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문덕수 전국시낭송대회 지정시 원고
화석化石
문덕수
너는 지금 가장 네 안에서 살아나고 있다
만상萬象이 혼연渾然한 네 우주의 내면을 각각
절박하는 구심求心 속 승화昇化한 일체의 목숨이
피어나고 있다
부딪치며 부딪치며 떨어져 언제 일깨일
안으로 현암玄暗히 열리는 절벽을...
겹겹 응고凝固의 누억累億 무늬진 정적을 울려
곤곤히 스며 흐르는 네 혈맥血脈의 강물은
세월을 소리쳐 내닫는 연봉連峰의 아우성을
지른다
숲이며 성좌星座며 바다의 무수한 체온體溫들이
오직 너를 안고 초조히 어울리어 부벼대는
이 냉혹한 용해 속에 천년 암흑을 뒤집는
처참한 네 숨결의 설레임이 어쩌면
사나운 짐승으로 트이거나 애뙨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태풍
문덕수
누가 네 사랑을 견디겠느냐
모두 휩쓸어 끌어안아 보고는
팽개쳐 날려 버리는 수선스런 이 격정을
몰고 온 뇌성雷聲을 터트려 갈기고
폭우를 휘몰아 두들기는
이 가열한 사랑의 엄포를,
누가 네 사랑을 믿겠느냐?
내벌려 물어뜯는 무수한 이빨에
빨간 쭉정이로 익어 가는 들은
구석구석 찔려 뒤적히며
한밤을 고스란히 떨면서 샌 도시는
어쩌다 잘못 건드려
시달리다 시달리다 못해 기진하여
그만 뿌리째 뽑혀 누운 거목은,
짓꺾은 가지에 옷자락을 찢고
미친 듯 달아난 난폭한 이 여인을
누가 달래어 사랑하겠느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봉덕사 대종
문덕수
에밀레
에밀레...
까마득히 녹슬은 음향에 휘감겨
만신萬身을 피 흘리며 목놓아 우는 아가가
여기 천 년을 들어앉아 산다
아련히 부각浮刻된 화문華紋은
뭉게이는 서운瑞雲을 피워 올리며
모두들 깃을 쳐 찬연히 날아오르는데
어린 영혼은
이 비인 골짝에 남아 운다
첩첩 둘리어 묶이는 칠색七色 음향에
돋히는 족족 죽지를 꺾이우고
헤쳐 나오지 못해 뒹구는 몸부림이여!
에밀레
에밀레...
애 터지게 부르는 응답 없는 이름에
피어린 전설이 울린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코스모스
문덕수
저것은
그만 피다 못해
코스모스가 타는 것이다
잿더미가 된 산골에
뉘 떨어뜨린 씨 한 알이
저렇게 멀리 눈부시게 타는 것이다
확확 숨막히는 초연硝煙을 마시고
눈물에 하소 못할 사연을
울다 못해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이다
허물어져 가는 산야山野를 안고
저기 피어려 기우는 하늘 속에
마구 쓰러지고 싶어 타는 것이다
저것은
이제 기다리다 못해
뉘 불살라 올리는 초조한 염원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선에 관한 소묘 1
문덕수
선線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좇는다
어둠 속에서 빛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만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영원한 꽃밭
문덕수
여울에 혼자 다리를 놓는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석벽石壁을 뚫고 있는 사람도 보았다
지금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은
그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곁으로 수천의 손이 모여든다
손등에 손을 얹고 그 위에 또 손을 얹고
그것은 하나의 탑이 된다
마른 나뭇가지에 지푸라기가 걸렸다
그 곁에 바윗돌 몇 개가 굴러와 멎었다
어디서 한 마리의 새가 날아오고
흩어졌던 막대기들이 모랫벌에 박히면서
이내 싱싱한 나무로 뿌리를 내렸다
어디서 또 한 떼의 새들이 춤추듯 날아왔다
깡마른 한 남자가 저리로 간다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린 한 여인이 이쪽으로 온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기적처럼
두 사람은 무엇인가 지껄이고 손짓을 한다
잘 들으면 물소리나 바람소리나 우레 같다
이내 수천의 남녀가 모여든다
개미 떼처럼 손에 손을 잡고 어울린다
그것은 영원한 꽃밭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랑은 어디 있나
문덕수
사랑은 어디 있나
저 시렁 위에
마른 동태의 눈알에
저 신줏神主단지 속에
앙상한 나뭇가지같이
여윈 내 육신을 한순간
번개처럼 번쩍
한 가닥 휘감을 뜨거운 전율은
어디 있나
사랑은 어디 있나
내 심장을
내 허파까지를 도려 내라
그것도 모자라거든 내 내장을
몽땅 끄집어 내어
빨래처럼 쥐어짜 보라
영혼은 어디 있나
실은 그것들은
모두 썩어 가는 나무 토막
삭고 녹스는 쇠가시
꼬이고 얽히는 지푸라기들,
사랑은 어디 있나
저 주검을 번쩍 눈뜨게 할
저 무덤을 열고 벌떡 일어서게 할
저 허우적거리는 지옥의
팔들을 덥석 잡아 끌어올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바위
문덕수
꽃보다도
구름보다도
그리고 거울보다 더 맑은 호수보다도
네 마음속의
그 숨 쉬는 바위가 그립다
뜨거운 눈짓의 여울에서
헐떡이며 소용돌이치는 숨소리에서
그리고 북받쳐 미친 듯 뛰는 맥박에서
네 마음속의
그 싸늘한 바위가 그립다
어여차 물굽이를 휘젓는 노에서
이러 쯧쯧! 묵밭을 일구는 땀 밴 보습날에서
그리고 슬픔의 굽이굽이를 넘는 느긋한 미소에서
네 마음속의
그 움쭉 않는 바위가 그립다
눈부신 별빛보다도
값진 오색 보석보다도
그리고 드높은 하늘나라의 황홀한 궁궐보다도
네 마음속의
그 푸른 이끼 앉은 바위가 그립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해마다 6월은 와서
문덕수
온몸에
빗발 같은
총알이 날아와 박힌다
그
병사들의
아직도 잠들지 못한 그 병사들의
마지막 숨으로
마지막 눈빛으로
오늘 나와 저 나무들의 맥박은
뛰고 있다
소련제 캐터필러에
그 포화에
깔리고 혹은 불타고
그리고 쫓긴 보따리들이
열차를 좁은 길바닥을 메우고
시체가 또 시체를 덮는
목멘 아우성,
그 영원한 혼령의 울음이
오늘 나의 핏줄
저 역사의 강물로 흐른다
내 팔을 다오
내 눈알을 다오
내 다리, 내 허벅지, 내 늑골을 다오
떨어져 나간
한쪽 팔의
한쪽 눈알의 행방을 좇으며
이마의
옆구리의 상처는
증인證印처럼 남아서 앓고 있다
신음은
아직 우리가
총대를 내린 것이 아니며
철모를 벗은 것이 아니라는
절규다
온몸에
빗발처럼 총알이 박히듯이
해마다 6월은 와서
빨간 꽃은 피고
푸른 숲은 우거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어부와 그의 아내
-불교 설화에서
문덕수
오늘 짐작으론 큰 고기 많이 잡힐테니
마을 사람 우르르 몰려와 손 벌리겠군
그렇지, 암 좋은 수가 있지 좋은 수가
여편네야 넌 아무나 찍자 좀 붙으렴
사람들 싸움판에 몰리도록
낚시줄 휙 던졌다 끌어당기니
첫 물에 큰 놈이 물렸겄다
당겨도 낚싯대만 휘어 끌려오지 않으니
전갈을 받은 그의 아내
옳다, 마가리 한 마리 물렸겠군
다라수 잎사귀 귀에 달고
한쪽 눈꺼풀에만 꺼먼 먹칠을 하여
개 한 마리 안고 길거리로 나서니
지나가던 한 아낙네 그 꼴 보고
저 여편네 꼬락서니 정말 미쳤군
뭐 미쳤다구 내가 왜 미쳐
머리채 휘몰아 잡아 틀고 이년저년 맞붙으니
동네 사람들 우루루 몰려들구나
남 보고 괜히 미쳤다구, 재판소 가자
창피해서 못 가겠다, 왜 못 가
나으리 나으리 우리 나으리마님
이년이 날 미쳤다고 욕지거리해요
일부러 미친 꼴 하고 나왔어요
네 그 꼴 정말 요글요글 메스껍군
두말 말고 여덟 푼 벌금을 내라
어부는 물속을 절버덩 들어가 보니
이건 윗물에서 떠내려 온 나무토막
낚시라도 빼내려고 이리저리 굴리니
가시 같은 가지 끝에 그만 눈이 찔렸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길에 관한 에세이
문덕수
길은 외롭다 불안하다 두렵다
길은 홀로 끝이 없다 동서남북이 없다
스스로 벌레처럼 고불딱고불딱 별을 더듬고
헤매고 닦는다
산토끼가 놀라서
혹은 천진스럽게 뜀박질한 숲 속의 발자국을 찾아
길이 난다, 서둘러 그 길에 아스팔트를 깔지 말라
징검돌을 놓아 냇물을 건너고 칡덩굴처럼 산등성이를 휘감아
넘어가며 자국이 남는다 그 자국에 쇠사슬의
논리를 깔지 말라
사냥꾼이 나무틈으로 고개를 살며시 들다간 별안간 띄는 컴컴한 숲 속에서
넓은 잎사귀를 펴어 초가지붕 위나
토담을 덮고 뻗는 호박덩굴 박덩굴 같은 길
쟁기를 메고 소를 몰고 가는 지친 저녁의 논두렁길
구불떡 구불떡 오므라졌다가는 쪽쪽 펴 보는 지렁이 같은
그 길 위에 서둘러 싸늘한 궤도를 깔지 말라
길은 모래밭에 묻힌다 정글 속에 사라진다 백병전에서 죽는다
고뇌와 빈곤과 기아와 슬픔에도
죽는다 횡단보도는 차에 깔린다
차와 차 사이의 틈을
비집는 길도 결국은 죽는가
전쟁의 불끝이 옮은 종로2가 비둘기들의 빨간 발가락에서
데모의 깃발자락에 붙어 펄럭이다가 찢기는 구호 속에서
새벽 이슬을 받은 달팽이의 반짝이는 더듬이에서
이브를 꾀어 낸 길은 꽃뱀처럼 살아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유화柳花의 노래
문덕수
유화여 그대 신화의 지진地震 속에서
닷되만 한 큰 알을 낳았지
이를테면 삼국유사나
대고구려만한 것,
기원 전 땅 속의 뿌리 자위는 보이지 않는 법
꽃과 열매를 풍성하게 꾸밀
가지를 사방으로 고루 나누어 벌리고 서 있는 건
비류수 위 첫 길목의 느티나무
그 곳 땅 위의 첫 집 세우니라
쑥 한 줌 마늘 스무 알 먹고 잘 삭여
곰에게서 사람으로 태어 난
미세스 아니 미스코리아,
종로나 광화문을 콱콱 숨막히게 덮는
화염병이나 쇠파이프의 앙칼스런 구호가 아니라
유화여 그대 심장 속에서
시뻘겋게 달구어지고 있는
시우쇠 자유 민주주의니라
유화여 그대 어디 있느냐
우발수優渤水는 구릿한 중금속 폐수 거품으로 덮이고
물고기 떼는 죽어서 강가 돌바닥에 허옇게 널렸다
그대 수밀도처럼 보송보송한 맨발로 거닐던 그 강가의 옥돌도
허연 폐놀로 부글거리는 세제로 덮여 썩어 간다
어디 있느냐 유화여
도둑맞은 피라밋 속은 텅 비어 있고
카이로 박물관의 남은 선반 위의 미로에도
그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나
지금 포크레인이 산허리 산기슭 바닷가 구석구석을
파헤쳐 고층 빌딩의 정글은 얽히고 있지만
그대 잠시 숨돌리며 거닐 곳은 없네
그대를 비친 고구려의 첫 햇빛은
어딘가에 그대로 있건만,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에는
클론 비둘기 떼만 구구구 몰려다니고
세오녀, 어딘지도 모를 연오랑을 찾아나서듯
그대는 둥둥 동해 물이랑을 넘고 있는 바위에 실렸나
콜럼버스의 산타마리호를 타고 파로스항을 떠났나
임란으로 불타고 있는 합천 해인사의
그 뜨거운 불꽃무늬 수놓은 열두 폭 치마를 두르고
어쩌면 고구려의 새벽빛 같은
방사선에 노출된 그대 포등포등 알몸에는
그래도 한 알의 신화를 배고 있으리
히로시마에 나가사키에 죽음의 잿더미를 뿌린
그런 층진 꽃버섯구름 속에서도
그대는 끄덕없이 잉태하고 있으리
태백산 기슭 한 자리에 삶의 터를 닦던
첫 삽날의 번갯불 번쩍임이
양산 밑 혹은 곤연鯤淵 샘물 가에서
칙칙한 어둠을 걷어내고
크레물린, 백악관 복도의 기침소리도 잠재우고
분단의 철조망 가시들이 모두 한 자루씩 촛불로 싹터 타오르리
유화여 그대 알몸의 지진 속에
한 알의 신화는 잉태하고 있으리
길가에 버려져도 우마가 피하고
어디서 백마는 와서 하늘로 고개 들고 선 꿇어앉아 절하는
닷되들이만 한 큰 알을 잉태하고 있으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집짓기
문덕수
이 폐허의
이 종점
방황을 끝내고 집 지으리
절망 슬픔 분단 반 세기의 소용돌이로
지우고 긋기를 되풀이 한
그런 설계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 할아버지들이
화살 들고 칼 휘두르며 말타고 달리며 다진 고구려 땅
저 산맥들의 힘줄을, 저 광야를 뚝 잘라 떼거나
몰려와 몽탕 삼키려는 저 원수를 막아
아니면 위성을 띄워 달나라에 가서라도
여기는 내 주권이라고 외치면서
터닦아 무쇠 말뚝 박으리
진도의 회동리, 모도리의 바닷길 같은
한반도의 은하수 길을 건너
너는 구슬 바위를 깎아
밀림처럼 기둥들을 세우고
나는 피와 살 짓이겨 일천도 불 속에 꽃떡 같은 벽돌을 빚으리
문이야 어디든 큰 성좌 있으리
이를테면 현해탄의 물밑 속으로
독 안 같은 잔잔한 서해 연안을 한 바퀴 돌고
태평양의 험한 너울의 씨줄 날줄로 다시 엮는 뱃길로
아무르 강을 건너 표범의 포효 따라 시베리아의 눈길도 엮어
혹은 배산背山과 안산이 맞붙은 내 어린 날의 고샅길로
기둥 하나에 꿈을
도리 하나에 정의를
창문마다엔 정의를
마루에는 평등을
복도에는 꿈을
그득그득 고여 넘치는
그런 집 지으리
푹푹 솟는 뜨거운 땅 기운을 들이마신 그리스의 한 젊은이
그만 현기증 나서 어질어질 취해 춤추듯 뛰다가
죽은 듯 픽 쓰러져 버린 그 자리에
그리스 사람들이 아폴로 신전을 세웠듯이
혹은 사소娑蘇의 소리개가 날아가다 머무는 곳
아니면 우리 첫 할아버지의 삽날이
번갯빛으로 번쩍 하던 곳 찾아 궁궐이든 움막이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목이라고
문덕수
5백년
1천년
고목이라고 늙었다 하지 말라
두 팔을 힘껏 벌려 안아 보라
5대조나 13대조쯤으로 생각하고
안 되거든 몇 걸음 물러서서
발돋움하여 머리 꼿꼿이 세워
태초의 신비
그 투명한 신화가 소용돌이치는 우듬지를 바라보라
이 산골
한 나라 한 세계의 입구 같은 길목
가만히 지키고 서서
임진년 불길 속에서 다시 싹이 트고
일제 식민지 암흑 속에서 가지를 펴고
분단의 수난 그 포화 속에서 더욱 무성하게
강철보다 더 튼튼하고 우람하게
잎새 하나에 우주의 하중荷重을 담았네
5백년을
1천년을 늙었다 하지 말라
하늘 한 복판에 닿은 이 무한 수직의 경관
동해와 서해를 거느린 무한 공간의 한 드라마
피라밋처럼 한 층 한 층 다지며 아슬하게 높이 쌓아 올린
그 미지의 미로迷路에 와서
학이 머물든
구름이 있다가 지나가든 그저
초월이라고 생각하든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영원한 것이 있다면
문덕수
버스는 버스인 채
녹슬지도 추락하지도 않나 보다
그만한 공간의 그만한 나이 또래들이 치마를 두르고 넥타이를 매고
백 년 전처럼 죽지도 않고 창가에 앉고 혹은 서서
조금 더 빠르게 혹은 느리게 불안처럼 흔들리면서
타고 내리고 타고 내리면서
쾅 쾅 콱 타탕 폭발이 치솟고
버스 승용차 트럭이 뒤엉겨 불타는 그런 순간이
단테의 지옥에도 없는 아수라장이건만
엘리베이터에는 죽음이 없나 보다
무덤 속만 한 공간의 그만한 인생들이
늙지도 젊지도 않은 채 2백 년 전 그대로다
움막 자리에 2층 양옥이
그 양옥이 무너진 뒤의 36층 빌딩이
그 빌딩 폭삭 내려앉은 자리에 우주정거장이
집은 집인 채로 영원한가 보다
엄마 저것 봐 까치 집
그 느티나무 밑의 여름 휴식은
폼페이의 폐허처럼 남으리
그리고 예수님 말씀처럼 사랑과 미움도 남으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운명
문덕수
내 곁에 생선장수 아주머니가 앉는다 향수香水보다 진한 속초나 군산 부둣가의 비린내와
묵은 땟자국 같은 내 백묵가루 냄새가 어울려 한동안 부부처럼 앉는다 같은 버스 같은 속도
같은 소음 속에서 흔들린다 20세기의 마지막 흔들림처럼
나는 아무 말도 못한다 식솔이 몇이냐 얼마나 버느냐 이런 물음의 충동이 목구멍에 걸리고
이내 내 심장의 뜨거운 고동이 된다 아주머니 아니 그녀와 벙어리처럼 앉은 나는 두 개의
절벽 두 개의 고도孤島다 이윽고 그녀의 체온이 영하 15도의 겨울인데도 후끈후끈 내 옆구
리에 와 닿는다 내가 내뿜는 부연 숨결이 그녀의 호흡이 된다 나는 비린내 몰씬몰씬 풍기는
그녀의 감정의 물속을 항해하는 작은 배가 된다
한 시대의 버스가 모통이를 돌고, 신호등 앞에 서고, 중앙선을 넘어설 듯 피하면서 몇 번이
나 아슬아슬 고비를 넘긴다 절벽을 굴러 떨어져 같이 죽고 부딪쳐 화염에 싸이는 폭발도 있
지만, 다행히 그녀는 수산시장 근처에서 내리고 나는 한동안 혼자 흔들린다 그러나 실은 날
마다 우리는 한 버스에 타고 있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휴전선 연구 4
문덕수
새야
새벽마다 내 창가를 은밀히 찾아와서
깊은 잠을 깨우는
찌찌 찌짹 찌짹 찌짹
휴전선 분계선
철조망에 지새다가 왔느냐
어느 날 백령도 바윗돌 벼랑의 틈에
깃을 치다가
아산만 흑산도를 거쳐 진도로 내려갔다가
임진년 울돌목 물길 따라 명량 한려수도를 빠져
울릉도 독도를 휘어 도는 물굽이를 더듬으며 몇 바퀴 돌고
부침浮沈하는 바위 끝에 머물러
끼룩끼룩 철철철 철철철
압록강 물소리로 울어라
두만강 목쉰 물소리로 울어라
새야
동서로 뻗은 한반도의 군사분계선
그 철조망에 걸려
죽지 찢겨 핏방울 뚝뚝 듣는 새야
너는 날아야 한다
그 철조망 가시 더미를 뽑거나 꺾고
남북을 뚫으면서
새빨간 심장이 맨드라미꽃처럼 삐죽이 터져 나와도
울어야 한다
새야
저 아슬한 신시神市의 숲길로 때로는 거슬러 올라가
첫 삽 들어 묵밭을 일구고
꽃밭처럼 나라를 앉히던 같은 어깨 위에
고운 날개를 퍼덕이던,
새야
그 날의 지진地震의 용암은 물 밖으로 밀어내고
풀 한 포기 남지 않는
한반도 새까맣게 불타버린 잿더미일지라도
겹겹 오색의 구름보 속의
볼록볼록 금빛 꿈의 낟알 같은
소망의 해를 물고 올 새야
북방 한계선 그 철조망 녹슬고
남방 한계선 그 철조망 삭을 때까지
번개처럼 넘나드는 그 비상飛翔
그대로 폭발할지라도
더 높이 더 빠르게
날아야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독도 소묘
문덕수
독도는 동쪽 물끝 한 점 바위섬이네
첫 유인원 우리 할아버지 문득 허리 근지러워
두 앞발 걸쳤다가는 그대로
뒷발꿈치에 힘 쏠려 허공으로 벌떡 일어섰을
그 바위네
백두대간 꿈틀거릴 때 한 덩이 뚝 떨어져
물밑 길 열며 토글토글 굴러가다가 울릉도 너머
꾹 눌러 참았던 숨 한번 크게 내뿜은
그 바위네
쉼 없이 풍랑은 바둥바둥 영겁을 숨 쉬고
온몸 헐 뜯겨 더욱 실해진 그 몰골
되려 물속으로 더 깊이 내리고 사리어 우뚝 솟아
지우지 않네
물거품 물비단으론 안팎 구석구석 씻고
먼 수평, 비바람, 무한 모두 거두어 길들이고
끼룩 끼루룩 갈매기들의 춤 빙빙 기르면서 제자리
올연히 지켰네
녹색 풀뿌리 돌비탈에 깔고
어둠 속 쭈삣쭈삣 창날 세우는 파수꾼
그리고 맨 먼저 이 땅의 새벽을 여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마산에 가고파
문덕수
젊음의 꽃가루 뿌린 마산서 나는
다시 태어나 우체부 되고 싶다
겹겹으로 거른 남해의 바람과
무학산 골짝에 뿌리내린 기운
육이오에 뼈뚫고 피 쏟아 힘없는 발심
월영동 오동동 산호동 뒷골목길을 우체부 가방 메고
헤매고 싶다
칼칼하면 몽고정 물 한 모금으로 족하고
땀 밴 옷 홀랑 벗어 애들처럼 다 내어놓고
합포만에 알몸 던지리
저만치 돌섬을 헤엄쳐 네댓 번 안아 보고
중앙부두 쯤에선 그날의 의거의 발자국을 따라
우체부 가방 덜렁거리며
남성동 비탈길이 다 닳아 내려앉도록 오르내리리
내 꿈의 무지개 마산서
우체부로 떠돌고 싶다
바랑 같은 가방을 메고
보낸 이 받는 이 없이 덜렁덜렁
허공의 마술처럼 비어 헛배처럼 불룩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는 어디로
문덕수
시는 어디로 갔나
앞에서는 높은 빌딩들이 줄줄이 막아서고 뒤에선
인터넷의 바다가 출렁이고
머리 위 번개처럼 가로지르는 핵탄두 미사일
인도의 새끼코끼리 귀만한
광화문 네거리 플라타너스 새 잎사귀에 머물렀나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3층 완구점에서 내려
파란 스웨덴 인형의 눈알 속에 숨었나
핸드폰 뚜껑 속 번호의 유령
리모컨으로 조종하면
스크린에 알록달록 빈 그림자들이 뜬다
시는 어디로 갔나
서울역 앞 지하에서 너끈히 사흘을 굶은
풋내기 노숙자들의 체중에 휴지로 밟혔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예삿일 아니지
-아내에게
문덕수
남의 원고 먼지나 털며 주름 늘더라
주어 술어 부사어 바느질하듯 꿰매어 보고
잉크 지질 체재 꼼꼼히 맞추어보며 마르더라
시달린 두 눈의 핏발 노을빛이더라
땡전 한 푼 없는 허울 좋은 사장님
등 뒤에서 하나님은 늘 시 쓰시더라
집일 수발 허드렛일 수북이 쌓이더라
남편 퇴원 때 구상 선생 말씀대로
무 무청 당근 우엉뿌리
햇볕에 잘 말린 날표고버섯으로
덜그럭 딱딱딱 쟁그랑 피 피익
푹 삶고 끓이고 다시 고우더라
부처님은 등 뒤에서 늘 눈 감으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