의 하교로 3대가 과거에 급제한 것을 치하하고 돈녕부(敦寧府)의 도정에 임명하였고, 1854년(철종 4) 아들 후조(厚祚)가 급제하였으므로 다시 통정대부에 올랐다.평소에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탐독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유후조(柳厚祚)-1798(정조 22)∼1876(고종 13).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재가(載可), 호는 매산(梅山)·낙파(洛坡)·영매(嶺梅). 도정(都正) 심춘(尋春)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부사·부호군을 지내고 1864년(고종 1)에 이조참판,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남인계 인사 중용책에 따라 1866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같은해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그곳 서양인들의 동정을 알렸는데, 병인양요 때에는 상주에 살던 아들 주목(疇睦)에게 의병을 일으키게 하기도 하였다. 1867년 좌의정에 오르고, 1872년에는 판중추부사로 퇴관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8) 계당 류주목(柳疇睦):1813(순조 13, 계유)∼1872(고종 9, 임신). 본관 豐山. 자는 叔斌. 호는 溪堂. 厚祚의 子. 과거를 단념하고 띠집을 짓고 학문에 전념함. 학행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장악원주부•공충도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음. 저서:『溪堂集』•『全禮類輯』•『四七論辨』•『朝野約全』•『海東譜』. ▣참고:「行狀」(柳道洙撰) 집필:이원걸
4. 하회마을의 형국
하회마을의 지형을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감싸고 돌면서 s 자형을 이룬 형국을 말한다. 강 건너 남쪽에는 영양군 일월산의 지맥인 남산이 있고 마을 뒤편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이 마을 중신부까지 완만하게 뻗어 충효당의 뒤뜰에서 멈춘다. 강 북쪽으로는 부용대가 병풍같이 둘러 앉아 산천 지형 또한 태극형 연화부수형국을 이룬다.
화천의 흐름에 따라 남북방향의 큰길이 나있는데 이를 경계로 하여 위쪽이 북촌 아래쪽이 남촌이다. 북촌의 양진당과 북촌댁,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은 역사와 규묘에서 설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다.
이 큰길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부에는 유씨들이 변두리에는 각성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2개의 문화가 병존한다. 양진당 충효당 남촌댁 북촌댁 등 큰 가옥들은 사랑채나 별당채를 측면으로 연결하거나 뒤뜰에 따라 배치하는 등 발달된 주거 구조를 보이고 장대한 몸체 사랑채 행랑채가 공통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특히 사랑방 서실 대청 별당과 같은 문화적인 공간을 지니는 점은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일반 서민들이 소유한 최소한의 주거 고아간과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류성룡등 많은 고관 대작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임진왜란의 피해도 없어져 전래의 유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허씨의 터전에 안씨의 문전에 유씨의 배판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최초의 마을 형성은 허씨들이 이룩하여 하회탈도 허씨들이 만들어 온다고 전한다.
400년 동안 위패의 위치를 놓고 벌여온 풍산 류씨와 의성 김씨 가문의 다툼이 막을 내렸다. 호계서원 중건 추진위원회는 조만간 복원 사업에 들어가는 안동시 임하면 호계서원의 위패 위치를 맨 가운데 퇴계 이황, 왼쪽에 서애 류성룡(1542~1607), 오른쪽에 학봉 김성일(1538~1593)로 확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이 문제를 두고 위패 논란을 벌여온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의 두 문중은 최근 모여 이렇게 합의했다고 추진위는 밝혔다.
호계서원은 1573년 조선 선조 때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스승을 기려 안동에 세운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7세기 초 이황의 수제자들인 서애와 학봉을 이 서원에 더해 모시면서 이들의 위패를 어느 쪽에 두느냐를 두고 400여년 동안 두 사람의 가문과 제자들이 자존심 싸움을 벌여왔다. 당시 조정의 서열을 보면,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왼쪽이 상석으로 인식됐다.
이른바 ‘병호시비’로 불리는 이 다툼에서 나이가 4살 많은 학봉 쪽은 나이로, 영의정을 지낸 서애 쪽은 관직으로 정해야 한다고 맞서왔다. 1차전은 영남학파의 장로 격인 우곡 정경세(1563∼1633)의 의견에 따라 서애를 왼쪽으로 모시기로 결정됐다. 하지만 1805년 서울 문묘에 이들을 모시는 문제를 두고 다시 대립했으며, 결국 양쪽은 서애의 위패를 병산서원으로, 학봉의 위패를 임천서원으로 모셔갔다. 그러다 최근 안동지역 유림들이 호계서원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기로 하면서 또다시 이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던 것이다.
서애는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이순신을 천거하고 선조를 지키는 등 전쟁을 이끈 공을 세웠다. 학봉은 임진왜란 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전쟁 가능성이 적다고 주장했다가 전쟁이 터지자 경상우도 초유사로 적과 싸우다가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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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에 잘 읽었어요
지기아제님 늘 바쁘신데 댓글 고마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