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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 나도 가야 할 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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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연중 제22주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나도 가야 할 길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 사도에게 대단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베드로 사도는 칭찬받는데,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식을 가진 자라는 거의 극찬을 받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복음에서는 사탄이라는 욕을 바가지로 먹습니다.
그리고 주님 교회의 반석이라는 영예를 받았는데 걸림돌로 추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느닷없이 사탄과 걸림돌이 되었는지,
사탄과 걸림돌의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게 됩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걸림돌은 흔히
출세의 걸림돌이나 성공의 걸림돌이라고 하듯 세상사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사탄이나 걸림돌은 이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왕 노릇 못하니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하러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사탄은 광야에서 유혹받으실 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 가시고 악령과 대결하시게 되었는데
그때 악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하라는 식으로 유혹하고,
높은 산으로 주님을 데리고 가서는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제의들을 다 물리치시고 유혹을 이겨 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길은 출세 가도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며,
부활의 길이요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인 것이 분명하며,
그러므로 주님께는 이 길을 막는 것이 걸림돌이고 사탄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주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
부활의 길,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고, 그리고 이 길은 우리도 가야 할 길입니다.
이것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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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연중 제22주간.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바로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기 버림과 일상에서 다가오는 갈등과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주요 골자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든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보겠다는 생각마저 포기하는 것입니다. 항상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마음자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완전한 자아포기입니다.
이 일이 선결되어야만 그리스도의 고통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단계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훌륭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자신을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자신을 내어준 빈 자리에 거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내 안에는 예수님이 계실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제자되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벗어버린 신앙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배제된 십자가는 우리 신앙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에 담겨진 고통의 신비를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거쳐서 들려오는 소리라야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 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고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예수님의 고통의 메아리를 들으려는 불타는 갈망을 가졌습니다. 성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기쁘고 황홀한 때는 순간에 불과 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말년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맛보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다음의 글을 통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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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연중 제22주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태 16,23)
우리의 삶의 현실에는 갖가지 어려움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코로나 19 감염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 죽음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비록 그 형태는 다를지라도, 결코 그것들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어찌할 수 없는 불편함과 어려움,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무능과 약함과 한계를 깨우쳐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일’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을 극렬하게 보여줍니다. 예레미아는 기원전 6백년 전후, 유다왕조가 이집트와 연합하여 바빌론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오히려 “유다는 망해야 한다. 바빌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했던 예언자입니다. 이는 유다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반역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과 사제, 거짓 예언자들과 관리들이 일어나 예레미아를 잡아 가두고 폭행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미움을 당하고, 고통당하고, 폭행당해야만 했습니다. 예레미아는 이러한 극한적인 고통 속에서 원망조로 이렇게 읊조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 20,8)
그러나 모두에게 저버림을 받아도, 자신이 반역자로 취급될지라도, 결국 외쳐야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존재의 근거요 힘이요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을 수락하는 삶, 그 안에 구원이 있음을 본 까닭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본 까닭입니다.
<제2독서>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믿음이 구체적으로는 봉헌이란 형태로 드러납니다. 곧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곧 일상의 크고 작은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사랑으로 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거룩한 산 제물”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의 메시아적 행위, 곧 구원의 행위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곧 당신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충격적인 말씀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21절)는 예고 말씀으로, 승리자와 통치자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던 메시아가 수난을 받아 패배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요, <둘째>(22-23절)는 베드로와의 대화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예고요, <셋째>(24-28절)는 고난 동참 요구와 상급 약속으로, 메시아를 따르는 자에게는 능력과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에의 동참이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 하며,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양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하고 우리를 질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보다 피하려 합니다. 마치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에는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아야 하고, 되고자 하는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고, 나아가서 하느님께 희망하는 것마저 기꺼이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마태 16,22) 하며,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치부해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태 16,23)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하고 있을 때, 혹은 자신을 귀찮게 하는 노고를 피하고 있을 때, 또는 그가 나에게 잘해주는 지를 따지고 있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힘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에 동참하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자신을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게 하소서!
제 삶이 산 제물로 드리는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마태 16,21)
주님!
길을 인도하시는 당신을 따라 걷게 하소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따라 걷게 하소서.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어도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말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보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 끌어안게 하시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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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연중 제22주간.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사랑 안에 항구하게 머물러있기를 희망합니다. 성 요한 비안네에 의하면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주님 사랑의 표징이지만 막상 짊어지려고 하면 힘이 들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가운데 감당할 힘을 주시길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당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시면서 인생길을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요한복음은 기록합니다.“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요한16,28).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은 한마디로 겸손의 길이요, 죽기까지 순명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25).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 먼저 버려야 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릇은 비어있어야만 무엇을 담을 수 있습니다”(노자).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비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나의 취향과 성격대로, 나의 계획을 내 중심으로 살아온 삶이었다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내 인생은 ‘나’중심이 아니라‘예수님’중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버리라는 말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지 말고, 더 크고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자기 왕국을 만들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자기 안에 건설하라는 요청입니다. 바오로 사도 기억하시죠?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8-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3,20).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으로 만족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번째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결국 자기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동안의 자신의 삶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위하여,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희생과 아픔이 동반합니다. 그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로마12,2)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는 구체적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참으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 속죄 제물이 되셨듯이 우리도 죄의 용서를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1,18).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도 있고 여러분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그 속을 보면 다 십자가를 안고 살아갑니다. 근심, 걱정,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고 순종하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져줄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허락하시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간 기꺼이 짊어지고 갈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새 생명에 이르는 길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내 뜻, 내 생각을 접고 주님의 뜻,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을 갈라놓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에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4-17). 라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한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1-62).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자신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세상일에 미련을 버리는 일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결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포기하는 일이 곧 십자가를 통한 영광을 차지하는 길임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1독서의 말씀처럼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위안을 얻은 예레미야’처럼 여러분도 말씀을 통해 위로받기를 빕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2).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은 다 잃어도 ‘목숨’을 얻은 것이고 그리스도를 잃은 사람은 다 얻어도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날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마태16,27) 갚아줄 보상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자가 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교훈, 살아있는 책’(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며 가야 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그분은 이 세상의 원리라는 유혹에 빠진 것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논리, 예수님의 논리는 세상과는 반대로 겸손과 무상성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실패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완전하고 굳건하게 남은 사랑, 그리고 거절하지 않고 인류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놓음으로써 완성되고 드러난 사랑 말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져주신 사랑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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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연중 제22주간.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운전하면서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려면 스마트 폰을 자동차의 USB 단자에 연결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자동차의 스크린에 스마트 폰의 스크린이 옮겨집니다. 마치 스마트 폰의 내용들이 자동차의 힘에 의해서 조정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USB 단자에 연결된 케이블을 뽑으면 스마트 폰은 다시금 제 자리를 찾습니다. 제가 즐겨 사용하는 ‘카톡’도 그렇습니다. 사무실에서 사용하던 카톡을 숙소에서 사용하게 되면 사무실의 카톡은 정지가 됩니다. 카톡을 설치할 수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카톡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래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최면치료’에서도 보았습니다. 최면 상태에 들어가면 마치 영혼이 최면을 건 사람에 의해서 조정되는 것 같았습니다. 최면을 건 사람이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우는 것을 봅니다. 평소에 잊고 있던 일들, 자신의 내면에 깊이 간직했던 기억들이 최면에 의해서 떠오르는 것을 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담자는 과거의 상처를 치료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마음이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중국 무협지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화입마(走火入魔)’라는 말이 있습니다. 뜻은 이렇습니다. “운기조식이나 영약을 섭취하고 기운을 갈무리 할 때 외부에서 충격을 받거나, 심마 같은 마음에 큰 동요가 있을 때, 혹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과하게 영약을 복용했을 때 몸 안에 도는 기를 통제하지 못하여 내공이 역류하거나 폭주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쉽게 설명하면 마가 내 몸을 치고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본인은 대부분 그 상태를 잘 모르고 있으나 차츰 평소의 내 의지와는 다른 행동이나 몸의 변화가 오게 되는데 대게 건강이 악화되고 정신적인 장애가 생기며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주화입마의 대표적인 상황은 ‘마귀’에 들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대’라는 마귀들을 쫓아버렸습니다. 마귀들은 돼지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을 알아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귀에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버리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에게 조정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율법을 잘 안다고 하지만 무엇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지, 무엇이 마귀로부터 오는지 식별하지 못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던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던 일곱 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일곱 마귀는 ‘칠죄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칠죄종에는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음욕’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반석이다. 내가 너를 통하여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 우쭐해있던 베드로 사도는 ‘교만’의 마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교만에 빠져있던 베드로 사도는 감히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사제복이 우리를 마귀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마귀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직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 신앙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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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연중 제22주간.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중국어에는 ‘마상(馬上)’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마상이란 말의 뜻은 ‘곧’, ‘금방’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마상’은 대중이 없습니다. 기한도 없습니다. 5분 일수도 있고 한 시간일 수도 있으며 하루일 수도 있고 한 달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말 안에는 수많은 여백이 있습니다. 또한 마상이란 말은 그 주체가 시간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사람의 일은 모든 것을 내가 기획합니다. 시간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때는 이렇게 저 때는 저렇게, 그 안에는 여백이 없습니다. 내가 계획한 데로, 내가 운영하는 데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삶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계획대로 내가 생각한 데로 되는 것이 사실은 안되는 것보다 더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내가 계획하는 내 삶 안에도 나를 끌어가는 하느님의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에는 여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운영하는 여백, 내 삶을 운영하는 하느님의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삶이 내게 다가올지 모르는 여백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왜? 하느님의 일이니까! 내 생각대로 내 계획도로 되지 않았다고 하여 화내거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순응하는 모습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머지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그래서 여러분이 계획한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와 더불어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가끔은 내 뜻이 꺾이고 다른 길을 가더라도 그것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기를, 그 길 안에서 하느님께서 삶의 희망도 용기도 선사하시기를 희망합니다.
발 매트 같은 하루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할지 모릅니다.
발 매트 같은 하루
쉬는 날
극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날
키우는 애완동물이 밟고 지나가도
미동도 하기 싫은 날
이런 날을
발 매트 같은 하루…. 라고 한답니다.
사실 저는
발 매트 같은 하루를 지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날은 우리에게 필요할지 모릅니다.
발 매트 같은 하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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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연중 제22주간.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성공하면 행복해질까요? 대부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꿈이 이룰 수만 있다면, 나는 행복할 텐데….’, ‘이 목표에 달성하면 행복할 텐데….’, ‘로또 1등에 당첨되면 행복할 텐데….’ 반면, 큰 실패를 겪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꿈은 이제 끝났어. 모든 걸 망쳤어. 목표에 이르지 못했으니 나는 불행해질 거야.’
하지만 성공해야 행복해진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실제로 거액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행복은 얼마 뒤에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는 결과만을 봐도 그렇습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의 행복도 얼마 뒤에 다시 예전과 같아집니다. 그렇다면 성공과 행복은 관계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공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않을 뿐, 대신 행복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어줍니다.
행복 수준이 오르면 더 친절해지고 너그러워집니다. 또 긍정적인 마음으로 긍정적 효과를 주변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이런 사람이 좋을까요? 싫을까요? 당연히 좋습니다. 또 함께하고 싶을 것입니다. 감정이 전달된다는 말도 있듯이, 행복한 사람의 곁에는 그 사람의 행복이 전달되기에 행복한 사람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좋고, 더 건강하고, 더 윤리적인 세상을 함께 만들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이가 성공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바라보고 행복을 살아야 하는데, 성공만을 바라보니 힘든 시간의 연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우는 사람을 향해 일침을 날리시면서, 하늘 나라의 진리를 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나는 과연 행복을 보는가? 아니면 성공만을 바라보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지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이나 겪어야 할 고난과 죽음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은 하느님께 있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영광의 시간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극도로 화를 내십니다. 예수님 신원에 대해 정확한 답을 이야기했다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셨는데, 그 베드로에게 ‘사탄’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세상의 성공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함께 사는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또 하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성공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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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는 젊었을 때 10번 시도하면 9번 실패했다. 그래서 10번씩 시도했다(조지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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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연중 제22주간. 키엣 대주교님.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내것을 잃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잃지 않고 얻기만 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취하기만 한다고 얻는 것이 아니고 포기한다고 잃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칙도 다르지 않습니다. 투자자들은 창고에 돈을 묶어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자본을 동원해 투자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냅니다. 많은 돈이 많은 이윤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생활도 이러한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끊임없이 버리신 주님의 삶을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에 이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어떠한 명예도 없이, 한 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한 가닥의 숨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위해 지금 잃는다면 훗날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때를 위해 지금 작은 이익을 다투지 말고 먼저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께서 매신 십자가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사람으로 사셨던 ‘고행의 삶’입니다. 운명의 십자가, 가난의 십자가, 오해와 배척의 십자가, 배반의 십자가, 박해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 실패와 절망의 십자가, 굴욕과 치욕의 십자가, 고독한 삶의 십자가입니다.
너무나도 버겁고 무거워 언덕을 오르시며 여러번 쓰러지셨습니다. 너무나도 두려웠기에 버리고도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난을 감내하시고 당신이 선택한 그 길을 따라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여기서 멈추셨다면 그 길은 막다른 길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골고다 언덕에서 멈추셨다면 부활의 길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버리셨기에 모든 영광을 얻으셨고 주님께서는 영광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부활로 이르는 길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길은 영광을 얻는 길입니다. 죽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치욕을 통해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더욱 충만하고 완전하고 더 고귀한 것을 얻기 위해 버리는 삶에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지금 잃었다면 다음에는 얻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잃었다면 다음 세상에서는 얻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잃음으로써 신성한 것을 얻을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을 잃음으로써 영원한 것을 얻을 것입니다.
자신을 헌신할 때 비로소 영혼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을 잊을 때 비로소 자신을 만날 수 있으며, 용서를 할 때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죽음에 이를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 나 자신을 버림으로써 저의 행복의 원천이신 주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주소서.
함께 묵상해봅시다.
1. ‘먼저 잃으면 다음에는 얻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는 어떻습니까?
2.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3.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말씀의 실천
1. 만일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멈추셨다면 부활은 없으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버리셨기에 주님께서는 영광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지금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끝까지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힘으로 조금 더 올라가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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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연중 제22주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하느님,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시편63,2)
화답송 후렴 시편이 마음에 절절히 와닿습니다. 오늘 9월3일도 참 좋습니다. 강론 제목도 마음에 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예수님처럼-” 얼마나 멋진 제목인지요! 교황님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몽골을 방문한 교황님에 관한 기사와 글이 가득했습니다. 흡사 풍부한 영적수확물을 발견한 듯 기뻤습니다. “Hoping Together(함께 희망하기)” 방문 모토는 얼마나 멋집니까? 교황은 희망의 순례자와 우정의 순례자로 작은 교회를 방문한다며 넘치는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제43차 몽골 사목 방문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교황님의 이런 분위기는 처음입니다. “스텝지대의 침묵중에 속삭임 소리를 들으라” 촉구하시며, 몽골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처럼 되어라(Be like the sky)” 격려하시는 말씀도 좋았습니다. 몽골 도착후 주교좌 성당에서의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연설에서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라 아쉽게도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540-604) 기념미사를 봉헌하지 못하지만 이 교황은 성 예로니모,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하며 만능의 천재로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참으로 멋진 착한목자 교황이었습니다. 교황을 일컫는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칭호도 그레고리오 교황으로부터 유래됩니다.
위 베드로의 후계자 두 교황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끊임없이 선포함과 동시에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며칠전 수녀원 성사를 드리고 귀원하던중 한 수녀님이 차 안에서 저에게 수도생활중 어느 때가 가장 행복했던지 물었고, 저는 지체없이 “매일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 때와 새벽 일찍 일어날 때”라 답했고 수녀님은 의외인 듯 깊이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거창한 특별한 행복한 일들을 기대했던 듯 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온종일 예수님과 함께 하루의 치열한 영적전투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고, 또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 뵈올 기쁨에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강론을 쓰면서 하루를 새롭게 시작할 때의 행복 또한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대로 하루하루 파스카의 리듬을 사는 행복한 삶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이러하길 소망합니다. 자주 생각나 자주 인용했던 25년전 성탄절에 썼던 시가 생각납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며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물론 당신이 가리키는 바, 제 삶의 전부인 예수님이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시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요? 참으로 믿는 이들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답은 하나 사랑입니다.
첫째,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이자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예수님 사랑이 아니라 한결같은 말씀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빛이요 생명이요 영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살아 있는 현존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 위로받고 치유받는 우리들입니다. 말씀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실현도 불가능합니다. 고난 중에도 힘차게 일으켜 세우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불꽃같은 말씀의 사람이었고 그의 고백이 우리를 격동케 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준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합니다.”
저도 조금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도저히 차오르는 말씀이 미사주례에 관계없이 날마다 강론을 써야 살 수 있게 된 현실입니다. 때로는 “말씀의 수인(囚人)”이라 자탄(自嘆)도 해보지만 날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강론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몸이 된 듯합니다.
둘째,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의 뜻따라 오롯한 사랑으로 살았던 성모님이요 성자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대로 하느님 뜻의 실현이자 하느님의 예스-맨이었습니다. 그 멋진 신앙고백으로 반석이라 극찬을 받던 수제자 바오로가 졸지에 사탄이 됐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잠시 잊고 사람의 일에 몰두할 때 였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실 우리 모두가 사탄의 가능성을 지니고 삽니다. 아니 늘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부단한 영적훈련으로 사탄을, 마음 안의 야수(野獸)를 순하게 길들여야 합니다. 아마 위 예수님의 호된 질책은 수제자 베드로를 평생 하느님의 일에 깨어 있게 했을 것입니다. 어찌 이 충격적 말씀을 잊을 수 있겠는지요!
바오로 사도가 아주 시의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세속에 살되 속화되지 말고 세상을 성화하는 성인의 삶을 살라 하십니다. 시궁창 세속에 뿌리를 두고 있어도 거룩하고 순수한 연꽃같은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지옥같은 세상에서 천국을 사는 성인들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분별의 잣대이자 지혜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부단히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 발휘되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셋째, 예수님 추종을 사랑하십시오.
평생, 한결같이, 끊임없이 예수님 따라 사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해당되는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성인의 길은 이길 하나뿐입니다. 이 주님을 따르는 길은 감정따라, 마음따라, 기분따라 사는 길이 아니라 일편단심 주님따라 사는 사랑의 길이요, 순교자 성월 9월 우리가 기리는 모든 순교성인들이 이렇게 살다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을 따라 살라 촉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사는 길은 순교적 삶,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사랑하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넘치는 은총을 주시어 끝까지 자발적 기쁨으로 주님을 사랑하듯 제 책임의 십자가, 제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주님을 항구히 따르게 할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힘이 되어 주십니다. 끝으로 자주 나눴던 제 좌우명 고백기도문을 다시 나눔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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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연중 제22주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하느님께서
몸소 기꺼이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어찌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나뉠 수 있겠냐마는
어쩌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갈라져 다투는가
서로 사랑함이
하느님의 일이니
서로 사랑함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사랑할 이 미워할 이
제멋대로 갈라놓고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정성껏 품음이
하느님의 일이니
정성껏 품음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좋으면 품고
싫으면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오롯한 섬김이
하느님의 일이니
오롯한 섬김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섬기지 못할망정
섬김 받음에 게걸들려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아낌없이 내어줌이
하느님의 일이니
아낌없이 내어줌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내어주기는커녕
빼앗지 못해 안달나서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더불어 삶이
하느님의 일이니
더불어 삶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내 편 살리고
네 편 죽여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살리기 위한 죽음이
하느님의 일이니
살리기 위한 죽음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살리기 위해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죽임으로써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그러니 사람아 우리
하느님의 일이어야 할 사람의 일을
사람의 일로써 하느님의 일을
신명나게 해보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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