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게임
옆이 허전해서 깨여난 옥화는 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발딱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에 놓여있는 돈다발과 편지가 눈에 띄였다. 편지를 훑어보고난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뛰여나갔다.
“안돼요, 선생님! 가시면 안돼요!”
역쪽으로 미친듯이 달려가는 그녀를 보고 주인 로파가 혀를 끌끌 찼다.
6시 10분 떠나는 서울역행 열차가 막 출발하고있어다.
“안돼! 안돼!”
열차를 따라잡으려고 그녀는 개찰구로 뛰여들었다. 역원이 잡는것을 뿌리치고 맹렬히 뛰였지만 열차는 그녀보다 빨리 달려갔다. 역원의 꾸지람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플래트홈에 서서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실컷 울고난 그녀는 다음 열차를 타고 최구를 뒤쫓아갔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였다. 신촌역에서 아무리 휘둘러보았지만 최구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안타까운 나머지 역광장에 서서 한동안 훌쩍거리며 울었다. 그것이 순찰경관의 눈에 띄였다. 그 경찰관은 옥화의 차림새와 머리에 유의했다. 도망치려는 그녀를 재빨리 움켜잡은 그는 부근 파출소를 그녀를 끌고갔다.
반시간도 못돼 오봉암형사가 달려왔다. 옥화가 한사코 부인하자 그는 그녀와 최구가 자취하던 E대앞에 있는 집 녀주인을 불러오게 했다. 옥화를 보자마자 그녀는 말했다.
“네, 이 아가씨가 틀림없습니다.”
옥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오형사가 묻는대로 순순히 대답했다. 오형사는 그녀를 데리고 교외선 열차를 탔다. 그리고 반시간후에는 고풍스러운 기와집에서 최구가 남기고 간 흔적들을 발견할수가 있었다. 최구가 옥화에게 써놓고 간 편지를 읽고나서 그는 한숨을 푹 내쉬였다.
“어디 갈만한데를 모르나?”
“몰라요.”
그녀는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왜 그렇게 울어대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나 있나?”
“네, 알고있어요.”
“살인범이야, 사람을 여섯명이나 죽인 흉악범이란말야. 그런놈을 알고있으면서도 신고도 안했어.”
“…”
“그런 살인범하고 함께 지내면서 무섭지도 않았나?”
“무섭지 않았어요. 오히려 불쌍했어요. 그분은 정말 외롭고 불상한 분이에요. 제가 그분이라도 어쩔수 없었을거예요.”
오형사는 단발머리의 어깨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도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어. 이해하고말고. 그의 행동도 이해하고있어. 그렇지만 어떤 이유로도 인간은 인간을 죽일수 없는거야. 그럴 권리는 아무한테도 없어. 최구는 아내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이유로 너무 엄청난 죄를 지은거야. 불쌍하고 가련하다는것은 다음 문제야. 그는 죄인이야. 사람을 여섯명이나 죽인 흉악범이야.”
옥화는 울음을 그치고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분은 체포될가요?”
“물론… 체포되고말고…”
“체포되면 어떻게 되죠? 사형당할가요?”
“물론이지. 한사람쯤 죽였다면 정상을 참작할수 있지만 여섯명이나 죽였으니 정상참작이고 뭐고 없지. 그는 일곱번째 살인을 계획하고있나?”
“모르겠어요.”
“그가 노리는 일곱번째 사나이는 체포되여 구속중이야. 최구는 그 사람을 죽일수 없게 됐어.”
“알고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야?”
오형사는 눈이 번쩍 빛났다.
“그렇지만 그분은 포기할수 없다고 하셨어요. 더구나 일곱번째는 절대 포기할수 없는 상대라고 그러셨어요.”
“음, 포기할수 없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끈질긴 사나이로군. 그건 그렇고… 옥화는 왜 그 남자와 동거생활을 했나? 경찰에 쫓기는 살인범하고말이야?”
“그분을 사랑해요. 우리는 깊은 관계까지 맺었어요!”
너무도 당돌한 말에 오형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범인 은닉죄로 그녀를 연행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묵인한채 잠자코 그곳을 나왔다.
최구는 어디로 갔을가? 그는 정말로 지강표를 노리고있을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그는 내내 이런 생각만 하고있었다.
그날 저녁 최구는 이발소로 들어가 머리를 짧게 잘라버렸다.
유행모양으로 머리를 자르자 인상이 상당히 달라져보였다. 이발소를 나온 그는 안전면도기와 면도날을 하나 구입해가지고 명동에 자리잡고있는 S호텔로 들어갔다.
커피점에서 커피를 한잔 마신 다음 그는 가명으로 519호실에 투숙했다. 이제 그는 기나긴 여행길의 종착역에 도착하려 하고있다. 먼저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갔다. 거의 한시간동안 물속에 죽은듯이 누워있었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추호도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허탈했다. 이루 말할수 없이 허탈했다. 욕조에서 나와 거울앞에 섰다. 눈섭에 비누칠을 하고나서 면도로 눈섭을 밀었다. 양쪽눈섭을 모두 밀어낸 다음 얼굴을 씻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몰라볼 정도로 변해버린 문둥병환자 같은 전혀 다른 모습의 사나이가 거기에 서있었다. 그를 최구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 같았다.
욕실을 나와 소지품을 정리했다. 자신과 관계되는것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마지막으로 처리하기 곤난한것이 남앗다. 거액이 예금되여있는 통장과 도장이였다. 아까 낮에 여러 은행에 예금되여 있는것을 모두 한곳으로 모아 통장을 하나로 만들었다. 예금액은 모두 6500만원이였다. 그동안 범인을 추적하는데 사용한 비용이 900만원 가까이 되였다.
지갑속에는 100만원 남짓한 현찰이 들어있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양복주머니속에 넣은 다음 빈 지갑속에 통장과 도장을 넣었다. 지갑을 침대밑에 밀어두고 수화기를 들었다.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아있었다. 다이얄을 돌렸다.
“살인과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오봉암형사 계십니까?”
“네, 잠간 기다리세요.”
조금후 느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봉암입니다.”
“…”
“여보세요? 누구시죠?”
“최구입니다.”
“뭐, 뭐라구?”
경악하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저때문에 고생이 너무 많으시군요. 미안합니다. 얼마 가지 않아 곧 끝나게 될겁니다.”
“이봐, 당신 지금 어디 있어?”
“아실 필요 없습니다.”
“뭐라구? 좌우간 만나서 이야기하자. 남자 대 남자로 만나자구.”
“그건 안됩니다.”
“그럼 어쩌겠다는거야? 어차피 너는 체포될수밖에 없어! 체포되는거보다 자수하는게 낫단말이야! 유옥화도 찾아냈어!”
“그 아가씨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그 아가씨한테 손대지 마십시오!”
“손대지 않을테니 만나자!”
“지금은 안됩니다.”
“바보같은넘! 불쌍한놈! 지금 있는데가 어디야?”
“어느 호텔 519호실입니다. 이 방 침대밑에 통장을 놓고 갑니다. 통장에는 6500만원의 돈이 들어있습니다. 통장과 도장을 오형사님께서 보관해주십시오. 오형사님을 믿기때문에 부탁드리는겁니다. 열쇠는 복무대에 맡겨두고 가겠습니다.”
“어느 호텔이야?”
“찾아보십시오.”
“그러지 말고 만나!”
“전자계산기 예금이기때문에 암호를 모르면 예금을 인출할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제가 지정하는 사람에게 그 통장을 내주십시오. 그 사람은 암호를 알고있을겁니다. 자, 안녕히 계십시오.”
“이봐! 이봐!”
악쓰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수화기를 철컥 내려놓았다.
그는 허탈에 빠져 한동안 멍하니 침대우에 걸터앉아있다가 급히 밖으로 나갔다. 복무대에 열쇠를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경에서 사람이 올겁니다. 오봉암이라는 형사가 오면 열쇠를 내주십시오. 난 잠시 나갔다 올테니까.”
11시가 가까운 밤거리는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그는 거리를 돌아보면서 방향도 없이 느릿느릿 걸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골목안에서 일본 노래소리가 들려오고있었던것이다.
먹이를 발견한 짐승처럼 그는 골목안으로 들어섰다. 노래소리는 어느 일식집 2층에서 들려오고있었다. 술취한 일본인 관광객들이 합창을 하고있었다. 불쾌하고 기분 나쁜 소리였다. 마땅한 대상이 없어서 망설이고있던 그에게는 좋은 대상이 아닐수 없었다. 일식집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종업원이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2층을 가리켰다.
“일본인들인가?”
“네, 그런데요.”
“좀 볼일이 있어서 그래.”
계단을 오르려고 하자 종업원이 소매자락을 붙잡았다.
“왜 그러시는겁니까?”
“볼일이 있어 그런다니까!”
종업원을 뿌리치고 2층으로 올라간 그는 노래소리가 흘러나오고있는 방문앞으로 다가섰다. 문턱밑에는 빈 맥주병이 여러개 놓여있었다. 병을 거꾸로 집어든 다음 방문을 벌컥 열었다. 일본인들과 그 사이에 끼여있는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구두를 신은채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 건방진 왜놈의 자식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큰소리로 노래를 하는거야?”
맥주병으로 술상을 힘껏 후려쳤다.
유리쪼각이 사방으로 튀고 음식이 뒤엎어졌다.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일본인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구석으로 몰려갔다.
“무슨 염치로 이 땅에 와서 큰소리로 노래하는거야? 얌전히 왔다가 얌전히 돌아갈것이지. 노래는 왜 불러? 개같은놈들! 또 우리 땅을 먹고싶느냐? 식민근성이 남아있다면 당장 없애주마!”
술상을 뒤엎고 닥치는대로 때려부셨다. 깨진 술병을 휘두르며 미친듯이 날뛰는 그를 보고 종업원들도 혼비백산했다. 일본인들을 잡고 그는 계속 난동을 부렸다.
“모두 꿇어앉아!”
네명의 일본인은 그가 시키는대로 모두 꿇어앉았다. 중년의 사내들이 하나같이 겁에 질려 떨고있었다.
“이걸 먹어! 손을 대지 말고 입으로만 먹어!”
일어를 아는 여자로 하여금 통역하게 했다. 망설이는 일본인을 구두발로 걷어차자 그들은 개처럼 엎드려 방바닥에 흩어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하나 남김없이 모두 먹어라!’
어물거리는자는 구두발로 뒤통수를 찍었다.
경찰이 연락을 받고 들이닥친것은 20분쯤 지나서였다. 기동경찰들이 총을 들이대자 최구는 손을 저었다.
“5분만 여유를 주시오.”
그는 맥주 한병을 통째로 꿀꺽꿀꺽 마셨다. 10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듯 했다.
“코를 방바닥에 대고 엎드려 있어! 일어나면 죽인다!”
일본인들은 시키는대로 코를 방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개새끼들!”
그는 바지를 내리고 남근을 꺼냈다. 그리고 일인들의 머리위로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몸을 떨면서 고스란히 그의 오줌을 받았다. 기묘한 광경이였다.
소변을 보고난 그는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자, 체포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