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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팔미도
팔미도는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에 딸린 섬으로, 면적 0.076km2, 해안선 길이 1.4km, 인천항에서 15.7km, 무의도에서 약 9km 떨어져 있다. 섬의 유래를 보면 섬의 남쪽과 북쪽이 모래와 자갈로 연결돼 마치 “여덟 팔(八)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와 같다고 해서 팔미도라 불려졌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등대
100년 이상 밤바다에 배들의 길잡이가 되어 준 팔미도 등대, 참으로 고마운 존재이다. 어둠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나타나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는 오아시스와 같은 귀중한 존재가 팔미도 등대이다. 팔미도의 등대는 국내 최초로 1903년 6월 1일에 건설된 근대식 등대이다. 이 등대가 불을 켜기까지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1883년 인천이 개항을 했지만 우리나라 바다에는 등대가 하나도 없었다. 바다를 멀리한 민족이기에 등대에 대한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팔미도 등대가 세워진 시기는 1903년이며 인천항이 개항된 1883년 일본과 서구 열강들이 수도의 관문인 인천항을 자유롭게 드나들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삼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인천항은 간만의 차이가 11m로 매우 심한 데다 수심이 얕고 해안선이 복잡해서 항구로써 기능을 갖추지 못해 입출항 자체가 매우 어려웠다.
일본제국은 을사늑약을 맺기 2년 전에 일본의 선박들이 인천항을 오고가는데 암초에 부딪히고 해난사고를 자주 겪자 조선정부에 ‘통상장정(通商章程)’을 들이대며 등대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이에 정부는 인천항구로 들어오는 관세수입의 일부를 가지고 건설비로 충당해 1902년 5월 등대건설을 시작했다. 이 등대 공사는 탁지부 산하 해관등대국이 맡았는데 이 무렵 팔미도 등대를 비롯하여 소월미도, 백암등표와 함께 바닷길 요소에 건축을 착수했다.
팔미도 등대는 1903년 4월에 준공되었고 6월 1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점등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등대이다. 일본은 대한제국 시대에 한반도를 침탈하기 위해 바다에서 배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여러 곳에 등대를 세웠다. 그 중에 하나인 팔미도 등대는 해발고도 71m인데 여기 정상에 세워진 등탑은 높이 7.9m 지름 약 2m로, 불빛은 10km 밖에서도 식별할 수 있게 했다. 맨 처음에는 90촉광짜리 석유등을 이용하여 불빛을 만들었다. 일본은 이 팔미도 등대를 노일전쟁에 이용했다.
그 동안 등대 광원은 램프에서 전기로 변했고 2003년 12월에 등명기 불빛이 국내기술로 개발되어 프리즘렌즈 대형 회전식 등명기로 50km까지 비추며 10초에 한번씩 번쩍인다. 지금도 인천항에 들어오는 외항선과 대형 선박들은 팔미도 근해에서 정박해 있다가 도선사들이 그 배를 끌고 입항한다. 그때 이 등대는 배들에게 위치를 확인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100년 전인 그 때만 해도 전기가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 어두운 밤에 불빛은 도깨비 불빛밖에 없었다. 무인도인 팔미도 섬 꼭대기에 밤마다 켜는 불빛을 도깨비 불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등대를 통과하는 우리나라 배들은 돛단배, 똑딱선이 대부분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선, 여객선, 군함, 10만톤 급 유조선 콘테이너선 등으로 크게 발전했다. 비록 팔미도 등대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 프랑스 기술자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조선인 근로자들이 이곳에 와서 대한제국의 이름으로 일을 했다. 팔미도 등대는 등대지기 노래처럼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는’ 감상적인 불빛은 아니다. 일본과 외세의 침략자들의 야간 뱃길을 인도했던 ‘제국의 불빛’이었지만 지금은 인천항을 출입하는 모든 선박들의 안전운항을 위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이렇게 팔미도 등대는 어느 등대보다도 아픈 역사를 담고 태어났다.팔미도 등대는 비록 2002년에 기존의 등대를 마지막으로 사용하고 지금은 새로운 등대가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 등대는 바닷물에도 부식되지 않게 콘크리트와 함께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해양건축의 효시라는 할 수 있는 이 등대를 높이 평가해서 인천시는 2002년에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이제는 문화재가 되어서 예전의 등대 모습 그대로를 방문객에게 보여 주고 있다. 새롭게 건축된 등대 안에는 홍보관이 있는데, 2층은 등대의 역사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디오라마 영상관’이 있고, 3층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발달해 온 등대의 변천 역사를 볼 수 있는 ‘항로표지 역사관’이 있다. 4층은 ‘등탑계단’과 ‘하늘정원 전망대’ 등이 있다. 전망대에서 인천 시내와 무의도, 실미도, 영흥도, 대부도 방아머리, 시화호의 방조제 일대를 바라볼 수 있다. 팔미도의 관광 코스는 선착장 → 천년의 광장 → 야외 문화공간 → 대한민국 최초 등대 → 최첨단 등대전시관 → 산책로 트래킹코스이다.
매년 9월 15일은 한국전쟁의 인천상륙작전 기념일이다.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더라면 한국전쟁은 북한 김일성의 승리로 끝나고 오늘날 한반도 전체는 공산주의 세습독재 밑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그만큼 역사적인 가치가 높은 사건이다. 이 역사적 작전에서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에 1950년 9월 14일 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불을 켜서 상륙함정들의 길잡이가 되어 준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 해군 소령 연정과 육군 대령 계인주와 미 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Eugene Clark · 당시 39세)를 주축으로 한 특공대원들이었다고 클라크 대위의 유고(죽은 뒤 발견된 글)에서 밝혔다. 오전 1시 50분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히면서 잠시 후 군함 261척과 7만 명 규모의 연합군이 월미도로 밀려들었고,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다. 그는 ‘팔미도에 불이 들어왔을 때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의 지시를 받아 팔미도에 잠입, 인민군 15명을 물리친 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켰다.
인천상륙작전 후에도 연정 소령은 클라크 대위와 함께 북한 서부해안 일대에서 한국 KLO유격대원 150여 명을 지휘하여 해안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고 압록강까지 가서 중공군의 남하 사실도 가장 먼저 탐지해 본부에 타전했다. 그는 동부전선으로 이동, 원산지역에서 발생한 페스트환자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샴즈장군을 모시고 적진에 잠입하여, 시신을 확보하여 페스트가 아님을 본부에 알렸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클라크와 연정은 미군 최고 영예인 Silver Star(은성무공훈장)를 각각 받았다.
그 후 연정중령은 대령으로 예편하고 미국 LA로 이민가서 2002년 77세로 별세했다. 1973년 '캐논기관으로부터 드러난 증언'이 일본어로 발간되어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2021년에는 '6.25전쟁 비화-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가 한국에서 발간되어 큰 호응을 받고 있다.
클라크는 1966년 중령으로 퇴역,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주에서 살다가 1998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가 죽은 후 가족들은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가 쓴 수기를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전쟁 중 그의 경험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어서 가족들이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2000년 MHQ(Military History Quarterly/계간(軍史)) 잡지에 토마스 훌레밍이라는 군사전문 저술가가 유진 클라크 대위에 관하여 쓴 글을 클라크의 미망인과 자녀들이 우연히 읽고 고인이 남긴 수기를 토마스 훌레밍에게 보냈다. 훌레밍은 그 글을 읽고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학적 가치도 있다고 판단, 유명한 출판 그룹 Penguin 계열사 Berkley 출판사를 통해 'The Secrets of Inchon (인천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2002년에 출판, 호평을 받았다. 시카고 썬 타임즈 신문은 “헐리우드 영화제작자들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스릴에 넘치는 실화다.”라고 격찬했다.
심 산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