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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민주평화론의 흐름과 한계
민주평화론은 국민이 정부인사를 선출할 수 있는 선출제 민주정(Elective democracy)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자적 민주평화론(Monadic Democratic Peace Theory)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민주적 평화이론에 대한 연구성과가 축적이 되며 일자적 이론의 한계가 드러나자 민주평화론에 대한 논의는 쌍자적 민주평화론(Dyadic Democratic Peace Theory)에 집중이 된다. 특히 최근 제시된 “취약한 연결고리(weak-link theory)”이론은 민주정이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보다는 두개의 국가가갈등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덜’민주적인 국가가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취약한 연결고리”이론을 증명하기 위하여 제시된 통계학적 공식들은 한계를 드러내었고, 이 때문에 최근에는 민주국가는 비민주국가보다 호전성이 적다는, 다소 그 의미가 조정된 일자적 이론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민주평화론의 시원과 전개
본격적으로 민주평화론의 흐름을 논하기 전에 민주평화론에서 말하는 ‘민주국가’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R.J. Rummel은 정치NGO인 Freedom House의 정의를 인용하여 민주국가를 정리한 바 있다. Rummel에 의하면 국가의 민주적 성격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건인 자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번째는 정치제도적 자유, 둘째는 보다 광의적인‘자유’이다. 정치적 권리란 민권과 정치적 권리가 합쳐진 개념이며 광의적인 자유는 국민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인 자유를 포괄한다.[1] ‘정치적 자유’를 이루는 개념들중 ‘정치적 권리’란 기본적으로 공개적이고 경쟁적인 과정을 통하여 국가의 지도자들을 선출할 권리를 의미한다. ‘민권’은 구성요건이 더욱 복잡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언론의 자유 (대다수의 언론기관이 정부의 강제로부터 벗어나 있음)
② 개인의 자유가 법정 같은 법적인 기관에 의하여 보호받음
③ 감금의 우려없이 개인의 의견을 개진할 권리
④ 종교, 직업, 거주, 교육등의 문제에 있어 개인의 권리와 욕구 인정
⑤ 개개인이 생명에 대한 위협없이 개인들이 합리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할 수 있음[2]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민주평화론은 칸트의 저작인 <영구적 평화: On Perpetual Peace/Zum ewigen frieden>으로부터 비롯된다. 칸트는 ‘평화’자체에 대하여 쓴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세계정부(World government)의 형성에 대한 전제조건으로서의 평화를 논한 것이다. 칸트는 이 ‘평화’를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각국이 공화(共和)적 헌법체계를 수립해야함을 <영구적 평화> 제 2장에서 밝히고 있으며 여기에서 “과연 공화적 헌법이 영구적 평화로 이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칸트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면서 공화정 헌법을 지닌 국가는 전쟁을 하기 위하여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이런 경우 국민들은 자신들 스스로에게 전쟁의 참화를 전가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자연적”이라고 쓰고 있다.[3]
칸트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지만 민주평화론은 그리 큰 이목을 끌지 못하였다. 민주평화론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정부”운동이 있기는 하였지만 국제정치연구에 대한 영향은 미미했고, 소수의 철학자들이 거론하는 것 이외에 민주평화론 자체에 대한 학적(學的)담론도 거의 전무했다. 철학적 담론으로서만 존재하던 민주평화론에 대한 첫 ‘과학적’ 분석은 1960년대에 미국의 범죄학자 Dean Babst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Babst는 1961년에 미국의회가 설립한 “미국 군비제한/군축 청(廳): US Arms Control and Disarmament Agency”으로부터 “항구적인 평화(체계)의 기본적인 구조를 확립에 관한 이해를 향상시키기 위한” 연구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면서 “서로 전쟁을 하지않게 하는 정부체제형태가 과연 있는지에 관한 의문”을 연구의 주요쟁점으로 설정했다.[4] Babst는 이 연구의 결과를 Wisconsin Sociologist紙에 기고한 <평화의 동인動因으로서의 선출제 정부: Elective Governments-A Force for Peace>라는 논문에서 밝히게 된다. Babst는 이 논문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국가들을 표로 정리하면서 선출제 정부가 있는 국가와 없는 국가로 구분하였는데 선출제 정부, 즉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한 국가들이 승전을 한 연합국(1차대전-Entente/2차대전-Allies)은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5]
현대 국제관계론에서 민주평화론을 수치화된 ‘과학’으로 본격적으로 다룬 논고는 Melvin Small과 J. David Singer가 1976년 Jerusalem Journal of International Relations에 쓴 <민주적 정권의 호전적 경향: War Proneness of Democratic Regimes>이다. Small과 Singer는 Babst의 1972년 논문 “A Force for Peace”를 거론하며 민주적인 “선출제 정부는 평화를 향한 멈출 수 없는 힘이 되었다”고 말한 Babst의 결론은 “자유민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자라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설득력있고 마음 훈훈한 이야기”이고, 뒤이어 그러한 주장이 “매우 암울한 현대 국제관계에서 한줄기 희망의 서광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매혹적”[6]이라고 하여 칸트의 <Perpetual Peace>의 기본명제가 민주평화론 지지자들에게는 일정한 이론의 맥(脈)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논문의 저자들인 Small/Singer 조차도 민주주의 국가들이 평화적 경향이 있다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법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과연 그 원인이 체제의 민주성 때문인지, 관료적 나태나 민주적 국민들의 휴머니즘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7]
Babst와 Small/Singer의 연구는 주로 일자적 평화(Monadic peace)이론을 시험해보기 위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일자적 평화이론에 다루는 기본적인 쟁점은 과연 민주주의 국가들이 덜 호전적인가의 여부이다. 다시 말하자면 민주주의 국가들이 전쟁을 할 가능성 자체가 더 낮은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일단 Small/Singer는 1816년에서 1965년까지의 기간동안에 소위 ‘부르주아 민주체제’국가들이 개입된 전쟁 93개를 선택하고 이를 ‘국가간 전쟁(Interstate War)’과 ‘체제외적 전쟁(Extrasystemic War)’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국가간 전쟁은 유럽이나 미주에 체제가 확립이 된 국가간의 분쟁이고 후자의 ‘체제외적 전쟁’이란 서구나 영미권의 민주정 국가와 부족이나 신생국가 같은 체제외적 정치체(Political entity)와의 싸움을 말한다. 전쟁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처음의 50개전쟁중 19개, 즉 38%가 한 개 이상의 민주정이 개입되어있었고, 민주정 국가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1871년 이후만 놓고 보자면 50%의 전쟁에 한 개 이상의 민주정이 개입되었었다. ‘체제외적 전쟁’ 부분에서는 더욱 심해서 전(全)기간동안 민주국가가 35%의 전쟁을 주동하거나 개입이 되어있었으며 1871년 이후의 비율은 65%에 달한다. 아울러 민주정 국가들은 전쟁을 보다 길게 끄는 편이지만 많은 수의 사상자가 나는 것을 꺼려한다는 결과가 나왔다.[8] 이에 Small/Singer는 민주정 국가들이 전쟁을 기피한다는 특별한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내린다.[9][10]
일자적 평화론을 증명하기가 어렵게 되자‘ 두 개의 민주국가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쌍자적 평화쪽으로 연구가 집중된다. R.J. Rummel은 1983년에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에 쓴 논문에서 두 개의 민주주의 국가간에 갈등이 벌어진 상황을 설정한다. 민주국가들이 외교관계에서 서로가 민주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는 사실 자체가 전쟁에 제동을 거는 장치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11] Rummel은 더 나아가 민주국가들끼리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상관관계나 관련성, 또는 관계론적으로 유추한 것이 아니라 타협의 여지없는“절대적인” 주장이라고 한다. 민주평화론은 매우 확실한 주장이기 때문에 만약 특이한 상황에 의하지 않고 발생하는 (민주국가간의) 전쟁이 있다면, 즉 단 하나의 예외적인 사례라도 발견된다면, 이 주장 전체가 거짓으로 판명될 수 있다고 쓰고 있다.[12] Rummel은 그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평화에서 전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부정적 교신(Negative communication)-부정적 제재조치(Negative sanctions)-경고와 방어적 행동(Warning and defensive action)-군사적 폭력생사(Military violence)로 나누고 이를 다시 17개의 변수로 세분화하여 수치화하였다. 각 변수는 국가간에 형성된 적대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대립, 각국이 지닌 가치관, 이해관계, 그리고 전쟁으로 격화될 가능성을 고려하여 1에서 8까지의 지수가 설정되었다[13] (지수가 낮을수록 격화될 가능성이 적다). 수많은 변수로 구성된 통계공식을 만들고 공식을 조정하며 총합점수가 높을수록 ‘전쟁’에 가까워진다. 이런 데이터를 토대로 1945년부터 1965년 사이 민주주의 국가들간의 정치적 대립을 살펴본 결과 하나도 군사적 폭력단계로까지 격화된 일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14]
민주평화론의 한계와 문제
위에서 제시한 Babst와 Small/Singer, 그리고 Rummel의 이론이 보유한 공통점이자 동시에 단점은 바로 역사적 분석이 거의 없고 정치적인 사항을 지나치게 수치화/계량화시켰다는데 있다. 그러나 지나친 계량화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고 민주평화론이 지닌 주관적인 맹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민주적 평화론을 지지하는 연구의 맹점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민주평화론 지지자들의 연구가 ‘민주주의’의 기준을 너무 높여 잡았다는 것이다. 특히 민주평화론 반대론자들은 “민주주의”와 “전쟁”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다고 비판한다. 민주평화론에 대한 지지론과 반대론의 대립와중에서 반대론자들은 민주평화론에 대한 수많은 예외사례를 제시하였지만 지지자들은 제시된 사례중 그들이 설정한 ‘민주주의’와 ‘전쟁’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사례는 없다고 반론하며 민주평화론에 대한 비판을 피해가고 있다.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와 ‘전쟁’의 요건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반대론자들에 의하여 제기된 반대사례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① 아테네의 시라쿠사 원정 (BC 415년)
② 1812년 영-미전쟁
③ 미국 남북전쟁 (1861-1865)
④ 2차 보어전쟁 (1899-1902)
⑤ 파키스탄-인도 카길 분쟁 (1999)
우선 첫번째 사례가 민주평화론에 대한 반대사례로 제시되는 이유는 아테네나 시라쿠사 양국모두 당시의 기준으로 가장 민주적인 국가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투표권이 있는 성인남자들은 국가의 정책을 집행하는데 있어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1812년 당시의 영국과 미국도 기타 국가와 비교를 할 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가장 발달된 나라들이었다. 남북전쟁 발발직전 미국을 양분한 북부와 남부 모두 유권자들의 투표권에 의하여 정부지도자들이 선출되는 공화정 국가였다. 2차 보어전쟁때 지금의 보츠와나 지역을 침공한 영국은 선출제 민주주의 국가였고 보어인들이 세운 남아프리카 (트란스발) 공화국 역시 투표에 의하여 대통령이 선출되는 공화정이었다. 마지막으로 1999년의 카길분쟁에서 충돌한 인도와 파키스탄 역시 선출제 민주공화정이었다.
위에 제시된 사례들이 모두 당대에는 민주적이었음에도 민주평화론 지지자들은 위의 사례들을 예외로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와 개념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진화해왔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이는 민주평화론이 심각할 정도로 몰역사적 (Ahistorical)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5] 민주평화론 지지자인 Michael Doyle의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18세기에 자유국가라고 할만한 국가는 3개에 불과했고 19세기 전반기에서는 8개, 19세기 후반기에도 13개 정도였다. 그러다가 20세기 전반에 29개, 2차 대전 후에 약 49개로 불어난다.[16] Doyle이 정리한 표는 지지자들의 논리가 기본적으로 근현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John Mearsheimer가 지적하듯이 소위 서양사 200년의 ‘근현대’에도 현대적인 의미의 민주국가는 그 수가 적었고, 이 논리대로라면 근현대 이전에 2개의 민주국가가 서로 전쟁할 기회가 많지 않게 된다.[17] 만약 근대 이전에 존재하였던 ‘상대적 민주정(Relative democracies)’의 존재를 모두 부정하고 민주평화론의 담론에서 제외시키면 민주평화론은 원천봉쇄의 오류를 범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근대이후의 짧은 시간에 한정을 시키게 된다.
현대로 오면서 민주국가의 수가 증가하였음에도 민주평화론의 중축을 구성하는 ‘민주주의’와 ‘평화’간의 인과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특히 ‘민주주의’가 동인(動因, Motive force)이 되어 ‘평화’를 창출하는 선행개념이라는 논리는 민주평화론에서 내세운 데이터에 의하여 부정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아래의 표는 Polity IV Project에서 1800년이후 Polity 지수 +8을 상회하는 명실상부한 ‘민주국가’의 수를 정리한 표이다. 아래에서 보이듯이 1945년을 전후하여 ‘민주국가’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1. Polity IV 지수 +8이상 국가수 그래프
(http://www.cidcm.umd.edu/inscr/polity)
Polity IV에서 작성한 다른 표에 의하면 1980년대 후반을 전후하여 세계에서 민주주의 국가의 수가 늘고 전제주의나 무정부 상태의 국가가 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 2. 1946-2007년 세계 정권형태 경향 변화 그래프
(http://www.systemicpeace.org/polity/polity4.htm)
민주평화론의 주장처럼 민주주의가 평화를 선행하는 것이라면 1945년 이후에는 이전과 비교하여 분쟁이나 전쟁의 수가 감소하여야 하고, 1980년대 후반 이후 같은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1945년 이후와 2차대전 종전이전을 통계적으로 비교하여보면 세계에서 전쟁의 빈도가 줄어든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식민제국들의 식민지들이 분리주의 운동을 벌이며 연수(年數)에 비하여 전쟁의 수가 오히려 늘어난다. 1900년부터 2차대전 종전직전인 1944년까지 내전(內戰)을 포함하여 약 91개의 전쟁이 발발한다. 년당 약 2.02건 정도가 된다. 그러나 1945년 2차대전 종전이후 1989년까지 발생한 102건의 전쟁을 연수(年數) 45년으로 나누어보면 1년에 약 2.26건이 된다. 1989년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보아도 전쟁의 빈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수에 비하여 크게 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89년에서 현재(2008년)까지 총 77개의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단순 계산(77÷20)만으로도 일년에 평균 3.85개의 전쟁이 벌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세계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민주주의’라는 한 요소만으로 분쟁의 발생빈도를 줄인다는 주장을 펴기에는 다소 역부족이 아닐까 싶다.
민주평화론 연구자들은 이러한 모순을 인식한 듯 반론에 나섰고 Spencer Weart는 민주평화론에 대한 반대논리를 저서 <Never at War>을 통하여 공박하였다. Weart에 의하면 1812년의 영-미전쟁은 영국의 왕이 아직 외교와 군사정책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고 비판적인 인사들을 왕에 대한 모독으로 처벌할 권한이 있는데다가 미국과 영국에서 소수의 남성들만이 투표권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을 완전한 민주국가로 보기에 어렵다고 주장한다.[18] 남북전쟁당시 미주동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은 노예제 국가인데다가 성인남자중 3분지 2 이하만이 투표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역시 민주국가가 아니라고 역설한다.[19] 2차 보어전쟁 당시 트란스발 공화국 역시 일부 백인남성들만이 투표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국가의 기준에는 미흡하다고 주장한다.[20]
카길분쟁 당시 인도는 이미 50년 이상을 민주국가로 존재해왔고 파키스탄 역시 1988년에 나와즈•샤리프가 총리로 선출된 이후 Polity IV Project의 기준에 의하여 민주지수 +8에 해당하는[21] 객관적인 ‘민주정권’이 10년 이상 정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길분쟁은 민주평화론에 강력한 도전이 될 수도 있는 사례인 듯싶었다. 그러나 다른 정치 NGO인 Freedom House의 ‘민주주의 척도 차트’라고 할 수 있는 Freedom In the World 표[22]에서는 파키스탄은 해당기간동안 ‘민주지수’ 합계가 8과 9정도인 부분적 자유국가로 분류되었다. 이 때문에 민주평화론 지지자들은 전쟁발발당시 과연 파키스탄이 민주국가였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으며 이 때문에 카길분쟁역시 부정되었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점은 민주평화론 지지자들은 ‘민주’의 개념을 지나치게 좁게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좁은 ‘민주개념’에 부합되면서 전쟁을 한 국가는 사실상 없게 되었다.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이 좁은 의미의 민주(Democracy)에 부합되는 국가들은 대부분 현대에 출현하였고 민주평화론 지지자들의 연구또한 현대에 집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평화론에 대한 연구는 모두 지지자들의 의도에 부합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민주적 평화이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한 대표적인 연구중의 하나인 Oneal과 Russett의 <Causes of Peace: Democracy, Interdependence, and International Organizations, 1885-1992>가 연구의 범위를 108년의 근대사에 한정을 시킨다는 점은 민주적 평화이론의 연구에 있어 매우 시사적이다. Maoz, Zeev 와 Bruce Russet이 1993년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에 기고한 <Normative and Structural Causes Of The Democratic Peace, 1946-1986>도 제목에서 보이듯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약 40년의 기간을 연구에 포함시키고 있다. Oneal과 Russet이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41호에 1997년 기고한 <The Classical Liberals Were Right: Democracy, Interdependence, and Conflict: 1950-1985>도 역시 2차 대전 이후의 짧은 기간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다. 민주평화론에 대한 연구의 시간적 한계도 민주적 평화이론의 정책적 실효성을 위협하는 약점이 될 수 있다.
민주평화론자들의 연구가 근현대에 집중이 되어있음으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부작용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분석을 등한시 한다는 것이다. 민주평화론론자들의 연구는 전쟁에 관한 사실에 대한 면밀한 고찰보다는 통계적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증거의 검토를 통한 사실의 증명보다는 최대한 많은 변수를 포괄하는 통계공식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일면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지표에도 연구자 개인의 주관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예를 들어 Rummel의 논고에 인용된 Freedom House의 민주성 지표도 이런 공식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해당 지표는 정치적 자유와 자유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자유’도 지표의 공식에 포함시켜 지수를 산출한다. 이렇게 되면 중앙권력이 완전히 배제된 시장경제의 지수가 국가가 개입하는 수정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지수보다 낮을 수 밖에 없다. 이는 해당 국가의 실제 민주성여부와는 상관없이 시장경제를 ‘자유’와 동일시한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1977년 정치적 권리와 민권지수 합계 2에 머무르는, 정치적으로는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스웨덴이 정부가 경제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이유로 경제적 자유측면에서는 “공업자본-사회주의”에 해당하는 9점을 받아 통합지수 11점을 받은 바 있다.[23] 이에 비하여 Freedom in the World표에 따르면 중남미의 온두라스는 같은 해 정치자유지수 6에다 민권지수 3을 받아 정치적으로는 비자유국(Not free)에 매우 근접한 부분자유국(Partially free)임에도 경제지수 2인 “미(未)공업화 자본주의 국가”로 규정되어 스웨덴과 같은 통합지수 11을 받게 된다. 의심의 여지없는 민주정인 스웨덴과 당시 인권침해의심을 받고 있던 온두라스는 최소한 1977년 당시에는 둘다 “부분적 정치자유국(Partially politically free)”이 되는 것이다. 실제 정치적/역사적 현상에 대한 면밀한 고찰없이 모든 것을 수치화시키려한 민주평화론 자들의 한계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통계적 수치의 과용은 많은 예외사례들을 민주평화론 지지자들이 규정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제외시키는 데서도 드러난다. 민주평화론 지지자들이 규정한 전쟁은 Small/Singer가 정의한 데로 국가의 정규군이 직접 전투에 개입되어야 하며 전투로 인한 사망자가 1000명을 상회하는 무력충돌을 의미한다.[24]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민주국가가 다른 민주국가의 정치적 사건에 무력을 동원하여 개입한 사건이나 민주국가간에 상당한 교전이 벌어진 사건도 모두 전쟁이 아닌 것으로 처리되는 일이 많다. 필자가 뒤에 제시할 사례중의 하나인 1965년 미국의 도미니카 공화국 침공은 초기작전에만 제 82공정사단[25]을 포함하여 총 20000명이 넘는 미군이 동원되어[26]수도 산토도밍고의 일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고 시내에서 소위 ‘헌법파’ 무장단체와 충돌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음에도 전투의 규모가 작았다는 이유로 단순히 ‘파워-팩 작전(Operation Powerpack)’으로만 불리고 있다. 1981년 파키샤 사건(The Paquisha War)에서는 안데스 산맥의 국경지대에 에쿠아도르가 설치한 군사요새를 페루가 전투헬기와 강습보병을 동원하여 무력점령하고 양국의 공군이 2차례에 걸쳐 교전을 벌였다.[27] Polity IV Project 지표에 의하면 에쿠아도르의 Polity(체제)지수는 +9단계이고[28] 페루는 +7단계로[29] 양국 모두 當프로젝트가 규정한 민주주의 경계선인 +6을 넘고 있다.[30] 그러나 상당한 전투행위가 있었고 양국에 400명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31] 단순한 ‘사건’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에 비하여 1938년에 슬로바키아 동부의 일부지역을 놓고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사이에 발생한 사건은 사상자 100명에 포로 700명밖에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전쟁’이라고 하고 있다. 물론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은 민주평화론 논의에 포함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규정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반증이다.
다음 장에서 시작하는 예외적 사례 분석에서는 역사적 고증을 통하여 민주평화론의 한계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1] R.J. Rummel <Libertarianism and International Violence>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 (1983) 27. pg.29
[2] Ibid pg.31
[3] …if the consent of the citizens is required in order to decide that war should be declared (and in this constitution it cannot but be the case), nothing is more natural than that they would be very cautious in commencing such a poor game, decreeing for themselves all the calamities of war.
<On Perpetual Peace> Section II-“First Definitive Article for Perpetual Peace
[4] Dean V. Babst <Elective Governments - A Force for Peace>. The Wisconsin Sociologist 3 (1, 1964) pg.9
[5] Ibid pg.11
[6] Melvin Small/J. David Singer <War Proneness of Democratic Regimes>. The Jerusalem Journal of International Relations Vol. 1 No. 4 (Summer 1976) Pg.51
[7] Ibid pg.50
[8] Ibid pp.56-65
[9] Ibid pg. 67
[10] Small/Singer는 두개의 민주정(Dyad)을 놓고 보았을 때 분쟁이 적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는 민주국가들이 대개 지리적으로 근접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다. (Ibid pp.66-67)
[11] R.J. Rummel <Libertarianism and International Violence>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 27 (1983) pg.28
[12] Ibid pg. 29
[13] Ibid pg. 33
[14] Ibid pg. 51
[15] Ido Oren <The Subjectivity of Democratic Peace> International Security, Vol. 20, No. 2. (Autumn, 1995). pg. 147
[16] Michael W. Doyle <Kant, Liberal Legacies, and Foreign Affairs>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Vol. 12, No. 3. (Summer, 1983) pg. 209-210
[17] John J. Mearsheimer <Back to the Future: Instability in Europe after the Cold War> International Security Vol. 15, No. 1. (Summer, 1990) pg.50
[18] Spencer R. Weart <Never at War>(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CT.1998) pg.105
www.nationalarchives.gov.uk/pathways/citizenship/struggle_democracy/getting_vote.htm
[19] Spencer R. Weart <Never at War>(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CT.1998) pg.110
[20] Ibid pg.124
[21] http://www.systemicpeace.org/polity/pak2.htm
[22] 정치권리지수와 민권지수를 합한 합계가 낮을수록 ‘민주적’이다. 카테고리당 가장 낮은 지수는 1, 가장 높은 수는 7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합계점수는 정치권리지수1과 민권지수1을 합친 2점이다.
[23] R.J. Rummel <Libertarianism and International Violence>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 27 (1983) pg.32
[24] Melvin Small/J. David Singer <War Proneness of Democratic Regimes> The
[25] www.bragg.army.mil/history/HistoryPage/powerpack/PowerPack.htm
[26] lcweb2.loc.gov/cgi-bin/query/r?frd/cstdy:@field(DOCID+do0024)
[27] www.acig.org/artman/publish/article_164.shtml
[28] www.systemicpeace.org/polity/ecu2.htm
[29] www.systemicpeace.org/polity/per2.htm
[30] www.systemicpeace.org/polity/keynew.htm
[31] www.acig.org/artman/publish/article_164.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