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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의를 내세우지 말라 (눅18:9-14절)
미국의 컨콜디아사에서 발간한 ‘중국 한자 속에 나타난 천지 창조’라는 책에 B.C2200년 경 중국은 동지와 하지에 하늘을 향해 제사를 드렸는데 그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오성이 운행하기 전에, 태양과 달이 운행하기 전에, 공허와 암흑뿐인 이 땅이 창조되기 전에, 찬란한 영광이 빛나는 하늘에 대 전쟁이 있었고 우주의 통치자 신황이 왕으로 오셔서 선악을 분리시켰다. 신황이 하늘을 열고 땅을 펴시고 인간을 자기 모양대로 창조했다. 신황의 능력으로 만물이 지음을 입은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부터 4천여 년 전에 중국의 제사 비문에 하나님의 창조를 알리는 내용을 적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신황’의 존재가 성경에서 말하는 뱀인지, 아니면 중국인들이 숭상하는 하늘의 용인지, 그것도 아니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신지,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고대 중국인들이 성경이 말하는 창조에서 영향을 받아 비문에 기록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중국의 상형 문자가 하나님의 창조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들다’ ‘짓다’ 라는 뜻의 한자어 ‘지을 조’는 먼지와 흙을 나타내는 ‘토’자에 동작을 나타내는 ‘획’을 더하고 그 아래에 ‘입구’를 쓰고 그 아래에 움직인다는 뜻의 ‘갈지’자를 썼습니다. 이를 풀이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움직이는 생령이 되었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어느 목사님의 기도문을 받고 나서 생각을 하다가 제가 늘 애송하는 시편 8편의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여 천지와 만물을 참으로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해와 달과 별들을 한 번 보십시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밤잠을 청해 보십시오. 가슴이 뛰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벅찬 감격과 진한 감동을 맛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자기의 모양대로, 그대로 만드셨습니다. 부산을 다녀오는 중에 휴게소에 들려 떡뽁이를 먹는데 손녀가 너무 매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을 보고 인간에게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동물은 음식을 먹을 때 맛을 모릅니다. 유독 우리 인간에게만 맛을 느끼게 하셔서 먹는 즐거움을 주신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시139:13-14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어느 자연 과학자가 말하기를 ‘하나의 물방울 속에는 3만개 이상의 미세한 생물들이 살고 있는데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매우 작으면서도 각자의 뼈와 근육과 신경과 허파 등의 전체 기관을 갖춘 완전한 생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에쉴리 몽타뉴라는 과학자는 말하기를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류의 아버지 쪽의 유전 정보를 모은다면 그 양은 단지 아스피린 반 알보다 작을 것이다. 그 유전자의 지름은 11억 4천만 분의 1cm로 추산되며 보통 바늘 끝으로 만들어진 구멍으로 50만개의 유전자가 동시에 통과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전 정보를 지닌 DNA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완벽한 솜씨입니까. 거기에다 하나님은 인간을 양심과 이성과 인격과 영혼을 지닌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목표는 베드로의 말처럼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형 모델로 하여 그 거룩한 형상을 닮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자기에게 매여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자기 자랑과 교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 바리새인들입니다. 저들은 항상 자신들을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매일 드리는 기도 속에는 ‘의롭다’라는 말의 개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의’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의’인 것입니다.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눈이 하나 밖에 없는 애꾸였습니다. 하루는 그의 집으로 화가를 불러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화가는 한 쪽 눈이 감긴 모습을 그대로 정직하게 그렸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본 한니발은 대노했습니다. ‘왜 나를 병신으로 그렸느냐.’ 장군은 화가 치밀어서 분을 참지 못하고 그 화가를 당장 끌고 나가서 목을 치라고 명합니다. 그 화가는 그림을 진실하게 그린 죄로 죽고 말았습니다. 장군은 다시 다른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앞선 화가가 눈이 하나 없는 모습을 곧이곧대로 그린 죄로 화를 당했다는 사실을 안 두 번째 화가는 두 눈이 다 있는 멋있는 한니발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한니발 장군은 대노합니다. ‘내 눈이 어째서 둘이란 말이냐. 이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야.’ 이 화가도 역시 참수를 당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세 번째 화가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니발의 감긴 눈이 보이지 않도록 그의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였고 칭찬과 함께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을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 어디에 관심을 두고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관심의 향방이 문제입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의 철학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방향에 따라 성공한 것이 되기도 하고 실패한 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지식이나 직위를 다 가졌다 해도 내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으면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져야 할 최대의 관심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관심,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관심은 바로 ‘의’입니다. ‘의’를 최대의 관심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의’를 상실한 삶은 후회가 따르고 ‘의’가 침해되는 삶은 아픔과 고통을 수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배만 부르다고 만족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의’ 때문에 행복해지기도 하고 ‘의’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제 일본이 우리를 백색 국가의 명단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백색 국가’라는 말은 군사적으로 우방 국가를 의미합니다. 그 반대말은 ‘적색 국가’입니다. 이제는 우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적색 국가로 취급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도 아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친구도 원수도 아닌 그냥 그런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사 정보 보호협정’을 파기하자는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저들의 이러한 조치에 우리나라도 일본을 백색 국가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서로 막가자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를 적대시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대일 청구권 문제이고, 이어서 과거사 문제이며, 또 북한과 소통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가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과 친구가 되는 것은 일본과 적국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한국을 고통 속에 빠뜨리기 위해 전국에 그 방안을 응모하였고 무려 백 가지가 넘는 방안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경제 보복입니다. 둘째는 투자되어 있는 금융의 회수입니다. 셋째는 모든 방면 즉 학술, 예술, 사회적 교류에서 단절일 것입니다. 아주 철저히 박멸하겠다는 심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응은 미흡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치계나 경제계나 사회나 국민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합니다. 모두가 자기들만 의롭다고 각자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적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군끼리 물고 뜯습니다. 일본이라고 야당이 없겠으며, 정부에 반대하는 각 계층의 목소리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의’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나의 의’입니다. 나의 세계관, 나의 가치관, 나의 양심에 따라 스스로 세운 ‘의’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행동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작금의 일본이 하는 행동이 이런 것입니다.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면 이웃이 죽든지 세계가 망하든지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오로지 과거에 자행했던 군국주의의 회복만을 생각하고 남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삼권이 분립된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법원의 판결을 행정부가 좌지우지하지 못합니다. 대법원이 일본에 강제 노동을 당한 사람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에 일본이 경제보복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지만 이것을 해결하려고 우리 정부가 일본 기업 대신에 돈을 지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행정부가 사법부를 농간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요구는 우리 정부가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그것을 백지화하기 전에는 경제보복을 계속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상대적인 의’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비교되고 타협되는 의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의 판단이, 나의 행동이 상대에 인정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해지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힘쓴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칭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신경을 쓰다 보니 진실이 결여되고 나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이런 성향이 짙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같이 어려운 상황에 일본을 이해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국의 중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자는 주장을 합니다. 미국이 아무리 우리의 우방국이라 할지라도 저들은 일본과도 막역한 우방입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의 편을 드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국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역사 이래로 단 한 번도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문제만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외세에 의존하고 외세에 의해 적당히 모면하려는 얕은 술책을 쓰는 것입니다. 사실 지난달에 우리는 일본에 특사를 두 번이나 파견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 있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있습니다. 곧 인생의 궁극적인 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라가는 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있는 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관계 역시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통합적인 의는 인생에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의는 결코 하나가 될 수도 없고 하나로 통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내 의가 사라집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에는 나의 의가 나타나고 그것을 다른 사람도 인정해 주는데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또 의가 무너집니다.
또 어떤 경우는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나의 의도 올바르게 나타나는데 믿는 세계에서도, 세상 사람들도 이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의 길을 가는 것은 외롭고 고독한 길입니다. 오로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달려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갈 때에는 나의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내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배드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하나님께 나를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말하기를 ‘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을 부인하면 나의 존재는 없어지며, 하나님을 시인할 때 나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나를 아는 것은 한 사건 속에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동안에 내가 나를 알게 되고 나의 진실을 찾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밝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모든 일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예배이며 그래서 예배만은 진실하고 성실해야 하며 예배 안에 내 존재의 의미가 있고 내 생명의 뿌리가 있고 내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의’에 관심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성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시작이나 관점이나 행함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볼 때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자기가 잘한 것을 자랑하며 자기 의를 내세우다가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의 예배는 인생을 아름답게 창조해 주신 하나님의 의를 배반한 것이요, 인간이 만든 계명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워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 예배를 드리지 못했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고, 자신을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 의를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그저 엎드려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모습도 발견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예배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은 자기중심적이요,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배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과 자기 수고를 내세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한 마디 부르고는 ‘나는’ 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시종일관 ‘나’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것 같지만 교만한 사람이요, 영적인 사람인 것 같지만 육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도 못 보고, 이웃도 보지 못합니다. 아주 어리석은 사람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특별히 구별합니다. 내가 더 의로운 사람, 내가 더 겸손한 사람, 내가 더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대만에서 어떤 목사님이 ‘참 진’자를 써서 ‘진 교회’라고 교회 이름을 정했더니 그 다음에는 ‘진진 교회’ 그 다음에는 ‘진진진 교회’라고 이름을 짓더라고 했습니다. 어디 대만에만 그렇습니까. ‘복음 교회’ 다음에는 ‘순복음 교회’ 라고 짓고, ‘소망교회’ 다음에는 ‘새 소망교회’ ‘참 소망 교회’ 나중에는 ‘예수 소망교회’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까.
사람마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자 하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하게 보이고 싶고 잘난 척 하고 싶은 것이 인생입니다. 아이들이 밖에서 싸우고 들어왔을 때 ‘다른 아이들은 못돼 먹어도 상관이 없지만 너만은 그러면 안 된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너는 특별하다’ 이렇게 자녀 교육을 시켰다가는 보통 아이들보다 더 문제가 많은 아이들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랍비들의 기도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학원에 있는 자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길모퉁이에 앉아 있는 자들과 함께 있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율법에 따라 일찍 일어나고 다른 사람들은 헛된 일을 위해 일찍 일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수를 받고 저들은 노동의 대가로 보수를 받게 하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다가오는 세상을 향해 달리지만 저들은 파멸의 함정을 향해 달려가게 하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감사기도입니까. 얼마나 그릇되고 교만한 마음입니까.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한다고 자랑합니다. 사실 알고 보니 이틀이 아니고 두 끼니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끼니 정도는 모두 금식합니다. 그러나 나는 저들보다 많이 두 끼니를 먹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라는 규정이 없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모든 근채의 십일조를 바치라는 규정도 없습니다. 이는 모두 장로의 유전을 따른 것으로 자기들이 만든 법이었습니다. 이것을 지키는 일이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자랑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영적인 자랑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기도를 많이 했다든지, 선한 일을 많이 했다든지, 이런 것은 무서운 영적 교만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십일조를 많이 드렸습니다. 나는 구제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이런 자랑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의로움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일이어야 합니다.
외부에 나타나는 장식이 너무 요란하면 그 내용이 충실하지 못합니다. 외양을 많이 가꾸면 속이 비었다는 것이요, 말이 많으면 속에 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빈 깡통이 더 요란하고 빈 달구지가 더 소리가 많아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달구지에 짐을 가득 실으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빈 달구지는 비포장도로를 갈 때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말이 많습니다. 그들은 의식, 형식, 외식이 많았기 때문에 자랑할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말이 적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말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치고 있을 때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이나 고집을 버리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두 배에 가득 차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기가 주를 떠난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드렸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베드로는 주님의 축복과 능력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시도록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누구에 대한 원망도 없습니다. 세상이 험하고 악합니다. 로마는 어마어마한 권력으로 유대를 핍박합니다. 경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한 지경에 이르렀고 유대 나라의 지도자들은 로마의 권력에 붙어서 아부하고 치부합니다.
당장 먹고 살아갈 방법이 없고 그 어느 곳에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리는 하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하소연이라도 해야 합니다. 도움을 요청하고 먹고 살길을 열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로마를 물리쳐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왜 이 백성들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형편을 외면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절망하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와 과부들입니다. 세리들입니다.’ 이렇게 부르짖어야 옳지 않습니까. 아니면 세리는 그래도 자기들은 로마의 주구가 되어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리는 단 한 마디의 말 밖에 하지 못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의 잘못입니다.’라고 합니다. 회개는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회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자백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힐라스데티’는 일반적인 용서를 빈다는 의미도 있지만 복을 달라는 의미도 있고, 의를 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벌을 면하고 저주를 피하게 해달라는 간구의 뜻은 아닙니다. 다만 긍휼을 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자세입니다. 지난날에는 잘못했으나 앞으로는 잘 할 것이니 한 번만 눈을 감아달라는 말이 아니라 그저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의 긍휼하신 처분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폴란드의 천문학자이며 수학자요 저술가인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천동설을 믿고 있을 때 그는 혼자서 지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위대한 천문학자였기 때문에 태양이 지구를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공전한다는 사실을 밝혀 낸 것입니다. 그는 이 일 때문에 교황청으로부터 심한 문책을 받고 징계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양심을 굽히지 않았고 죽음을 택하며 지동설을 고집하였습니다. 그가 임종을 맞이했을 때 사람들이 그의 묘비명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 묘비에 이렇게 적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주님, 저는 베드로에게 보여 주신 그 친절을 구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내려주신 그 은혜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그 강도에게 베푸신 자비만을 구합니다. 진정으로 그 자비를 구합니다. 아멘.’ 그는 은혜를 많이 달라고 조르지도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부족하고 허물 밖에 없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만을 베풀어달라고 소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하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소원이 너무 많습니다. 약속도 많고 서원도 많습니다. 지금까지 말로 한 약속이 산더미 같이 많은데 아직도 수많은 약속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예배자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생각하고 내 모습을 생각하고 나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너무 복잡하고 바라는 것도 많고 간구하는 것도 많습니다.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기도 하고 온갖 원망이나 불평을 쏟아 붓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납니까. 하나님을 만난 자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진지하신 하나님, 나의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을 만났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무엇을 줄까.’ 그때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주여, 나의 소원을 반납합니다.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한국을 죽이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차근차근 공경해 올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은 러시아와 체결한 핵무기 감축과 비핵화를 탈퇴하였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러시아나 중국이나 자신들이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기 위하여 무기 경쟁을 하고 핵무기를 양산하고 약소국가를 지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작금의 사태는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며, 평화시대가 아니라 전쟁의 시작이며 드디어 마지막 전쟁을 향하여 인류가 달려가고 있습니다. 각국마다 서로에 대하여 경제 선전포고를 하고 있으며 혼돈의 시대, 격동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너무나 근시안적인 시각을 가지고 일본 한 나라만을 상대로 생각하고 안일한 처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교회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의를 내세우지 말고 바로 세리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한 마디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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