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같으면 사랑하는 두 남녀가 연탄 한장 피우는 하꼬방에서 꼬옥 끌어 안고는 마이 다링 아이 러부 유
어쩌고 하면서 잼나게 살았지만 요즘은 시애미가 깔고 앉은 부동산이나 장인 어른의 따박 따박 월세 받는
점포들이 뒷받침 안해 주면 그 결혼은 반수 이상이 허방 이라고들 하듯이 산이 제 아무리
수려하고 아름다워도 날씨가 도와 주지 않으면 이 또한 말쨩 꽈당 이라고 하는데 오늘 우리 느림보님들이
찾는 보은 구병산은 구비 구비 펼쳐 진 아홉폭 병풍의 절묘한 산세와 함께 날씨 또한 딱소리 난다.
보은 읍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속리산면 구병리는 의외로 첩첩산중인 외진 곳이고 논때기는 거의 보이질
않고 도로변을 따라 이어 지는 자그만 밭엔 이 고장 특산품인 대추가 빼곡하게 심겨져 있다. 대추는
남자아이를 상징하기 때문에 잔칫날 폐백 드릴 쩍에 이 대추를 던지고 사람이 죽어서도 무덤 앞에도 마치 촛대
처럼 두 돌기둥을 세우는데 이 망주석 또한 남자 가운데 토막을 뜻하고 망주석엔 하늘로 혹은 땅으로 향하는
다람쥐가 여러 마리 보이는데 사실 이 동물은 다람쥐가 아니라 세호(細虎)라는 상상의 동물이다. 대추는
배수가 잘 되는 사질토에서 잘 자라서 그런지 구병산 계곡은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구경하기 어려운 건천이
된다. 그리고
동네 집 주위로 잎이 시원스래 생긴 호두나무 또한 여럿 눈에 띄고 어떤 농가에선 커다란 가마솥에 곤드레
나물을 항거석 찌고 있었는데 호두는 추자 라고도 하고 탈피 하기 전의 열매 모양이 복숭아 같아서 오랑캐
복숭아 즉 호도(胡桃)라고도 하는데 물컹한 껍질이 있는 호도를 잠시 땅에 묻었다가 꺼내면 탈피가 되어
알라 붕알 처럼 생긴 쬬글이 호도가 나온다고 한다. 우리 어릴 적엔
보은 물고구마를 참으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요즘은 어쩐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구병리 마을엔 특산주인 송로주를 파는 가게와 함께 버섯찌개나 닭도리탕을 파는 식당도 눈에 띌 뿐
아니라 민박, 펜션 또한 만만치 않게 들어 서 있다. 사람이나 동물은 용변을 볼 적엔 항시 으슥한 곳을 찾는데
이는 남에게 소중한 곳을 보여 부끄럽기 때문에 꼭히 그런 것은 아니고 용변을 볼 때가 천적으로 부터의
공격에 가장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와 유사한 논리가 적용되는 것이 모텔이나 펜션이다.
난 무인텔 이라고 해서 모텔 인건비 애낄려고 사람을 안 쓰는 모텔인 줄로만 알았다. 들고 나는 년놈들 우리는
안봤다 까꽁! 이런 뜻인데 좌우간 모텔이나 펜션 드나 드는 사람들 중 98프로가 불륜이다 보니 멀고 외진
곳을 선호하고 보은 불륜은 상주에 있는 모텔을 상주 샛서방과 첩년은 보은을 찾는다고 한다. 이런
만고 불변의 진리를 배운 건 제 모교인 동국대에서 조교수님(?)을 역임하셨고 이후 약 18개월 정도 국비
장학생으로 벽돌집에서 무료급식을 하다 출옥해서는 자신의 수인번호 4001을 책제목으로 엣세이를 쓰셨는데
이 4001 초반부에서 신 정아 조교수님으로 부터 이룬 만고불변의 진리를 배웠다.
신 정아 조교수님은 자신의 책자에서 미국에서의 예일대 등등의 학위는 엉터리란 걸 고백했을 뿐 아니라
논문 대필 하는 방뻡이나 돈으로 학위를 취득하는 여러 수법들을 열거했을 뿐 아니라 문란했던 남녀관계도
거침 없이 기술하는데 이후 국내로 들어 와 갠찬은 미술관에서 잘 나가는 큐레이터로 근무하다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변 양균씨를 소개 받으면서 같은 예일대 출신 이라고 금새 작업이 벌어 지고 얼마 후에 변씨의
사무실로 찾아 가서 미술품 오더도 받고 수순대로 63삘딩 스카이라운지에서 저녁을 드시기 무섭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인천으로 기수를 돌려 인천 앞바다가 쪄르르르 하게 내려다 보이는 어느 모텔에서 가랭이를 여러 번
벌이는 기계체조를 몇 번 하곤 집으로 돌아 온다. 보통은 저녁 몇 번 묵고 나서 모텔로 가는디...
우리나라에는 예술활동을 지원하는 묘한 법령이 있다. 병원처럼 큰 공공건물엔 일정한 면적 이상을 그림이나
조각품 같은 예술품들로 도배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 1층 로비 비싼 땅에 이상한 조각품
들을 그 병원 이사장이 예술품에 관심이 많아서 그렇게 설치해 놓은 것은 절때로 아니다.
그리고 산삼이나 예술품 그리고 고급콜걸의 화대는 정가가 없다. 그리고 원가도 거의 없기 때문에 말만 잘 하면
이번에 어느 도에서 도지사 후보로 나오신 분 처럼 공짜로도 얼마든지 줏어 먹을 수가 있어서 미술관의
큐레이터는 고위 관료와 잘 사귀면 여럿 미술품을 고가로 쨥쨜하게 팔아 치울 수가 있고 다리 중간에
고무물총을 차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어떤 인간은 나랏돈으로 그림 몇 점 사준 댓가로 예일대 학위의
조교수님과 허구헌 날 공짜 물총놀이를 할 수가 있게 된다. 참고로
감방 즉 무료급식소에 들어 가면 강간범을 물총강도 라고 하졈.
4001 엣쎄이 중에서 잼난 얘기 몇가지만 소개하면 자신의 친 외할머니를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느 누가 읽어 봐도 이 외할머니가 김 대중 전 대통령의 영부인이신 이 희호 여사님이란 생각이 들게 기술되어
있고 자신의 샛서방인 변 양균씨를 변씨 라고 해서 항시 똥아저씨 라고 부르며 우스개 거리로 맹글 뿐 아니라
검찰에서 대질심문을 하면서 조사실에서 둘만이 있게 되자 이 똥씨라는 정신 나간 인간이 우리 출옥하면 함께
유럽으로 여행이나 다녀 오자며 신씨를 달래고 신씨는 똥씨의 정갱이를 걷어 차면서 내가 헤여지자고 했을 적에
끝을 봤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니냐며 재롱을 떨었다는 것인데 어느 집꾸석에서 가장이 가막소에 들어 가면
그 안식구가 생계를 책임지면서 흔히 말하는 옥바라지란 걸 하게 된다. 감방엔 오조지란 게 있다.
형사는 일단 잽혀 오면 때려서 조지고 검사는 허구헌 날 불러서 조지고 판사는 연일 미루고 또 미루어서 조지고
판결을 받아 기결수 감방엘 들어 가면 간수는 세아려서 조지고 집에 남아 있는 마누라는 옥바라지 할려고 있는
것 없는 것 죄다 팔아서 조진다고 한다. 팔다 팔다 팔게 없으면 마지막 밑천도 파는 경우가 잇는데 똥씨가
손에 은팔찌를 찬 상태에서 조사실에서 만난 첩년에게 출옥하면 유럽으로 밀월여행을 가자는 헛소리를 했다는
걸 나중에 똥씨 부인이 들으면 그 심정이 과연 어떠할까요? 고위 관료로 잘 나가던 신랑이 삭탈관직 하고
교도소에서 들어 가서 집꾸석이 만신창이 되어 자신은 옥바라지 하느라 죽을 지경인데 신씨라는 독부가
저런 말로 남의 허파에 고춧물을 집어 넣었으니 그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이 똥씨는 공직에 컴백한다 어쩐다 하더니 근자에는 자신이 가막소 생활하느라 감액된 일억 사천만원
정도의 퇴직연금을 돌려 달라고 소를 제기 했다가 패소를 했다고 하네요. 얼굴 참으로 두텁습니다.
예전에는 숫놈은 어떤 여자와 관계를 했다고 하고 여자는 한사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시치미를 떼는 게
정상인데 신 정아와 김 부선 이라는 여배우는 관계가 있었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그 샛서방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입을 씻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이룬 걸 상전벽해 라고 합니껴?
쌀개봉을 향하여 급경사를 힘겹게 오르노라니 너무도 힘이 들어 혀가 마치 늘고자 잠지처럼 추욱 앞으로 늘어
진다. 쌀개봉을 경유하며 신비로운 풍혈도 구경하고 구병산 정상인 백운대에 오르니 산신령께서 마치 축하라도
해 주시듯이 잠시 검은구름이 모여 드더니 후둑 후둑 거리며 빗방울 마져 선을 뵌다.
조선천지를 호령하듯이 불끈 치솟은 구병산 표지석 앞에서의 비록 소찬이지만 한끼의 점심상은 도지사나 청와대
정책실장도 부럽지 않을 지경이다.
가뭄으로 물한방울 보이지 않는 계곡길을 썰매 타듯이 미끄러져 내려 와 적암리 주차장 근처에 있는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니 살 것 같다. 급히 서둘러
수령이 수천년은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 아래로 오니 강 대장님을 비롯한 여러 회원님들이 멸치 다심물 냄새가
구수한 수제비를 뜨고 계신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우수 아래에서 탄생을 하여 보리수 아래서 성불을 하시곤 쿠시나가라의 사라 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적암리 마을을 보호하는 수호신 같은 정자나무 아래서 수제비 훌 훌 거리면서 오늘 하루 무탈 산행을 하게
해 주신 구병산 산신령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느티나무 정령께도 또한 고마움을 표하곤 총총히 느림보
리무진에 지친 몸을 실어 본다.
분당 탄천에서 장 동건이 뺨 치는 왕미남 외손주를 둔 돌삐 할부지 인사 드립니다.
첫댓글 우리나라 대표 미남은 장동건이란걸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그 장동건 뺨치게 잘 생긴 외손주를 보신 돌삐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느림보산악회에 실린 돌삐할아버지의 이 글을 나중에 손주가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ㅎ
아무리 요즘 세상에 손주바보가 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다하지만
돌삐 할아버지처럼 순식간에 손주바보가 된 할아버지도 드물것입니다.
아무쪼록 산에 더 열심히 다니셔서 더 많은 산행기도 쓰시고
손주가 대학에 들어 갈 때까지 뒷바라지 해주세요.
누가 압니까? 그 손주녀석이 이담에 할아버지 얼굴 환하게 펴줄 당상관에 오를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