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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해야 할 이단적인 가르침!
(2) 고린도전서 15장 45-46절에 대한 곡해!
고린도전서 15:45-46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김명현 박사는 창세기 2장 7절에 이어 이 구절을 아담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혼만 있고 영은 없었다는 증거로 제시합니다. 이 구절에도 창세기 2장 7절에 나오는 "생령"(생혼)이 나옵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혼"을 뜻하는 "프쉬케"로 창세기 2장 7절에 나오는 히브리어 네페쉬(혼)의 역어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동의어입니다.
이처럼 두 곳 다 아담이 살아 있는 혼외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이곳에서는 살아 있는 '혼'과 반대로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락없이 김명현 박사의 주장이 옳아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문자적으로 보면 틀림없이 옳은 것 같은데 왜 바른 것이 아닐까요?
1)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것은 아담은 혼만 있고 예수님은 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옳게 파악하려면 문맥을 잘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0-44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처음과 끝 부분을 주목하십시오. 보이는 것, 즉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두 세상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바로 하늘과 땅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기에 적합한 두 가지 몸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여기서 "육의 몸"은 육에 몸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육적인 세상을 살기에 적합한 몸을 뜻합니다. 또, 영의 몸도 영의 몸이 아닙니다. 즉, 영체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살기에 적당한 부활체를 뜻합니다. 육의 몸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5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또한, 데이비드 갈런드는 정리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다면, 또한 영적인 몸도 있다.' 이 대조는 이 몸들이 적절할 수 있는 장소들 사이의 양극성, 곧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을 가정한다. ... 첫 번째 몸은 창조에서의 존재에 적절하다. 두 번째 몸은 장차 올 세상에서의 존재에 적절할 것이다."
이처럼 두 세상과 거기에 적합한 두 가지 몸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음 45절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구절은 "기록된 바"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문구는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할 때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영과 혼이 아니라 두 가지 몸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45절에서 육의 몸과 영의 몸의 두 가지 근거가 아니라 한 가지만 제시했습니다. 바울은 오로지 육의 몸의 근거가 되는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했습니다. 저는 항상 이 점이 이상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가 44절 후반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 ...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육의 몸이 있으면 영의 몸도 있다! 바울은 이것을 기정사실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의 몸의 근거를 제시하면 영의 몸도 있다는 것도 자동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래서 육의 몸의 근거 하나만 제시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45절 전반절을 읽어보십시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우리는 이미 이 구절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여기서 "생령"은 영이 아니라 혼입니다. 그렇다고 아담에게 영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영에 이어 혼이 창조됨으로 인간 창조가 완성되어 다른 동물들처럼 생명과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는 살아 있는 존재(생명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에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다시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홍인규 교수님의 글을 인용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콩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명 있는 존재'(living being)가 되게 하셨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15:45a; 참조. 창2:7). 여기 '프쉬케 조사'는 한글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생령'(개역개정), '산 영'(표준새번역개정), '생명 있는 존재'(공동번역). 그런데 가장 적절한 번역은 '생명 있는 존재'(living being)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약간 다른 의미로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육의 몸의 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이 세상에 적합한 육의 몸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가 창조될 때부터 아담과 그 후예들은 육의 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세상에 적합한 육의 몸의 근거로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담에게 혼만 있고 영은 없었다는 것과 무관한 표현입니다.
다음으로, 앞에서 한 설명을 염두에 두고 45절 후반절을 보겠습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아담과 달리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문제는 "영"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먼저 "살려주는"이라는 표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살려주는'은 무슨 뜻일까요? 많은 이들이 거듭나게 한다는 뜻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고, 거듭남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다루고 있는 곳입니다. 때문에 데이비드 갈런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것과 동의어다(롬4:17; 8:11; 고후3:6)."
또, 바울은 그 전에 이미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1-22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또한, 44절에서 45절을 문맥에 주의하면서 읽어보십시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여기성 "육의 몸"은 아담에게 물려받은 몸이고, "신령한 몸"과 "영의 몸"은 예수님이 주실 부활체입니다. 그것을 44절에서 말한 후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45절)라고 썼습니다. 그러므로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는 것은 장차 우리 죽은 몸을 부활시켜서 신령한 몸을 갖게 해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아담을 통해서 육의 몸을 받은 것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신령한 몸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살려주는"이 부활을 뜻하는 것이 맞지요!
이로 보건대, 바울의 의도는 아담과 달리 예수님은 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동물들처럼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몸을 가진 존재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몸을 지니셨을 뿐 아니라 똑같은 몸을 우리에게 주실 분이라고 설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살려주는 영"이라는 표현은 결코 예수님이 아담과 달리 영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살려주는 "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왜 "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주석들일 읽어보아도 만족스러운 답이 없고, 저도 이 부분이 참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분으로 영 혼 육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을 '영'이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 외에 딱 한 번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예수님을 영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스캇 하프만과 그랜트 오스본은 전 절인 16절이 출애굽기 34장 34절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이 구절의 "주"가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16절은 출애굽기 34장 34절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1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 후 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그러므로 16절과 17절에 나오는 "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17절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영'이라고 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여러 주석들에 나온 것처럼, 이것은 6절의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은 살리는 것"에 나오는 "영"은 로마서 7장 6절에서와 같이 성령을 뜻합니다. 그래서 일부 번역본과 학자들은 "예수님이 곧 성령이시다!" 즉 삼위칠체적인 표현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로 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17절)에서 '주'와 '주의 영'이 서로 구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니"를 "예수님이 곧 성령이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폴 바넷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 견해(예수님=성령님이라는 견해-저자 주)에는 문제가 많다. 하나는 우리가 신약에 나오는 사도의 전도에 대해 듣는 메아리에서 청자가 '돌아오는' 대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 '성령으로 돌아간다'는 개념은 신약의 사상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곧 성령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그런 뜻이 아닌데 왜 '영'이라고 했을까요? 바울은 6절에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바로 살려주는 일을 하시는 분이다! 그런 뜻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칼빈도 "이 진술은 ... 그리스도의 본질과는 사무 상관 이 없으며 단지 그분의 직무를 지적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역할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도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여기서 "자유"는 '윱법에서의 자유'와 '죄의 지배에서의 자유'를 뜻합니다. 콜린 크루즈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이 살았던 시대의 유대인들처럼 옛 언약(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길 추구하는 시대) 아래서 살게 될 때는, 자유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율법의 요구는 충족될 수 없고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될 뿐이다. 그러나 영의 계약 아래에서는 자유가 있다. 더 이상의 죄에 대한 기억이 없고(롬4:6-8), 죄인들에 대한 정죄가 없다(롬8:1). 성령 자신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고(롬8:15-16), 영을 따라 행함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롬8:3-4)."
예수님을 믿을 때 주의 영이 주어지고, 그 결과 우리는 율법뿐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자유케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을 "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의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는 무슨 뜻일까요?
이미 살펴본 대로, 아담은 단순히 혼이 아니라 영을 갖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는 말을 "아담과 달리 예수님은 영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면 왜 여기서 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40-44절에 의하면, 두 세상과 거기에 적합한 두 몸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45절을 이해하는 키라고 생각합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구절은 "기록된 바"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문구는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할 때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영과 혼이 아니라 두 가지 몸에 대해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또, 46절의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도 그 뒤 구절들까지 보면 아담과 예수님 등 사람까지 포함하지만 이 구절 자체(원어)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을 뜻한다고 번역한 번역본과 그렇게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육의 몸'과 '신령한 몸'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사람에 대해 말하는 그 뒤 구절들(47-49절)도 "형상", 즉 '육의 몸'과 '영의 몸'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자연적인 몸을 가진 것을 말한 것이고,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는 "되었다 함과 같이"가 보여주듯이, 단순히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가지고 있는 신령한 몸에 초점을 맞춘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몸에 초점을 맞춰서 말했는데 왜 '살려주는 영'이라고 했을까요? 두 가지로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가 아니라 후서에 나오는 말씀이지만 "영은 살려주는 것"이라고 했으므로,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처럼 예수님이 살려주는 분이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어 우리의 죽은 몸을 다시 살릴 분이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롬8:11, 고전15:22). 그러므로 예수님의 역할을 영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그 전에 '육의 몸'과 '영의 몸'이 나오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몸인데 '영의 몸' 즉 '신령한 몸'이라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원어로는 '영의"라는 단어와 '신령한'이라는 단어가 "프뉴마티코스"라는 한 단어입니다. 이것은 영을 뜻하는 프뉴마에서 유래했고, "영적인(spiritual)"이라는 뜻입니다.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는 "영적인(spiritual)"인 또는 "영에 속하는(pertaining spirit)"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육적이지 않고 영적인 몸입니다. 때문에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 고린도전서 15:45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몸까지도 영적인 혹은 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살려주는 영"이라고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0:27-36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이처럼 부활하면 우리의 몸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죽는 것과 상관없는 영들인 천사와 동등 혹은 유사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을 "살려주는 영"이라고 표현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제 설명에 만족하셨습니까? 혹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만족하지 못하셨어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살려주는 영"이 아담과 달리 예수님은 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12: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이사야 57:16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이처럼 성경은 아담이 처음부터 영을 가진 존재로 지음받았고 모든 사람이 영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성경은 불신자들도 영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많은 이들이 영이 죽은 것을 영이 없다는 뜻으로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 불신자에게도 영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구들이 많습니다.
욥가 34:14-15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여기서 "그의 영과 목숨"은 김명현 박사의 주장처럼 영은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에게 빌려주셨다가 다시 거두어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영과 목숨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과 목숨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의"가 영뿐 아니라 목숨까지 받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특히, "모든 육체"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에게 영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46:3-4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영-루아흐)이 끊어지면(야차: 나가다, 나오다, 떠나다)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상식이지만, 귀인들과 도울 힘이 없는 인생들이 전부 믿는자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 속에 불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에게 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도 불신자에게도 영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이 구절 역시 불신자들을 포함합니다. 같은 장 1-2절에서 솔로몬이 이런 말로 시작했습니다. "전에"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이 단어는 이들이 아직 창조주에게 돌아오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바로 전에 있는 구절들을 읽어보면 그 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전도서 11:9-10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이것은 신불신 구분 없이 모든 청년들에게 주는 권고입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그 후 12장 7절에서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도 불신자에게도 영이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더 나아가, 이처럼 문맥이 아니라 구절 자체가 불신자의 영의 존재를 보여주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신명기 2:30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루아흐-영)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다니엘 5: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루아흐-영)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시편 78:8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루아흐-영)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이 구절들은 불신자들과 명목상의 신자들에게도 영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45절이 예수님이 아담과 달리 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그 구절은 결코 아담에게 혼만 있었고 예수님에게는 영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2) 고린도전서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이 구절에 나오는 "신령한 사람"은 원어로 "프뉴마티코스"이며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영에 속하는"(pertaining spirit), 또는 "영적인"(spiritual)을 뜻합니다. 또 "육의 사람"은 원어로 "프쉬키코스"이며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영혼에 속하는, 육적인, 천성적인"을 뜻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사람은 영을 가진 예수님이고 육의 사람은 혼만 있고 혼에 속하는 아담을 뜻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김명현 박사의 주장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앞 절에서 바울은 인류의 두 조상에 대해 말했습니다. 생령이 된 아담은 몸과 관련해서 인류에게 육의 몸을 물려준 조상입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살려서 영의 몸을 갖게 해주실 조상입니다. 바울은 46절 이하에서도 두 조상에 대한 설명을 계속합니다.
고린도전서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바울은 이 구절에서 아담은 육의 사람이고 예수님은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담은 혼만 있고 예수님에게는 영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같은 단어들을 사용한 고린도전서 2장 14-15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프쉬키코스)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곳에서 바울은 똑같은 단어 '프쉬키코스'와 '프뉴마티코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프쉬키코스'("육에 속한")과 '프뉴마티코스'("신령한 자")가 '혼만 있고 영은 없는' 혹은 '영이 있는'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담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그 시대 사람들에 대한 언급인데, 그들 모두 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6절도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육의 사람"과 "신령한 사람"이 혼만 있거나 영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그 뒤에 나오는 구절들을 통해 그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6절의 "육의 사람"의 "육"과 이 구절의 "땅" 혹은 "흙"은 서로 그 뜻이 통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의 몸("육")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를 통해, 우리는 "육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혼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빚은 몸과 관계있는 표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아담을 "육의 사람"(46절)이라고 부르다가 "흙에 속한 자"(47절)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아담은 왜 육의 사람입니까? 그것은 혼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땅에서 난, 즉 흙으로 만든 흙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신령한 사람인 이유 역시 영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흙이 아니라 하늘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흙에서 난 아담의 몸은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난 예수님의 몸은 영원무궁합니다. 폴 가드너는 47절을 주해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했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창세기 2:7b을 인용했으나 지금은 2:7a을 인용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바울은 아담을 창세기 창조 기사에 묘사된 대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땅의 흙으로 지으셨다. 이것은 아담을 땅에서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로 규정한다. 사실 창세기 2:7 자체는 지음받은 사람과 그가 살아야 할 땅의 이런 긴밀한 연계성을 계시한다. '사람'(아담)은 '땅의 흙'(아다마)로 형성된다. 확실히 '아다마'로부터 취해진 아담은 '아다마'를 경작해야 하고, 결국은 '아다마'로 돌아가야 한다(창3:19, 23). 그러므로 아담이 '땅에서 난 자'라는 말은 그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관념도 함축한다.
따라서 바울이 창세기 2:7을 인용하는 것은 여기서 두 '몸'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아담은 '땅'과 필수적으로 관련된 존재로 지음받았다. 마찬가지로 사람이신 그리스도도 지금 자신의 새로운 실존 영역과 필수적으로 관련되는 방식으로 다시 살아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한 이'로 묘사되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실존에 적합한 분으로 규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썩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반영하는 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46절은 아담은 혼만 있고 예수님은 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견해는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며 매우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첫댓글 근데 궁금한게 있는데 올려주시는 자료가 요약인지 아니면 풀타이핑 해서 올려주시는건지 궁금합니다
풀타이핑
진리수호 목사님이 올리는 글들은 본인이 직접 타이핑한 엄청난 수고의 결과입니다(다른 사람이 올리는 글들은 오히려 방해가 됨). 또한 저 같은 경우는 휴대폰으로 비교한다면 최첨단의 제품을 무료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즉, 성경과 가장 일치 된 진리를 편하고 쉽게 맛보고 있습니다. 이 카페에 많은 회원이 가입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목사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