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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연인들
작사 양인자
작곡 김희갑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韓).대방(帶方).왜(倭)는 모두 한반도지역을 의미한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고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하며 사방 4천리쯤 된다"[삼국지 위서 동이전]韓傳
이 기록은 정확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지역을 지리학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또한 한(韓)이 대방 남쪽에 위치한다고 했으니 대방(帶方)은 한(韓)의 북쪽지역이 되는 것이다. 정확히 황해도 지역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한(韓)의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했으니, 이 때 왜(倭)는 열도의 왜(倭)가 아니라 한반도 마한의 해상세력을 의미하는 왜(倭)를 의미한다. 즉, 열도 왜(倭)의 본국이 한반도지역임을 명시하는 기록내용인 것이다. 왜(倭)는 백제와 함께 고구려가 차지한 대방을 공격하였으나 전멸당한 후 마한의 해상세력이 단군한국시대부터 이주하여 정착한 마한열도로 이주해 갔다.
그런데 이 기록내용을 중국지역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러한 자들은 문헌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하거나 스스로 날조하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대방(帶方)은 본래 요서지역을 중심영토로 삼고 있던 번한국의 제후국이였는데, 위만집단이 번한국을 강탈하고 한나라가 침략하자,낙랑공주로 유명한 낙랑국의 최숭집단처럼 마한국에 속한 한반도지역으로 이주하여 세운 번한국 유민국의 국호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훗날 요서의 한군현지역을 차지한 위나라에게 요동반도가 공격을 당하자 요동태수 공손강집단이 황해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대방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韓)의 북쪽지역에 해당하는 대방(帶方)은 요서지역의 대방(帶方)이 아니라, 한반도지역의 대방(帶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에 복속한 한반도 해상세력인 <해=왜>가 열도로 이주해 가기 전에 고구려를 공격한 <대방>지역이기도 하다./윤복현
그럼 훗날 부여왕 구태을 따른 100가의 부여족이 구태의 처남인 공손강집단이 이주하여 정착한 황해도 대방에서 나라를 건국한 후에 온조 십제를 통합하고 서울을 수도성으로 삼았던 백제가 통합한 마한이 중심이 된 한韓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고대 중국인들이 기록한 문헌내용을 통해서 알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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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서 동이전]韓傳
○ 韓傳[교92]
韓 在帶方之南, 東西 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교93]. 辰韓者, 古之辰國也. [집해1]
○ 한전(韓傳)[교92][註001]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고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하며 사방 4천리쯤 된다. (韓에는) 3종(種)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辰韓)은 예전의 진국(辰國)이다.
馬韓在[교94]西. 其民土著, 種植[교95],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교96],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有爰襄國·牟[교97]水國·桑外[교98]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교99]國·臣濆沽[교100]國· [집해2] 伯濟國· [집해3] 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교101]支國·咨[교102]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교103]·卑離國·占離卑[교104]國·[집해4]臣釁[교105]國·支侵國[교106]·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교107]·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교108]盧國·辟[교109]卑離國·臼[교110]斯烏旦[교111]國· [집해5] 一離國·不彌國·支[교112]半國· [집해6] 狗素國·捷[교113]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 [집해7] 古臘[교114]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교115]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교116]國·乾[교117]馬國·楚離國, 凡五十餘國. [집해8] 大國萬餘家, 小[교118]國數千家, [집해9] 總十餘萬戶. 辰王治月[교119]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마한(馬韓)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있다. 그 사람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곡식을 심고(種植)[교95] 잠상(蠶桑,누에와 뽕나무)을 알아 면포(綿布,명주로 짠 피륙)를 만든다. (나라마다) 각기 장수(長帥,우두머리,수령)[교96]가 있어, 세력이 강대한 자는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며 성곽(城郭)은 없다.[註007]
(마한의 나라로는)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교97]水國), 상외국(桑外[교98]國), 소석삭국(小石索國), 대석삭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교99]國), 신분고국(신분활국)(臣濆沽[교100]國)[집해2], 백제국(伯濟國)[집해3],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목지국)(月[교101]支國)[註008], 자리모로국(咨[교102]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교103], 비리국(卑離國), 점리비국(점비리국)(占離卑[교104]國)[집해4], 신흔국(臣釁[교105]國), 지침국(支侵國)[교106],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교107],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교108]盧國), 벽비리국(辟[교109]卑離國), 구사오단국(臼[교110]斯烏旦[교111]國)[집해5],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교112]半國) [집해6], 구소국(狗素國), 첩로국(捷[교113]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막로국(莫盧國)[집해7], 고랍국(古臘[교114]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교115]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 원지국(爰池[교116]國), 건마국(乾[교117]馬國), 초리국(楚離國)으로, 모두 50여 개의 나라가 있다.
대국(大國)은 (그 나라의 호구수가) 만여 가(家,호戶)이고 소국(小[교118]國)은 수천 가(家)로서[집해9] 총 10여 만 호(戶)이다. 진왕(辰王)[註009]이 월지국(月[교119]支國)을 다스린다. 신지(臣智)는 때로 우대하는 호칭이 더해져(加優呼) 신운(臣雲)(신국의) 견지보(遣支報), 안야(安邪)(국의) 축지(踧支), 분신리아(濆臣離兒)(신분고국?)의 불례(不例), 구야(拘邪)(국의) 진지렴(秦支廉)[註010]의 호칭으로 불리운다.(※) 그 관직에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다.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집해25]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집해25]兩漢志, 樂浪郡屯有縣. 李兆洛云, 今朝鮮平壤城南. 丁謙曰, 帶方郡治所在, 前人均未言及. 漢地理志, 樂浪含資縣有帶水, 西至帶方, 入海. 査京畿道北境, 有臨津江, 發源江原道伊川郡, 北至開城, 西南入海, 正在樂浪之南. 再南, 卽百濟境. 以形勢揆之, 當卽漢時帶水. 然則伊川郡, 其漢之含資縣乎. 辰韓渠帥, 先詣含資降. 可知含資, 實辰韓至樂浪孔道. 今伊川郡, 居平壤東南, 情形尤協. 以此觀之, 臨津江, 於開城西南入海, 非卽帶方郡地之所在耶. 今定以開城郡爲帶方, 或相去不遠矣.
(후한)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환제,영제의 재위 146-189년), 한(韓), 예(濊)[註018]가 강성하여 (한나라의) 군현(郡縣)이 능히 통제하지 못하자 (군현의) 백성들(民)이 다수 한국(韓國)으로 유입(流入)하였다.[註019]
(후한 헌제) 건안(建安: 196-220년. 백제 肖古王 31년~仇首王 7년) 중,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지(荒地,거친 땅)를 갈라 대방군(帶方郡)을 세우고는[집해25]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보내 유민(遺民,남은 백성)들을 수집(收集,거두어 모음)하고 군대를 일으켜 한(韓), 예(濊)를 치니 구민(舊民)(→한국으로 유입했던 예전 백성)들이 점차 (한국으로부터) 나왔고 이후로 왜(倭), 한(韓)이 마침내 대방(帶方)에 복속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한전)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集解】王會汾曰 案晋梁二書 皆作弁韓 當從改 下云 弁辰在辰韓之南 弁辰亦弁韓之訛 惠棟曰 魏志作弁韓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閒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辰이다. 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樂浪, 남쪽은 倭와 接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濊貊과 接하여 있다. 弁辰은 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倭와 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이고 伯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萬餘戶, 작은 나라는 數千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이다. 마한이 [韓族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는데, [三韓의] 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馬韓人知田蠶 作緜布 出大栗如梨 有長尾雞 尾長五尺 邑落雜居 亦無城郭 作土室 形如冢 開戶在上 不知跪拜 無長幼男女之別 不貴金寶錦罽 不知騎乘牛馬 唯重瓔珠 以綴衣爲飾 及縣頸垂耳 大率皆魁頭露紒 魁頭猶科頭也 謂以髮縈繞成科結也 紒音計 布袍草履 【集解】惠棟曰 魏志云 足履草蹻蹋 其人壯勇 少年有築室作力者 輒以繩貫脊皮 縋以大木 嚾呼爲健 常以五月田竟祭鬼神 晝夜酒會 羣聚歌舞 舞輒數十人相隨蹋地爲節 【集解】惠棟曰 魏志云 踏地 低昂手足 相應節奏 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 號爲天君 又立蘇塗 魏志曰 諸國各有別邑 爲蘇塗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蘇塗之義 有似浮屠 建大木以縣鈴鼓 事鬼神 其南界近倭 亦有文身者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큰 밤이 산출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는 5尺이나 된다. 邑落에 雜居하며 역시 城郭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부분에 있다. 跪拜할 줄을 알지 못하며, 長幼의 차례와 男女의 분별 따위의 예가 없다. 金·보화·비단·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牛·馬를 탈 줄을 모르고, 오직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勇敢하여 젊은이들 중 築室하는 데서 일하는 사람은 매번 밧줄로 등의 가죽을 꿰어 큰 나무를 매어 달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것을] 건장하다고 한다.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 지어 노래 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 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를 끝내고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國邑에는 각각 한 사람이 天神의 제사를 주재하는데 [그 사람을] 天君이라 부른다. 또 蘇塗를 만들어 거기다가 큰 나무를 세우고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韓의] 남쪽 경계는 倭에 가까우므로 文身한 사람도 있다.
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集解】先謙曰 魏志 爲上有皆字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城柵屋室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秖 【集解】惠棟曰 魏志 作樊穢 次有殺奚 次有邑借 皆其官名 土地肥美 宜五穀 知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 國出鐵濊倭馬韓並從市之 凡諸質易 【集解】先謙曰 官本 質作貿 皆以鐵爲貨 俗憙歌舞飮酒鼓瑟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 扁音補典反
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秦나라에서 亡命한 사람들로 苦役을 피하여 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그들은 나라(國)를 邦이라 부르며, 弓은 孤라 하고, 賊은 寇라 하며, 行酒를 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徒라 하여, 秦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혹 秦韓이라고도 부른다. 城栅과 家屋이 있다. 모든 작은 邑에는 각각 渠帥가 있으니, 강대한 자를 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儉側, 그 다음은 樊秖, 그 다음은 殺奚, 그 다음은 邑借가 있다. 토질이 비옥하여 5곡이 잘 자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비단과 베를 짠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며 혼인은 예의에 맞게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은 길을 양보한다.그 나라에는 鐵이 생산되는데 濊·倭·馬韓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모든 무역에 있어서 鐵을 화폐로 사용한다.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고 비파뜯기를 좋아한다.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납작하게 되도록 하려고 모두 돌로 눌러 놓는다.
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其人形皆長大 美髮 衣服絜淸 而刑法嚴峻 其國近倭 故頗有文身者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集解】惠棟曰 魏志云 其子及親 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弁辰 사람들은 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辰韓과]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弁辰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고 형법은 엄격하다. 변진은 倭國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文身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 과거에 (번)朝鮮王 準이 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韓王이 되었다. 準의 後孫이 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自立하여 辰王이 되었다.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詣樂浪貢獻 廉斯 邑名也 諟音是 光武封蘇馬諟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 靈帝末 韓濊並盛 郡縣不能制 【集解】先謙曰 官本 州作郡 百姓苦亂 多流亡入韓者
建武 20년(A.D.44)에 韓의 廉斯사람 蘇馬諟 등이 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後漢]의 光武帝는 蘇馬諟를 封하여 漢의 廉斯邑君으로 삼아 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朝謁하도록 하였다. 靈帝 말년에 韓과 濊가 모두 강성해져 [漢나라의] 郡縣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韓으로 도망하여 流入하는 경우가 많았다.
馬韓之西 海㠀上有州胡國 其人短小 【集解】沈欽韓曰 魏志 人下有差字 髡頭 衣韋衣 有上無下 好養牛豕 乘船往來貨市韓中
마한의 서쪽 바다의 섬 위에 州胡國이 있다.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고 머리를 깎으며, 가죽 옷을 입는데 上衣만 입고 下衣는 입지 않는다.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韓의 國中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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