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61
4월15일[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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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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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tvfLIy7kXk (신희섭 암브로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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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은 죽음의 체험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는 반드시 선행 조건이 하나 따라붙습니다. 부활하시기 전에 반드시 수난과 죽음을 통과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피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수난과 죽음의 과정을 기꺼이 수용하고 넘어선 이후에라야,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 앞에 보인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에 비해 그분 부활의 최초 목격자이자 부활의 증인이 된 마리아 막달레나가 보여준 모습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부활 앞에 사도들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반드시 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한둘도 아니고 일곱입니다. 이 말은 완전 마귀 들렸다는 것, 구제 불능, 치유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 마귀들의 횡포로 인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살아생전 일종의 작은 죽음 체험을 많이 한 것입니다. 혹독한 병고로 인한 작은 죽음 체험, 무시무시한 마귀의 횡포로 인한 작은 죽음 체험, 주변 사람들의 멸시와 홀대로 인한 작은 죽음 체험...그녀는 매일 죽음과 맞닿은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역설적이게도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평범한 하루하루의 일상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깊이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따뜻하고 자상한 예수님 자비의 손길로 일곱 마귀로부터 해방된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죽음이 어떤 것인지? 반대로 참삶이 어떤 것인지? 부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마리아 막달레나는 신비와 베일로 가득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열두 사도를 비롯한 다른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고, 선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네 일상 안에서 거듭 반복되는 작은 죽음의 체험을 보다 호의적이고 낙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작은 죽음들을 기쁘게 수용하고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다양한 유형의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뜻하지 않은 병고에 시달리는 것, 하루하루 노화되어가는 것, 죽음이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 참담한 실패,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받는 배척과 상처와 굴욕...
이 모든 역경들, 작은 죽음의 체험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열쇠요 도우미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영광에 깊이 참여하고, 하루하루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면 가장 좋은 비결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일상 안에서의 잦는, 그리고 성숙한 죽음 연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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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100q1hmz_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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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재 모습은 내가 속했던 공동체의 믿음이었다>
어느 공동체든 그 공동체를 유지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 결속력은 결국 ‘믿음’입니다. 만약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교회는 금방 해체되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복음처럼 믿지 못하는 사도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들이 부활을 믿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고 싶으면 그 공동체에 속하고 더 믿고 싶다면 그 공동체의 핵심 요원이 되면 됩니다. 만약 제가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지금보다야 예수님 부활 체험이 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가 당신 부활을 전하도록 더 큰 확신을 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암행어사를 파견하려면 마패를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세계적 싱어송라이터가 된 에드 시런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눈 주위의 커다란 점을 수술하였는데 마취하는 것을 잊어버려 청각 장애, 사시 현상, 심지어 말더듬증 현상까지 생겼습니다. 가뜩이나 빨간 머리와 커다란 안경 때문에 아이들에게 놀림감이었는데, 이젠 누구 앞에서도 감히 나설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시켜주었던 음악이었습니다.
에드 시런이 평생 말더듬이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절망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래퍼 에미넴의 음반을 선물해 주었고 에드 시런은 1년 동안 그의 음악을 달달 외우고 따라 하며 말더듬증을 고쳤습니다.
아버지는 또 그가 아이들 앞에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고 아일랜드 출신 싱어송라이터, 데미안 라이스 공연을 보여주고는 술집에서 에드 시런에게 그를 만나게 주선해주었습니다. 이때 자신도 그러한 싱어송라이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됩니다.
좁은 물에서 놀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에드 시런은 학교를 그만두고 런던으로 올라와 길거리에서 생활하며 공연했습니다. 4년 동안 굶고 길거리에서 자며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그는 그때마다 자신과 작업을 하자는 무명 가수들을 만납니다. 그들과 같이 작업을 하며 영국에서 점점 인지도를 쌓아갔습니다.
그러다 영국도 좁다고 생각하고는 미국 할리우드로 건너갑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노래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라디오 디제이 하던 제이미 폭스를 찾아갔는데 그만이 그의 음반을 들어주었고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아봅니다.
제이미 폭스는 에드 시런을 자기 집 소파에 재우면서 자기 공연의 객원연주자로 출연시킵니다. 그렇게 에드 시런은 미국에서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제이미 폭스는 에드 시런이 정규 앨범을 내는 것을 도와주었고 이는 미국과 영국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
정규 앨범을 들은 미국 대스타가 있었습니다. 당시 호주에서 공연하고 있던 테일러 스위프트였습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에드 시런을 불러 함께 곡을 만들고 그가 2집을 내는 것을 도와줍니다. 테일러 스위프트도 어렸을 때 따돌림당했던 같은 기억이 있기에 둘은 서로 잘 통했습니다. 어쩌면 깜짝 스타로 머물 뻔하였던 에드 시런은 테일러 스위프트를 통해 대스타로 성장합니다.
그에게 마지막 방점을 찍어준 사람은 지금의 그의 아내 체리 시븐입니다. 체리 시븐은 학교 동창으로 오래전부터 알아 온 사이였습니다. 에드 시런은 그녀에게 집중하기 위해 모든 SNS를 끊고 그녀와 여행을 떠납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뒤 갑자기 낸 정규 3집은 드디어 빌보드 1위를 하며 모든 곡을 20위 권 안에 들게 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에드 시런은 분명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믿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주는 대상은 공동체입니다. 내가 어떤 공동체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 공동체가 주는 믿음만큼 우리는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유학을 9년 했는데 저 자신도 모르게 그쪽 문화에 적응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였습니다. 직설법만을 고집하던 유럽 문화의 사고방식에 젖어 돌려 말하는 우리나라 말에 적응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동체에 머물면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그 공동체의 정신에 스며들고 변화하게 됩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부활을 확실히 믿고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에 머물면 그리고 내가 그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끼기만 한다면 그 믿음이 스며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공동체가 믿음을 가지기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현세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고 싶으면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안 믿어진다면 착하게 되게 위해서라도 믿는 공동체에 들어가 머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 어디에 머물고 싶습니까? 당신은 인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공동체, 혹은 인간이지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공동체, 아니면 당신도 하느님 자녀이니 당신도 부활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주는 공동체 중 어느 공동체에 머물고 싶습니까? 그 공동체의 믿음대로 우리의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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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모님도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도 아니었기에 그냥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도 큰 뜻이 없었습니다. 그저 남들이 가는대로 따라가는 편이었습니다. 고등학교는 공고에 가서 취직하려고 하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준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전거를 갖고 싶은 욕심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성적은 17등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자전거가 눈앞에 있었습니다. 드디어 9등을 했고,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저를 의심하였습니다. 제가 커닝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콩 심은데 콩이 나와야 하는데 팥이 나왔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서운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커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성적을 받았습니다. 그제야 친구들도 저를 의심하지 않았고, 선생님도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 저는 성적이 오른 것도 좋았지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드러난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편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보고 믿지 않았습니다. 나자렛에서 그런 예언자가 나올 리 없다는 편견입니다.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표징과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편견입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인종과 학력에 대한 편견도 많았습니다. 둘째는 진실을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손등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태도입니다. 거짓과 모함으로 진실을 덮으려 합니다. 진실이 드러날 경우 그동안 가졌던 특권과 특혜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진실을 감추려합니다. 독재정치가 있는 곳에서도 진실을 감추려합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거짓된 예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모두 진실을 덮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시기와 질투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엘제블의 힘을 빌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왔다고 모함했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숨기려는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진실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편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한 번의 설교로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늘어난 신자가 3000명이 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감추려했습니다. 제자들이 보여준 표징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감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기와 질투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고, 죽음으로 내몰았으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 소문의 시작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시금 제자들의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자신들의 권위가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서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여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믿지 못하였습니다. 편견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들 또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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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6,9-15: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주간 첫날이며 바로 주일이다. 만물이 빛에 휩싸인 날이다. 이날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여인은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되며 은총의 전달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전에 미리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제자들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스승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빵을 떼어 나누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체험한 일을 전하였는데도 그 말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는 그런 완고함을 보인다.
수난 하시기 전, 그들과 함께 계실 때 당신은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신 다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다 알려 주셨지만, 그분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그들의 기억을 송두리째 없애 버렸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을 보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분의 가르침도 잊어버리고 부활을 기대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사도들이 스승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신앙이 없음을 책망하신다. 예수님과 그토록 가깝다고 하는 제자들까지도 아마 주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다.
이렇게 부활 사건은 하나의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불신과 주님의 책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받아들인 부활의 신비를 이제 전하도록 선포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제자들의 신앙이 비록 약하였으나 주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의 신비를 온 세상에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고통과 죽음을 불사하면서 이 부활의 신비를 전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되었다.
신앙이 약한 제자들이었음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시고 구원을 전하게 하셨다. 이제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감사하면서 사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비록 나 자신의 신앙이 강하지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같이 나를 당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하도록 노력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비록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부활의 신비를 알고 있는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이 언제나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 기쁨을 증언하며 살아가는 기쁘고 복된 신앙인의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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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에 우리는 마르코가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를 듣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시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습니다(16,9-11 참조).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시골로 걸어가는 두 제자와(16,12-13 참조), 식탁에 앉아 있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16,14-18 참조). 빈 무덤 이야기(16,1-8 참조)에 이어 등장하는 이 세 개의 발현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의 ‘긴 결말’(16,9-20 참조)에 속하는 부분으로, 다른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부활 발현 이야기들(요한 20,11-18; 루카 24,13-35.36-49 참조)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불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사건을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에게 전하였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시골로 가는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에 관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그들도 이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셨지만, 열한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목격한 이들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전해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결단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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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기에,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받아들이며, 예수님의 전 생애를 받아들이고, 그분 삶의 모습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주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자신이 본 것을 말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날 오후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도 다른 제자들에게 와서 알리지만 그들의 말도 믿지 않습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불신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사랑을 따라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사랑이 마침내 승리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만하고 누리고 싶으나, 삶에 그 고난을 받아들이기에는 우리가 아직 완고한 것은 아닐까요?
어느 신부님이 마르코 복음서에 관한 글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길은 정해 놓고 몇 년만 고생하면 끝나는 것이 아닌 힘든 길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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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가 목격됩니다.
"듣고도 믿지 않았다.“(마르코 복음 16장 11절)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마르코 복음 16장 13절)
마르코 복음사가는 스승 예수님의 부활 소식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전혀 미화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학자는 앎으로 말하고 운동선수는 기록으로 말하며 신자는 믿음으로 말해야 할 터인데, 예수님의 최측근에게서 여과 없이 드러나는 불신과 완고함 이이처럼 폭로되어도 괜찮은 걸까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 복음 16장 15절)
그런데 믿지 않는 제자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더욱 놀랍습니다. 믿음을 확인받거나 맹세를 시켜도 시원찮을 마당에 거두절미하고 소명을 부여하시니까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근거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제1독서는 최고 의회에서 담대히 발언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사도행전 4장 13절)
베드로는 확실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나 그 추종자들을 적대하던 이들이 놀랐다고 할 정도면 과장이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겪은 제자들은 서서히 자신의 완고한 불신의 늪에서 빠져 나옵니다. 그리고 화룡정점이 될 결정적 사건인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체험하지요. (사도행전 2장 1절-12절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
베드로의 말에는 한치의 두려움도 의혹도 없습니다.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할 굳은 신념과 확신이 가득하지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오합지졸처럼 갈팡질팡 나약했던 그들 안에서도 하느님 자녀로서의 충만하고 온전한 완성의 상태를 관상하시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와 신뢰는 사도행전이 증명하듯, 결국 제대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에서는 믿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다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또 되살아나셔서 지금도 우리 곁에 현존하시며 사랑을 쏟아 주신다는 이야기는 믿음 없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니 그렇습니다.
세속적 번영과 성공을 누릴 때는 믿을 만하다고 여기다가 시련과 고난이 닥치면 믿음을 거두고 돌아서길 반복하면서, 믿음과 불신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성이고 있다면 아직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믿음은 거래가 아니라 투신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됩니다.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는 부족하고 나약한 이들을 지지해 주고 힘이 되어 주신 스승의 놀라운 믿음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믿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결국 그분 믿음에 대한 응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활을 성대히 경축하고 기뻐하는 부활 팔일 축제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더 소중히 즐기고 누리면 좋겠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을 아낌없이 내어드리고, 우리를 믿어 주시는 그분께 큰 감사와 사랑을 올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큼 자라나길 희망하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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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더 큰 기쁨입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전하려면 먼저 내면이 주님으로 가득 차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진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는 사명을 주셨기에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 복음은 나자렛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에 관한 구원의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이지만, 우리 자신이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기쁘지 않은데 누가 나를 통하여 기쁜 소식을 접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처럼 온유함 없이는 이웃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레오나르도 무리알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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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70년 휴스턴 대학은 의과대학에 지원한 학생 중에서 먼저 필기시험을 쳐서 우수한 학생을 가려냈습니다. 그리고 필기시험 합격자 중에서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자를 선정했지요. 면접관들은 학업을 잘 감당하고 나중에 더 좋은 의사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학생들을 뽑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행정착오가 있었습니다. 더 많은 인원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그보다 적은 인원을 뽑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면접에서 떨어뜨린 지원자 중 많은 학생을 합격시켜야 했습니다. 면접에서 떨어졌던 학생들은 나중에 실력이 부족한 의사가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학 생활에서도 성적의 차이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떨어졌던 학생 중에서 능력이 특출한 의사가 많이 배출된 것입니다. 면접관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보다는 면접에 합격한 학생들은 면접에만 더 우수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무조건 정답은 아닐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얼마나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 쏟아졌습니까? 100% 맞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의견이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하긴 전문가들의 판단에 대한 진실 여부를 계산한 통계가 생각납니다. 겨우 54% 맞았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사람의 판단은 하느님이 아닌 이상 100% 맞을 수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판단에 무조건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판단에 의지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의 판단에 대해서는 굳은 믿음을 보이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해서는 불신의 마음을 보입니다. 제대로 살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사람의 판단만을 믿습니다. 즉, 세상의 관점을 통해서만 믿으려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고 전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또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가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렸어도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세상의 판단만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판단을 뛰어넘는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세상의 관점만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만을 바라보고 철저하게 의지하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 사람은 주님의 이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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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쁜 소식이 되어요>
마르코 16,9-15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기쁜 소식이 되어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이듯이
하느님 희망과
이웃 희망이
하나요
하느님 믿음과
이웃 믿음이
하나입니다
하나의 믿음
굳게 지닌 사람이
하나의 희망
곱게 품은 사람이
하나의 사랑
정성스레 이루는 사람이
온 누리
모든 벗에게
십자가 너머 부활의
기쁜 소식이 되어
스미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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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 믿지 못하는 우리를 믿으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지 못하는 우리를 믿어주시는 주님>
마르코복음은 복음 전체가 그렇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주님 부활의 기사도 아주 짧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얘기.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애기. 그리고 마침내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얘기.
이렇게 세 가지 부활 발현 사화가 마르코복음에서는 짧게 전해지는데, 여기서 열 한 제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주님 부활 얘기를 믿지 않고, 두 제자가 전한 부활 얘기도 믿지 않다가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습니다.
이렇게 짧은 주님 부활 발현 얘기를 제자들이 믿지 않은 얘기로 채운 다음 마르코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 사명을 주신 얘기로 끝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참으로 이상스럽습니다. 당신의 부활을 철석같이 믿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를 맡겨도 그 사명을 잘 수행할까 말까일 텐데 주님께서는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그 중요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당신도 믿지 못하면서도 맡기신 것인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당신은 그래도 믿으시기에 맡기신 것인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와 하느님의 믿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의 차이이지요.
작은 믿음은 큰 믿음도 불신하거나 배신하는 데 비해
큰 믿음은 작은 믿음도 믿습니다.
작은 믿음은 주님께서 더 큰 사랑 때문에 주시는 고통에도 사랑을 의심하고, 조그만 안 좋은 일이 닥쳐도 주님의 선하심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큰 믿음은 애초부터 제자들이 당신의 크신 사랑을 작은 고통 때문에 배반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믿으시고, 유다와 베드로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고도 당신 제자 삼으시고 교회의 반석 삼으셨습니다.
작은 믿음은 믿음대로 금방 되지 않으면 불신과 배신으로 이어지지만 큰 믿음은 작은 믿음이 큰 믿음으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줍니다. 아니, 기다릴 뿐 아니라 성장하도록 격려해줍니다.
작은 믿음은 내가 바라는 대로 돼야지만 믿음을 지속하지만 큰 믿음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도 믿음을 지속합니다.
큰 믿음은 큰 허물도 있을 수 있다고 하며 상대를 믿어주지만 작은 믿음은 작은 허물도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단죄합니다.
작은 믿음은 그 보잘것없는 믿음을 가지고 생색내거나
자기 믿음이 배신당한 것에 대해 크게 상심하고 포기하지만 큰 믿음은 믿음의 배신자를 용서하고 품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큰 믿음은 당신의 큰 믿음이 제자들의 작은 믿음 때문에 배신당해도 믿은 대로 될 때까지 믿어주고, 믿은 바대로 되도록 온갖 은총, 무엇보다도 성령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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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적인 의젓함>
오늘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치유하자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인데 이에 사도들은 영적인 의젓함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영적으로 의젓한 것은 사도들의 말대로 사도들이 사람 앞에 있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있었기 때문이고, 사람들의 말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유다의 원로들과 지도자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고, 백성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임에도 오늘 사도행전의 표현대로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인 사도들보다 의젓하지 않고 사도들한테 밀리는 듯 보이는데 그것은 왜 그렇게 됐습니까?
물론 이들이 영적으로 사도들에게 밀리는 것은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인데 이 말은 이들이 왜 그렇게 되었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이들이 사람들 위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 위에 있다 보면 위를 보지 않게 되고,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 보통의 인간입니다.
사람들 위에 있다 보면 올려다보기 보다는 내려다 보는 것에 시선이 굳어지게 되고, 더 교만하게 되면 자기밖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제 경험에서 나온 말이고 저를 반성하며 하는 말인데 그러기에 우리는 사람들 위에 있지 않고 프란치스코처럼 작은 자와 낮은 자의 위치에 있도록 근원적인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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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 믿음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
성인들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겸손이야말로 영성의 잣대입니다. 배움의 여정에 필수적인 것이 겸손입니다. 경청과 겸손있어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배움에는 늘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배움과 훈련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수행이 배움과 훈련이니 수행의 학습(學習)입니다.
기도도, 믿음도, 겸손도, 경청도, 순종도, 섬김도, 사랑도, 희망도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해야, 학습해야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평생 배워야 하는 섬김이요, 배우고 배워도 늘 초보자임을 깨닫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한국 지폐에 있는 얼굴을 아십니까? 이제 카드만을 사용하다보니 지폐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천원권의 얼굴은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이황 퇴계, 오천원권은 이이 율곡, 만원권은 세종대왕, 오만원권은 율곡의 모친 신사임당입니다. 얼마전 퇴계 평전을 읽다가 다음 대목에서 감동했습니다.
“퇴계는 천재적 재능으로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하거나 탁월한 이론이나 공적으로 사람들이 감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었던 실패담과 자신이 애써던 노력의 과정으로 누구에게나 아무런 거리감없이 결코 기가 꺾이는 일 없이 편안하게 그 앞에 다가 서게 해주는 스승이다.”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겸손과 온유의 퇴계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중 위대한 사막교부중 한분인 팜보압바의 임종시 남긴 일화가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시작도 못했는데 하느님께 가는 구나!”
이런 겸허한 고백이 우리에게는 신선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되니 오늘 지금 여기서 분발의 노력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시작하게 합니다. 요즘 겨울 추위를 지낸 파스카의 청초한 봄꽃들이 한창입니다. 어제 써놓은 “참행복”이란 글이 생각납니다.
“청초한
파스카의 봄꽃들
하늘의 별같다
하늘을 바라보듯 땅을 바라본다
청초한
파스카의 봄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다
오늘 지금 여기서”
-2023.4.14.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겸손과 지혜를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파스카의 봄꽃들처럼,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사는 사람들이겠습니다. 사막교부들중 아르세니우스에 대한 일화도 감동적입니다.
-언젠가 아리세니우스 압바가 이집트의 농부 수도승에게 자기 생각에 대해 상의하는 모습을 본 제자가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묻습니다. “아니 스승님처럼 훌륭한 교육을 받은 분이 이런 농부에게 자신의 생각에 대해 묻습니까?” 그러자 아르세니우스 압바의 겸손한 대답입니다. “그렇다. 나는 많이 배운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이 농부의 알파벳도 모른다.”-
배워야 할 것은 지식이나 학식보다는 겸손한 믿음에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지식 유무와는 별개로 평범한 분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삶의 스승, 삶의 지혜입니다. 저 또한 공동체의 수도형제들의 일상으로부터 평범한 지혜를 많이 배우고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부활의 믿음을 지니는 것이 어려운지 배웁니다. 예수님의 부활했다는 소식에도 한결같이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습니다. 이어 당신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의 골자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신비의 주님을, 파스카 기쁨의 주님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희망을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음 선포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이 파스카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파스카 주님께 대한 믿음도 배움이자 훈련입니다. 믿음의 배움, 믿음의 훈련입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매일 온힘을 다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공동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믿음의 배움과 훈련도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일상화해주는 공동전례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 성숙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좋은 모범이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유다지도자들과 원로들,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놀라니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전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이들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제자들이었으니 최고의 스승이자 목자인 예수님을 통해 보고 배운데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결과 이런 담대한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절대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 말라 지시하였지만 제자들은 이에 반발하며 담대히 확신을 토로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담대한 믿음의 고백은 지식이나 학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도 끊임없이 믿음의 배움과 훈련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배워 깨닫고 훈련해야 하는 믿음입니다.
영국의 성인 토마스 모어(1478.2.7.-1535.7.6.)가 단두대에서 처형 시 일화가 생각납니다. 처형대에 올라간 그는 구경하려고 몰려든 군중을 향해 말하니 마지막 임종어입니다. “나는 왕이 좋은 신하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착한 종으로 죽는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진리에 따라 살다가 순교한 “진리의 순교자” 토마스 모어 역시 주님의 참 제자임을 깨닫습니다.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배움의 도상에서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선사되는 겸손한 믿음, 지혜로운 믿음이요 이런 믿음 또한 부단히 배워고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에, 사랑에, 겸손에 언제나 초보자라는 자각이 하루하루 날마다의 모든 수행에 최선을 다해 분발의 노력을 다하게 하며 매일 주님의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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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성령 채우기!>
오늘 복음(마르16,9-15)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사화와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십니다. 그는 이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을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그 뒤 '시골로 가고 있던 두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들도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습니다. 마침내는 '열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선교는 '선포'입니다.
선교는 '복음 선포'입니다.
선교는 '내가 먼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말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선교가 참으로 쉽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말입니다.
반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담대하게 증언하는 오늘 독서(사도4,13-21)를 보면, 선교가 참으로 쉽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4,20)
그 전제는 '성령'입니다. 내 마음의 창고 안에 성령이 계셔야 합니다. 이 성령께서 제대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게 하는 복음 선포를 가능케 합니다. 이 성령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극진한 사랑을 나도 살고 전하게 합니다.
오늘도 내 마음의 창고에 성령을 채웁시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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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cNu2p3HU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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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어둠이 빛을
만나는 순간이
부활입니다.
부활의 따뜻한
소식을
여러 차례
더 우리에게
전하시는
주님의 애틋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모르기에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들리는 소식마다
힘들고 아픈
소식이었는데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희망의
주님이십니다.
말씀과
말씀 사이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사이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기쁜 소식은
예수님의 부활로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지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법을
바꾸는
믿음이며
희망이며
사랑이
부활입니다.
부활의 삶은
사랑의 상처에도
감사하는
삶입니다.
삶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하는
기쁜 소식을
오늘도 전하는
우리는 부활의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와 사랑
부활과 상처가
하나라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합니다.
복음으로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주간
첫날 새벽에
무덤에서
엠마오 길에서
식탁에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복음이
선포됩니다.
우리의 일상이
복음의 선포
부활의 기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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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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