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선, 가족 26-7, 마지막 인사
하나님의 축복이 깃들길
“아빠 많이 아파예.”
김경선 아주머니가 교회에서 뵌 홍순운 목사님께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전했다.
소식 듣고 목사님이 김경선 아주머니와 함께 아버지 병문안을 갔다.
“선이 왔나.”
“아빠, 많이 아파?”
아버님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신음 소리만 겨우 내고 있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손에 장갑 같은 것도 끼고 계셨다. 간병사가 아버님 상태가 많이 안 좋다고 했다.
홍순운 목사님도 예상보다 더 나쁜 아버님 모습에 손을 꼭 잡으며 기도해 주셨다.
많이 고통스럽겠지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버님을 하나님이 지켜보실 거라고.
아버님께 축복이 깃들기 바란다며 오래 정성껏 기도해 주셨다. 그런 목사님을 아버님은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아버님, 김경선 아주머니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세요.
아주머니가 아버님 많이 아프다고 했더니, 목사님이 여기까지 와 주셨어요.
평소에도 김경선 아주머니 잘 챙겨 주시고요. 아주머니 옆에 좋은 분들이 많아요.
아주머니 잘 지내시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평소 의식이 제법 또렷하실 때 아버님은 늘 김경선 아주머니가 건강한지, 잘 지내는지 걱정하시곤 했다.
그래서 한 번은 꼭 말씀드리고 싶었다. 눈 감고 있는 아버님이 직원 이야기를 잘 들으셨는지는 모르겠다.
“경선 씨, 경선 씨는 참 복이 많아요. 환갑이 될 때까지 아버지를 볼 수 있잖아요.
저는 부모님이 두 분 다 너무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아버지께는 꼭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겁니다.”
홍순운 목사님은 김경선 아주머니에게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
목사님 말씀처럼 아버님께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기 바라며 병실을 나섰다.
부고
다음 날 저녁, 서울에 사는 둘째 동생분에게 연락이 왔다.
“선생님, 늦은 저녁에 죄송해요. 퇴근하셨죠?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셨어요. 어제 언니가 병원에 왔었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 너무 잘하셨어요. 감사하고요.
그런데 지금 당장 이야기하면 언니가 충격을 받을 것 같아요.
혹시 괜찮으시면, 내일 아침 일찍 언니를 장례식장에 모시고 와 주시겠어요?”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김경선 아주머니 곁에 좋은 분들이 있는 걸 보고 마음 놓으셨을까, 홍순운 목사님 기도에 마음이 편안해지셨을까.
그래도 전날 김경선 아주머니가 아버님을 뵈어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더 자주 찾아가지 못한 게 못내 걸린다.
복잡한 머릿속을 뒤로 미루어 두고, 우선 동생분 이야기처럼 내일 아침 김경선 아주머니를 모시고 장례식장으로 가기로 했다.
장례
아침에 출근해 김경선 아주머니를 뵈었다. 아주머니께 아버지 부고를 전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직원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던 아주머니 얼굴이 순식간에 굳고, 두 눈이 둥그렇게 커진다.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같은 표정이다.
“아주머니,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아주머니도 준비해서 장례식장에 가셔야 해요.
아주머니가 큰 딸이니까 가서 아버지께 인사드려야죠.”
“예.”
김경선 아주머니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많은 말을 하지도 않았다. 채비를 하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언니, 왔어?”
“어머, 선이가 왔네.”
“언니 못 오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데려와 주셨구나. 고맙습니다.”
식장에 들어서니, 벌써 온 가족이 모여있다.
김경선 아주머니에게 잘 왔다며, 아버지께 인사드리라고, 가족들과 함께 손님 맞자고 동생들이 이야기한다.
직원에게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하셔서 자리에 앉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손님들이 많지 않았다.
아마도 저녁이 되면 손님들이 많을 것 같다고 하셨다.
김경선 아주머니의 형제들과 거창에 산다는 큰고모님과 작은고모님을 만났다.
아버님이 너무 오래 아프지 않고 가셔서 그래도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이제는 아버님과 어머님을 함께 모시게 되었으니 두 분이 하늘에서 만나 정답게 지내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다.
이어지는 장례 절차와 가족들이 챙길 부모님 기일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내년부터는 아버님과 어머님 제사도 3월에 함께 지낼 예정이라고 한다.
내일 아침 일찍 발인을 하고, 함안에 있는 화장장에 간다고 했다.
가조면에 선산이 있어 장지는 그곳으로 하는데, 거기까지는 김경선 아주머니가 가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그래도 김경선 아주머니가 큰 딸이니 오늘 저녁까지는 가족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지키고,
내일 아침에 함안 화장장에도 함께 가기로 했다.
직원도 장지까지 가는 건 어렵더라도 김경선 아주머니가 아버지 가시는 마지막 모습은 볼 수 있기 바랐다.
“언니, 고생했어.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잘할게. 아버지 묻히는 데가 산이라서, 언니가 갈 수가 없잖아.
가서 또 연락할게. 언니도 조심해서 들어가. 이제 아빠 없어, 언니. 알지?
이제 아빠 집에 가도 아빠는 없어. 그래도 다음에 아빠 집에서 또 보자, 언니. 내가 언니 보러 갈게.”
“응, 아빠 없다.”
함안 화장장에서 김경선 아주머니는 남은 가족들과 헤어졌다.
말씀은 않았지만, 아마 가족들에게 아버지를 보내는 남은 절차를 잘 부탁한다고,
언니가 되어서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 같다.
아주머니 댁으로 돌아와 어디 다녀왔냐고 묻는 이웃들을 만났을 때, 아주머니는 “아빠 없다”라고 말했다.
김경선 아주머니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가족들과 함께하며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의 지난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인 듯했다.
장례는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잘 보내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며칠 동안 남은 사람들이 고인이 떠났다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김경선 아주머니에게도 장례의 의미가 여느 사람과 같았던 것 같아 다행이다.
상속
장례를 마쳤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상속이라는 게 남아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유산 대신 빚이 있다고 했다.
남은 가족들이 상속을 포기해야 그 빚이 승계되지 않는데, 상속 포기를 위해서는 필요한 절차와 서류가 있었다.
김경선 아주머니도 서류를 갖추어 절차를 이행해야 했다.
둘째 동생분 도움을 받아 상속 포기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러 면사무소에 들렀다.
그런데 서류를 발급 받기가 쉽지 않았다.
갖추어야 하는 서류 중 인감증명서가 있는데, 이 인감은 재산과 관련한 것이기 때문에 인감을 등록하는 것도,
인감증명서를 발급 받는 것도 요건이 까다로웠다.
김경선 아주머니 본인이 직접 방문하더라도 인감이 필요한 이유를 스스로 설명하고,
인적사항과 그 용도를 아주머니가 서류에 쓸 수 있어야만 인감 등록과 인감증명서 발급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럴 수 없다면, 후견인을 세워서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상속 포기는 3개월 내에 해야 하는데, 후견인을 선임하는 데는 3개월 이상 소요될 수도 있다.
김경선 아주머니 사정을 설명해도 면사무소 공무원이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인감을 도용해 잘못을 저지르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어 법과 절차가 강화된 것은 이해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잘못을 저지를 사람이 잘못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처벌을 강화해야지,
인감 등록 과정 자체가 어려워져서 사용하기 힘들게 하는 건 또 다른 피해를 양산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후견인 제도에 관해서도 의문이 들었다.
김경선 아주머니는 자신의 뜻을 말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은 있지만, 뜻을 밝히지 못하는 분은 아니다.
듣는 사람이 잘 듣고 살피고 물으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후견인 제도는 그런 김경선 아주머니가 의사 능력이 없다고 단정하고 이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것이다.
누군가 의사 능력이 없다고 단정하기 이전에, 그 사람이 어떤 뜻을 전하고자 하는지 우선 충분히 묻고 살펴야 한다.
바로 이해하기 어렵다면 곁에서 돕는 시설 직원이나 가족들에게 뜻을 살필 방법을 물을 수도 있다.
그런데 후견인 제도가 있음으로써 김경선 아주머니에게 그렇게 성실히 묻는 과정은 생략되는 것 같았다.
또 아주머니를 오랜 시간 지켜봐 온 가족들과 직원들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당사자도, 가족도, 직원도 믿을 수 없는데, 후견인은 믿을 수 있을까?
어쩌면 후견인이 김경선 아주머니를 가장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 후견인이 김경선 아주머니를 대신해 아주머니의 뜻을 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를 따질 시간도 아까웠다.
지금 당장 법을 바꿀 수는 없으니, 법이 허락하는 안에서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리저리 알아본 끝에 특정대리인 제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둘째 동생분이 변호사를 선임해 특정 대리인 제도를 통해 김경선 아주머니도 형제들과 함께 상속을 포기할 수 있게 돕겠다고 했다.
예기치 못한 일에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상속에 관해 의논하며 김경선 아주머니와 형제들이 서로 얼마나 끈끈한지 다시 느끼게 되었다.
감사 인사
김경선 아주머니가 아버지 장례 치를 때, 마음 써 준 사람들이 많다.
우선 같은 집에 사는 룸메이트 김민정 씨는 아버지 부고 소식을 듣고 직접 조의금을 전해 주었다.
두 분이 10년 넘게 함께 사셨다는데, 그만큼 정이 깊구나 싶었다.
김민정 씨 외에도 월평빌라 이웃들과 직원들이 직접 아버지 장례식에 찾아가 인사를 전하기도 하고,
또 김경선 아주머니 뵙고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시온성교회 홍순운 목사님도 뒤늦게 소식 듣고 장례식장에 직접 찾아가지 못해 아쉬워하셨다.
마음을 전해 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김경선 아주머니도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김경선 아주머니 가족분들도 그러기 원했다.
감사 인사를 나누며 비로소 아버지 장례식을 마무리했다. 마
음 보태준 분들이 있어 그 시간을 잘 지났다.
김경선 아주머니는 끝까지 장례를 치르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셨다.
2026년 4월 29일 수요일, 신은혜
목사님과 함께 문병 다녀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버님께서도 김경선 아주머니 주변 분들 만나고 마음이 놓이신 것 같습니다.
장례 절차 참석하도록 거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아름
김경선 아주머니가 아버지 장례식에 가족과 함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가족들이 응당 함께한다는 듯 맞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장례에 잘 참석하고, 상속에도 잘 관여하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월평
첫댓글 '아주머니는 “아빠 없다”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를 만나 인사할 때면 "아빠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며칠간 이어졌습니다.
아버지를 잘 보내드리기 위한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경선 아주머니, 장례와 이후 여러 행정절차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신은혜 선생님, 옆에서 지켜보고 잘 도와줘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