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다음 정재윤
국제축구연맹(FIFA) 사무총장을 지낸 미셸 젠 루피넨(Michel Zen-Ruffinen)씨를 만났다. 젠 루피넨씨는 2001년 12월 1일 부산 전시컨벤션센터(BEXCO)에서 열린 2002 한일월드컵 본선 조추첨 행사의 사회를 맡아 한국 축구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
젠 루피넨씨는 2002 한일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FIFA를 떠나 스위스 로잔에 '젠 루피넨 & 파트너즈'라는 스포츠 전문 법률·컨설팅 업체를 설립했다. 이번 방한은 국내 스포츠 컨설팅업체 포르투나2002(www.fortuna2002.com)의 초대로 이뤄졌으며, 방한 기간동안 '서울시민구단 창단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에 패널로 참여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6일 방한한 젠 루피넨씨는 9일 출국예정이다.
젠 루피넨 전 FIFA 사무총장은 7일 미디어다음과 인터뷰에서 “한국이 축구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월드컵 4강에 버금가는 성과를 지속적으로 거두어야 한다”며 ‘월드컵 4강’이라는 성취감에서 벗어날 것을 권했다. 한국 축구 시장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한국은 이미 아시아 최고의 축구 시장을 갖고 있다”며 “한국 프로구단이 기업의 홍보 도구에서 벗어나 축구 자체를 위한 조직으로 태어나면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2002 월드컵 기간 동안 대한축구협회와 함께 많은 업무를 처리한 젠 루피넨씨는 “대한축구협회가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다”며 “프로축구연맹이 협회 산하 단체가 아니라 독자 조직으로 프로리그 발전에 힘쓸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그밖에 수준별 리그 창설과 리그별 강등제도 도입, 서울시민구단 창단 등에 대한 의견도 내놨다.
“월드컵 4강에 버금가는 성과 지속적으로 내야”
젠 루피넨씨는 "한국 프로구단이 대기업 홍보 수단 이상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미디어다음 정재윤
유럽 축구전문가들은 한국 축구의 수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한국 축구는 2002 월드컵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하며 아시아 축구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월드컵 4강이라는 결과에 안주하면 안된다.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서려면 지속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 축구가 과거보다 많은 발전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수들의 유럽 진출이 더딘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의 월드컵 4강은 몇 명의 탑 클래스 선수들이 일군 결과는 아니다.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팀 전체가 똘똘 뭉쳐 이룬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선수 개인의 유럽 진출이 적었던 것 같다.
물론 한국 선수들 중에도 유럽 등에 진출해서 보통 이상의 기량을 발휘할 선수는 많다. 하지만 각국 리그에서는 그런 보통의 선수를 원하지 않는다. 외국에서 수혈할 때는 탑 클래스의 선수를 선호한다.
스포츠 행정 및 마케팅 전문가로서 한국 축구 시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한국은 일본, 말레이지아와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큰 축구 시장을 가지고 있다. 탑 5를 이야기한다면 중국과 태국이 포함된다. 특히 한국의 축구 시장은 잠재 가치가 매우 높다.
K리그에 참가하고 있는 구단들의 마케팅 수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구단이 대기업에 소속되어 있다는 게 한국 프로팀들의 특징이다. 외국의 경우 스폰서십은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처럼 구단의 살림살이를 간섭하는 수준은 아니다. 구단들이 독립적, 개척적으로 일하기는 힘들 것 같다.
한국에서 구단 마케팅은 기업 홍보와 많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물론 기업이 미디어의 경제면에 이름을 올리는 것보다 스포츠면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더 쉽고 가깝게 느껴지지만, 구단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팬이 자연스럽게 경기장 찾을 수 있도록 리그 수준 높여야"
젠 루피넨씨는 "매주 빅 매치가 열릴 수 있도록 명문구단이 생겨야 리그 흥행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미디어다음 정재윤
K리그는 2002 월드컵 이후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인기를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것에는 실패했다. K리그의 인기를 위해 어떤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보는가
유럽에서도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처럼 팀의 수가 적으면 흥행이 쉽지 않다. 먼저 팀이 더 늘어나야 하고, 각 급 리그별로 업앤다운(up & dawn) 제도가 있어야 한다. 1부리그 팀도 성적이 나쁘면 2부리그로 떨어질 수 있고, 2부리그 팀도 성적이 좋으면 1부리그로 올라가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 시킬 수 있다.
명문구단이 좀 더 늘어나서 매주 두세 경기 정도는 온 국민의 관심을 끄는 빅매치가 열려야 한다.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경기, 이탈리아의 인터밀란과 AC밀란의 경가 같은 빅 매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것이다.
한국에서 서울시민구단관련 심포지움에 참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외국에도 시민들이 구단을 만드는 사례가 있는가
시민들이 구단을 만드는 경우는 있지만, 한국처럼 창단 후 바로 1부리그에서 뛸 수 있는 경우는 없다. 어떤 팀이더라도 처음에 창단되면 4부리그, 5부리그 등 낮은 등급에서 출발해 리그 상위를 차지하면서 점차 1부리그로 진출해야 한다. 따라서 1부리그에 진출한 팀이 있다는 것은 고장의 명예와도 같은 것이다. 팀이 부도가 났다가 재창단 되도 다시 밑바닥부터 올라가야 한다.
서울에서 시민구단이 창단이 되면 바로 1부리그에 진출할 수 있다. 서울에게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업앤다운 제도가 생기면 이런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한국의 일부 축구인과 언론은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팬들에게 경기장을 찾아달라”고 호소하곤 한다. 그러나 일부 축구팬은 “먼저 경기 수준을 올리고 스타를 영입해 좋은 상품을 만들면 경기장을 찾겠다”고 버틴다. 어떤 게 먼저일까
당연히 좋은 상품을 만들고 팬이 자연스럽게 모이도록 해야한다. 축구에 대한 사랑으로 입장권을 사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돈을 쓰고 싶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붉은악마와 같은 서포터 집단은 2002 월드컵 때도 큰 역할을 했다. 서포터가 현대 축구에 끼치는 영향이 있을까
냉정하게 말해 서포터가 구단에 미치는 경제적인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고작해야 연간 회원권 몇백장 구매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팀의 원정 경기 때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등 팀에 전력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서포터 같은 열광적인 팬이 많아야 스폰서를 찾는 데도 도움이 된다. 서포터 때문에 팀이 알려지는 효과도 있다.
"프로리그 활성화가 축구 발전으로 이어진다"
젠 루피넨씨는 한국 프로축구 구단에게 외국 클럽과 활발한 교류를 권했다. ⓒ미디어다음 정재윤
FIFA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대한축구협회와 많은 접촉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한축구협회의 운영에 대해 조언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유럽의 경우 각국 축구협회는 국가대표팀만을 관장한다. 그러나 한국의 축구협회는 프로축구연맹 등 산하 단체를 두고 한국 축구전반을 관리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프로축구연맹은 완전 독립된 상태로 국가 축구협회와 상호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로연맹이 독립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결과 리그도 발전할 것이며 리그 발전은 자연스럽게 국가의 축구 수준을 향상시켜 대표팀의 전력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젠 루피넨씨가 만약 한국 프로구단의 구단주라면 어떻게 구단을 운영하겠는가
먼저 잉글랜드로 가겠다.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대형 구단을 찾아가 자세한 상황 설명을 듣고 그들의 노하우를 배우겠다. 경영에 관련된 것도 배우겠다. 방문한 구단과는 네트워크를 형성해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는다. 아시아에 관심을 둔 유럽 명문구단이 많아 그리 어렵지 않은 작업이 될 것이고, 오히려 이들이 한국 구단에 투자할 수도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예산을 확인 한 후, 많은 부분을 선수 수급에 사용한다. 영입 대상은 유럽 2, 3년 후 빅리그 진출이 가능한 젊은 선수들이다. 젊은 선수들은 외국에서 주전을 뛸 기회를 가져서 좋고, 우리팀은 유망주를 영입해서 좋다. 유럽에는 이런 선수들이 많다. 한국 선수들이 이들에게 배우는 게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