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레오나르디 사제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의 루가 태생인 그는 처음에는 약제사가 되었지만 요한 콜롬비니가 세운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여, 특히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쳤다.
병원과 감옥의 사목활동에 힘을 기울였던 그는 많은 후원자와 협력자를 얻게 되었다.
이때 열리고 있던 트렌트 공의회에선 프로테스탄트가 당당하게 활동하였는데,
요한과 그 후원자들은 새로운 교구 사제회 구성을 계획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3 세로부터 승인을 받고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성 필립보 네리의 도움이 매우 컸다.
이 수도회의 이름은 "천주의 모친 성직수도회"이며, 이탈리아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신앙 전파를 위하여 최초의 사제회를 설립하였으며, 이 사제회를 교황들이 확충시켜 포교성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마땅히 이 기구의 창설자로서 간주되고 있다.
사랑과 슬기로써 다른 여러 수도회의 기율도 바로잡았다. 1609년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다만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왜 내가 그일을 해야 하는 가?" "그것은 내게 무슨 이유인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있음에 대한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요한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이러한 문제에 답했다.
즉 그는 한 인간으로서 사제가 되기로한 것이다.
서품 후에 그는 열심히 사목 활동을 했으며 병원과 교도소 사목에 열성적이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과 표양으로 몇 명의 젊은 평신도들이 그를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도 후에 사제가 되었다.
요한은 종교 개혁과 트렌트 공의회 이후의 쇄신 시대에 살았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교구 사제들의 새로운 모임을 계획했다. 결국 승인은 받았으나 이 계획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심한 정치적 반발을 일으켜, 그는 고향인 이탈리아의 루카에서 추방되어 남은 생애를 타향에서 보냈다.
그는 필립보 네리 성인의 격려와 도움을 받았는데 필립보 네리 성인은 그에게 자기의 숙소를, 그의 고양이까지 덧붙여서 주었다.
그는 1574년 천주의 모친 성직 수도회를 세웠으며, 1579년 교리 연구협회를 만들어 ’그리스도교 교리의 개요’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것은 19세기까지도 사용되었다.
레오나르도 신부와 동료 사제들은 이탈리아의 이익을 위해 큰 힘이 되었으며 그 회는 1595년에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인준했다. 그는 전염병 환자가 내민 손을 잡아 주다가 전염되어 68세에 세상을 떠났다.
창랍자의 사려 깊은 방침에 의해 천주의 성모 성직자회는 15개 이상의 본당은 절대로 맡지 않고 오늘날까지 대단히 작은 단체로 머물러 있다.
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만일 ’크리스토퍼노트’라는 팜플렛을 보아도 많은 일이 있음을 알 것이다.
모든 성인의 생애를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느님과 한 사람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일생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바라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뛰어 넘는다. 우리 각자는 요한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온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시켜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형제 자매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사용할 재능을 각자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헤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루가 12,3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