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길, 사도직 활동
1코린 15,1-8; 요한 14,6-14 /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2024.5.3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 사도로 양성하신 열두 제자에 속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도의 삶과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도의 길과 사도의 직분 즉 사도직 활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당시 로마에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강렬했던 지사형 인물이었으나, 메시아를 고대하던 예언자들과 아나빔들의 신심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족함은 다른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보여준 시행착오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저지른 시행착오들이 뜻밖에도 오늘날의 제자인 우리들이 그분의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신앙을 고백했던 베드로는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것임을 밝히시자 정색을 하고 말리려 들었습니다. 그러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 하는 호된 질책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무안하게 질책받은 덕분에 우리는 십자가를 빼버린 신앙 고백은 진정한 고백일 수 없음을 알게 되었지요.
또 십자가의 이치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못 박힌 상처를 보지 않고서는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버티던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발현하셔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되다.”(요한 20,29) 하고 일깨워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 이전에도 공생활 내내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걸으셨고,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당신 자신을 일컬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뜻을 토마스 덕분에 부활 후에야 뒤늦게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굳이 십자가의 상처를 보지 않아도 십자가와 부활을 합친 길이야말로 그분이 보여주신 길임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기리는 필립보는 한 술 더 떴습니다.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다 듣고 나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요한 14,8)고 졸라댔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이 없어지신 예수님께서,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고 대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은 진리요 생명이신 하느님의 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어서 모든 제자들에게 더 이상 딴 말 하지 말라는 듯이 단언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2-13)
그런데 정작 당신보다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던 말씀을 실증해 보인 인물은 베드로나 토마스나 필립보 같은 열두 제자 출신의 사도들이 아니라, 박해자로 설치다가 뒤늦게 선교사로 발탁되어 사도로 자처했던 바오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이룩하신 성과보다 더 큰 성과를 가시적으로 올렸기 때문입니다. – 물론,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이룩하신 바를 감히 바오로의 선교적 성과와 겉모습으로만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3년 동안 좁은 이스라엘 땅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으셨고 그 중에서도 주로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사도 바오로는 20여 년에 걸쳐 세 번의 선교여행을 통해 드넓은 로마제국 강역 전체를 무대로 종횡무진 선교하러 다니면서, 에페소, 콜로새, 갈라티아 지방 등 소아시아 지역과 코린토, 테살로니카, 필리비 등 유럽 그리스 지역에 많은 공동체들을 세웠습니다. 그가 세운 공동체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이룩한 섬김과 나눔의 공동생활(사도 2,42-47; 4,32-37)로 복음을 선포한 것을 이어받아 사도 요한이 환시로 내다본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을 창조한 사회적 실체였고, 끝내 신앙을 박해하던 로마제국을 신앙으로 무너뜨린 역사적 실체였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번개 빛과 천둥 소리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사도 9장) 이래로, 이 공동체가 실제로 섬김과 나눔의 공동생활을 입증해 보일 때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였습니다. 그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겸손하게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 케파에게 먼저 나타나셨고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으며,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고,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6.8) 여기서 바오로가 말하려던 바는 케파 즉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과 함께 5백 명도 넘는 신자들이 예루살렘과 에페소를 비롯한 각지에서 이룩한 초대교회의 공동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발현하셔서 이룩하신 것임을 깨달았음을 두고 하는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동체에서 나눔과 섬김의 공동생활에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그 생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복음의 진리성을 상기시키고자 이 편지를 써 보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1코린 15,1) 그러고 나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1코린 15,2) 라고 증언하면서 거듭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사도들의 시행착오 덕분에 후대의 제자들인 우리가 소중한 진리를 손쉽게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들을 우습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바다 속에 살면서 바다를 눈으로 보겠다고 우기는 어린 물고기처럼,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의 우둔한 실존적 처지를 대변했을 뿐이어서 우리 역시 그들이 저질렀던 시행착오를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희화화(戲畫化)할 수 없는 이유는 더 있습니다. 그들이 걸어간 사도의 길은 역사적으로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양성하셨으며 일러주신 길이기 때문이고, 이 길이 평신도로서나 수도자 또는 성직자로서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사도직 활동의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삶으로나 활동으로서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우리보다 먼저 걸어간 귀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해서 평범한 제자의 처지에서 빛나는 사도의 직분을 받게 되었는지 하는 경위를 알아내는 일과,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과정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으셨다시피, 필립비와 야고보뿐만 아니라 열두 사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고 활동하는 특전을 누린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요한 14,9ㄷ)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대로, 사도들은 하느님을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하는 은총도 누렸습니다. 진복팔단의 다섯 번째인, “하느님을 볼 수 있었던 마음이 깨끗한 행복”(마태 5,8)을 차지한 인물들인 것이지요. 다만 그 행복을 그 즉시 알아차리지 못했었던 것 뿐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행복을 믿지 못하겠거든 당신께서 하신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으라고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확신에 찬 말씀에 따라 일생을 바쳐 사도로 살아간 이들을 본보기 삼아서 우리도 확신을 지니고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2.14)고 장담하셨는데, 그렇다면 이치상으로 우리는 현대의 물질문명 도구들과 사회적 시스템의 장점을 활용하여 이 사도들보다도 ‘더 큰 선교적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유리한 환경에 살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과 현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지요.
이 대목에서 성인 반열에 오르신 현대의 사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경고하듯 남기신 말씀을 떠올립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다수의 무신론자들과 소수의 신비가들로 채워질 것이다.” 교우 여러분!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를 기억하는 오늘, 우리의 삶과 활동 역시 사도로서의 삶을 걸어가며 사도직 활동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은총을 기도로 청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