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잘, 나는 이제 늙었다.
그리고 우리 사막부족들은 대대로 장수를 누리지 못해왔다.
벤 유수프는 이제 콧수염이 나기 시작한 아들에게 천천히 말했다.
“손자 볼 때가 되었다는 얘기다. 이제 너도 짝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당혹한 기색의 파이잘.
대학 1학년인 그는 가정을 이룬다는 생각 따위는 아직 해본 적이 없다.
이미 결혼한 또래의 사촌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부유한 부모 밑에서 사치와 쾌락에 탐닉한 나날을 보내는 그들을 파이잘은 경멸했다.
벤 유수프는 한 달 용돈을 백 달러 이상 주지 않을 만큼 파이잘에게 엄격했다.
그러나 동생들은 마르얌의 치마폭에 싸여 온갖 사치를 누리며 자랐다. 지난 몇 년간 남매들의 교육환경은 완전히 달랐고 그 결과는 세상을 보는 안목의 차이로 드러나고 있었다.
파이잘이 초우트의 영악한 WASP들과 경쟁하며 사회의식을 키워온 반면에 왕궁과 두바이가 전부였던 동생들은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들이었다.
바깥세상을 맛보지 못한 동생들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사업가들을 서구인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있다. 동생들을 뉴욕에 던져놓으면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말라버린 화분의 꽃처럼 시들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립하려는 부친의 꿈은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현실 안주 또한 삶을 포기하는 것.
현실타개의 모델로 베링 자치주를 벤치마킹하자는 생각에는 공감했지만 구체적 방법은 아직 가닥조차 잡히지 않는다. 베링 소년단 참여로 일단 인연은 생겼지만 다음에 무엇을 할지는 막연했다. 장검경전을 전달했던 사절단의 진 현구 대표는 친구되기를 청했다.
진정한 친구라면 고민 또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 제 결혼보다는 베링 자치주와 가까이 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봅니다.
앞날을 상의할 만큼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려면 좀 더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너는 마드무아젤 하를 어떻게 생각 하느냐?
부친의 느닷없는 질문.
당황했다. 마음속을 들킨 소년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좋은 친구라 생각합니다.
“좋은 친구라 ----, 물론 그렇겠지.
의뭉스런 미소를 띠운 벤 유수프. 쩔쩔매는 청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이상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느냐?
없다니! 지난 반년 간의 예일대 생활은 그녀를 개떼처럼 따라다니는 청년들과 암투와 투쟁의 나날이었다. 생각이야 굴뚝같지만 공주께서 틈을 주지 않는 데야 어쩌겠는가?
“나는 너희가 맺어졌으면 한다. 장검필사도 가까이 두고 지켜보려는 생각이었다. 결과는 너도 알다시피 기대 이상으로 뛰어났지.
파이잘은 답답했다.
‘누가 모릅니까? 아버지, 문제는 마음을 얻는 거지요.’
그녀는 왕실에서 손을 내민다고 얼씨구나 달려올 상대가 아니었다.
“듣기로는 마드무아젤 쟁탈전이 제법 치열한 것 같더구나. 안 그러냐?
빙긋 웃는 벤 유수프.
초우트 시절부터 파이잘의 생활을 그는 상세히 알고 있다. 미국에서의 아들 후견인 역을 맡긴 울라마가 수시로 초우트를 방문해 교사들과 상담을 나누고 기부금을 내곤했던 사실을 파이잘은 까맣게 모른다.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형은 아직 누구도
친구 이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어요.
“당연한 일이지. 그렇게 쉬울 리가 있겠느냐?
부릅뜨고 지키는 삼촌, 이모만도 삼십 명이나 버티고 있는 공주님인데
완연히 농담조가 된 부친은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다. 파이잘, 우리 협력하면 어떻겠니?
그 쪽에 수십 명의 삼촌, 이모가 있다면... 네게는 두바이의 통치자인 내가 있지 않으냐? 아들아.
아들아 하고 부르는 벤의 목소리에는 애정의 울림이 넘쳐났다.
어렵기만 하던 부친이 갑자기 친구처럼 다가서자 파이잘의 가슴에 문득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던 신뢰와 애정이 봇물 터지듯 넘쳐 들어온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에는 어느덧 믿음이 담겨있었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세요?
기대어린 물음. 벤은 웃었다.
“그럴 리가--, 지금부터 연구해보자는 얘기지.
하지만 부와 명예에 관심이 없는 콧대 높은 처녀란 일국의 국왕으로서도 어려운 상대였다. 게다가 연애란 원래 논리와는 거리가 먼 기적이며 신의 조화 아닌가?
인간이 어찌 기적을 불러올 수 있겠는가?
유수프는 매의 눈으로 지형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국이라는 나라, 그녀의 집안 내력, 극동 연구소의 보호자들, 그리고 캡틴 하와 베링 자치주, 일단은 그녀의 주변과 공동 목표를 추구하면 접촉이 잦아질 것이고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공동 목표?
대륙 철도망 구성? 몽골리안 벨트 관광사업? 장검경전을 이용한 사업?
그렇다. 벤은 무릎을 쳤다.
자치주의 취약점은 허술한 치안이었다. 경제공동체인 베링 자치주는 군사력을 갖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경찰력에만 의존하기에 그 영역은 너무 넓었다.
언제 어디서 뚫릴지 모르는 대륙철도의 보호를 위해 무력은 불가결한 요소지만 자치주에는 그것이 금지되어있다. 군대가 아닌 무력, 아사신 같은 비밀조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양성에는 노하우가 필요했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던 베두인들만의 노하우,
빈객이 캄차카의 베링 사업단을 찾아왔다.
장검경전에 대한 답례 명분으로 아랍 연맹의 대규모 사절단이 공식 방문을 해온 것이다.
요르단의 사우드 왕이 인솔한 사절단의 면면은 아랍 연맹의 각국 정부와 왕실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환영만찬에서 하 동수의 환영사에 이어 히잡을 쓴 지형이 짤막한 인사를 했다.
“신은 혹독한 기후와 선물을 한 쌍으로 함께 내려주셨어요.
사막의 석유, 동토의 자원,
이제 사막과 동토 역시 한 쌍으로 더불어 발전하겠지요.
무함마드게 영광을, 베링 철도에 축복을,
알랄라일 알라.
파티마의 등장에 열광한 사절단원들은 박수와 함께 발을 굴러 기쁨을 드러냈다. 베링 자치주는 13억 무슬림의 이웃으로 성큼 다가서 있었다.
“우리 중동은 베두인의 나라입니다.
거친 음식과 늘 시달리는 갈증 속에서도 알라에게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한 몸가짐으로 지키는 품위는 우리 베두인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공식 행사가 끝나자 따로 자리를 마련해 동수와 사우드 왕을 초청한 벤 유수프가 차분히 말하고 있었다.
이번 방문은 그가 주동이 되어 추진한 행사였다.
명분은 어떤 반대급부도 없이 장검경전을 선물한 베링 자치주의 선의에 대한 답례였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나라는 없었다. 또한 서구기업들의 횡포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그들은 베링 자치주를 배워 이들에 대항하자는 그의 평소 지론에도 공감했다.
이슬람의 새로운 종가, 두바이 왕실의 권위를 존중한 이들은 범 아랍적 규모로 이 행사에 참가했다.
“하지만 지난 20세기는 우리의 그러한 자부심이 무너진 세월이었습니다.
영어와 서구식 사고에 익숙하지 못한 자는 도태되는 세상.
서방국가들이 제멋대로 그은 국경선들.
수천만의 인구를 가졌으면서도 나라를 이루지 못한 쿠르드나 발칸의 형제들.
유수프의 말을 받아 사우드 왕이 이어갔다.
“그래서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나마 주고 싶습니다.
자치주에서 우리 중동의 이주 희망자들도 수용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븐 사우드와 벤 유수프가 동수를 응시했다.
이들은 이미 이러한 뜻을 서면으로 전했었다.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베링 자치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희로서는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다만 열사의 땅과 정반대 환경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우려됩니다.
최선을 다해 이주민들이 적응하실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데 노력하겠습니다.
“쾌히 승락해주시니 기쁩니다. 그리고 이 땅으로 이주할 우리 형제들을 위해
한 가지 선물을 준비하고 싶습니다만,
동수의 기색을 살피며 말하는 사우드 왕.
문득 긴장한 동수. 외교적인 답변으로 응한다.
“선물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중동의 유능한 인력들이 와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사우드의 만족스러운 미소.
“하지만 자치주로서도 필요한 선물일 것입니다.
저희는 캄차카에 경비인력을 양성하는 학교를 세우면 도움될 것이라 믿습니다.
자치주는 이미 기업이나 경제공동체 수준을 넘어서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미국과 러시아 경찰에만 의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자치주로서도
심각하게 고민하던 문제다. 다만 비무장 조항에 묶여 거론을 삼가해 왔을 뿐.
“아시다시피 조차협약에는 비무장 조항이 있습니다. 그래서...
벤 유수프가 손을 들어 동수의 말을 막았다.
“그 점은 충분히 고려했습니다. 그래서 학교 운영자를 자치주가 아닌 우리 아랍연맹으로 하는 안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이주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되면
명분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탁월한 대안이었다.
유수프의 제안은 학교설립과 운영을 모두 아랍 연맹측에서 책임지겠다는 것이었다.
이 경우 자치주의 정치적 부담이 사라진다. 심지어는 경제적 부담까지도....
이는 자치주의 중요한 정책변화를 의미했다.
극동 연구소 측은 방문단의 제안을 놓고 숙의를 거듭했다.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제안이라는 데는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그래서 초점은 저들이 왜 이러한 파격적인 호의를 베푸는지에 모아졌다.
하 지형과 파이잘의 결혼...?
베링 자치주의 벤치 마킹을 위한 포석?
우정을 쌓기 위한 순수한 호의?
종일 갑론을박을 거듭했다.
그러나 저들의 제안이 호의에서 나왔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극동 연구소는 이 날 몇가지 원칙을 정립했다.
첫째, 하 지형의 결혼 문제.
자치주 전략에는 한반도와의 유대라는 대전제가 있다.
자치주를 이끄는 하씨 일가의 혼맥에 국제 결혼이 끼어들면
그 순간부터 자치주의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
비록 주민구성은 국제적 색채가 짙더라도 지도부의 구성은 순혈주의를 지켜야한다는 것이 동수와 극동 연구소의 믿음이었다.
파이잘과 하 지형은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자치주와 아랍연맹의 관계에 대한 토론에는 실로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저들이 베링 사업단의 지혜를 기대한다?
한국이 겪은 근대화의 시행착오, 오염된 자본주의를 넘어 탄생한 베링자치주,
저들이 이를 벤치마킹해 배우겠다면 이는 당연히 도와야한다는 결론이었다.
연구원들은 두바이를 모델로 삼아 중동식 개발 방향을 토의했다.
서구문화를 전제로 한 개발보다 아랍 고유의 생활양식을 감안한 발전방향이라는 대 전제가 세워졌다. 그리고 몇 가지 원칙이 제시되었다.
서구식 산업화나 개발은 일단 잊어라, 우선은 교육이 시급하다.
문맹율을 낮추고 의료 시설을 갖추어라,
그래서 병원 등 Infra 경영에 필요한 테크노크라트들을
자국민으로 채운 다음, 개발계획을 세워도 절대로 늦지 않다.
베링 사업단은 경비사관학교 설립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중동자문단을 발족시켰다.
이라크와 터키의 쿠르드족, 카스피해 연안의 알바니아 등 중동 전역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랍연맹 측의 적극적 지원도 있었지만 무슬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준 장검경전이 이들을 베링 자치주로 이끈 요인이었다.
또한 그들은 파티마의 땅, 베링자치주에서 중동의 미래를 보려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자치주는 모스크를 세우고 할랄 고기를 비롯한 식단도 마련했다.
고향과는 정 반대의 환경으로 온 그들에게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종교의 힘은 위대했다. 그들은 자치주를 예언자께서 축복한 땅으로 믿었고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기도로 자신을 북돋우곤 했다.
추위 속으로 의연히 나선 그들의 모습에는 지하드 전사의 기백이 드러났다.
베두인이나 쿠르드나 그들은 원래가 타고난 전사였다.
쿠르드인의 얼굴에는 넉넉한 관용과 위엄이 넘치지만 표정은 유순해 보인다. 그러나 그 유순함에는 우매함과는 다른 생동감이 있었다. 나직이 읊조리는 알랄라일 알라의 울림 속에는 다른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슬림들끼리만 공유하는 친애의 감정이 공명한다.
경비 사관학교의 교관들은 장검경전을 전수받았다.
군 출신들로 구성된 교관단은 아랍어 경전암기에 애를 먹었지만
지형과 파이잘의 시범을 본 뒤로는 찍 소리 않고 암기에 몰두했다.
예일대의 교환학생 기간이 끝난 지형은 서울로 돌아왔지만 방학때마다 파이잘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경전 교관이기 때문이었지만 아들과 맺어주려는 벤 유수프의 음모도 깔려있였다.
아들의 청춘사업에 엄청난 투자를 했지만 진도가 지지부진해 남몰래 안달하는 벤 유수프였다.
하씨 일가의 순혈주의 원칙을 모르는 그의 바람일 뿐,
둘은 결국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무슬림 구역에 세워진 경비사관학교 학생들은 무슬림만은 아니었다.
탈북자와 각국 이민자 등 다양한 민족들이 교육을 거쳐 현장에 배치되었다.
2006년부터 매년 이백 명씩 배출된 졸업생들은 철도승무원으로 배치되어 하급 승무원들을 통솔했다. 무기가 금지된 자치주에서 이들의 맨손 격투기는 효과적이었고 이민자 사회에는 차츰 질서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2007년, 사막 고유한 방식으로 추진하는 1차 5개년 개발계획이 시작되었다.
아랍 에미리트와 사우디 왕국, 예멘, 오만 등 사우디 아라비아 반도국가들이
공동수립한 개발계획의 목표는「식량 자급을 위한 치수사업」이었다.
치수 계획은 두 가지 사업을 축으로 입안되었다.
하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내륙 깊숙이 끌어들인 바닷물을 각 마을마다 설치된 담수화 시설로 처리해 농업용수와 식수로 사용하는 「담수화 사업」
또 하나는 짧은 우기에 쏟아져 대부분 버려지던 빗물 활용사업.
집중호우는 삽시간에 강을 이루며 흐르다 땅속으로 스며들고 증발해
불과 며칠 만에 마른 골짜기, 와디로 변한다. 때로는 홍수도 일어났다.
집중 호우기에 강으로 변하는 골짜기, 와디 계곡의 지하에는 수맥이 흐르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워낙 엄청난 공사라 방치되어 왔다.
사우디 반도의 국가들은 인공위성 사진을 근거로 대규모 수맥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맥이 흐르는 지역의 지표온도는 다른 곳보다 낮기 때문에 인공위성 사진을 정밀판독하면 흐름은 파악할 수 있다.
수맥을 따라 지하저수지를 대규모로 건설해 버려지던 빗물을 활용한다는 것이「지하수 개발사업」의 요지였다.
이 사업은 지하수관개로 포도재배에 성공한 투르판의 사례를 연구해 탄생했다.
투르판은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물을 지하수로로 흘리면서 일정구간마다 설치한 우물로 끌어올려 세계적인 포도산지로 자리를 굳힌 나라다.
중동에는 예로부터 내려온 와디 관개가 있다.
하지만 지하수맥에 판 까나트 우물을 통해 물레방아로 끌어올리는 수준이 고작이었다.
사우디 전역의 와디계곡을 따라 100m x 100m x 10m 규격의 거대한 지하수조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지하 10m에 건설된 수조는 3km 마다 세워져 우기에 내리는 빗물의 반이상을 저장한다는 계획이었다.
지하에서 파낸 흙에는 표토와 달리 유기질이 풍부한 퇴적층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지하수조 건설공사는 표토개량 사업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수천 년에 걸쳐 방치되었던 메마른 표토 층은 일단 관개시설을 갖추자
풍부한 일광과 맞물려 비옥한 땅으로 바뀌어 갔다.
사우디 반도의 국가들은 이 새로운 농지에 밀과 옥수수 등의 작물을 심어
자체수요는 물론 수출까지 계획했다. 화석 연료가 고갈된 다음의 생존수단으로 곡물시장의 강자로 등장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윽고 해수를 유입하는 송수관이 부챗살 모양으로 내륙을 향해 퍼져나갔다. 시커먼 송유관만 깔려있던 사막으로 거미줄처럼 해수파이프 라인이 깔려 갔다. 파이프들은 곳곳의 저수지로 연결되고 저수지 옆의 마을에서는 이를 태양열로 증발시켜 식수를 조달하고 부산물로 소금을 얻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사에 가장 많이 참고한 기술은 이스라엘 기술이었다. 물 절약에 대한 기술을 발전시켜 네게브 사막을 개척해낸 나라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황토색 사막, 네게브다.
그중 미츠페라몬은 지구 최대의 크레이터(분화구 같이 꺼진 지형) 다.
야생산양과 거대한 크레이터, 절벽에 서면 펼쳐지는 웅장한 광야.
황량한 사막이 이어지다 대추야자와 채소를 가꾸는 키부츠들이 간간이 나타난다. 농업이 발달한 이스라엘의 치수기술이 황량한 땅에 대추야자 잎을 싹틔운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철조망과 곳곳에 세워진 검문소.
골란고원 저편은 시리아, 강 너머가 요르단인데 이들과 이스라엘 국경을 따라 도로가 달린다.
이스라엘이 강 건너 요르단에 치수와 농업기술을 전수하면서
서서히 평화 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베두인들은 마을과 마을사이에 세워진 등대를 따라 낙타를 몰며 시원한 야간에 이동했다. 송수관과 등대 건설비는 도로망보다 훨씬 싸게 먹혔지만 그 유용성은 바로 입증되었고 무엇보다 국민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이들에게는 서구식 문화시설보다 물, 안전한 이동로, 소규모 부락, 가축 몇 마리와 몇 그루의 대추야자가 더 소중했고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답답한 아파트 방의 침대보다 하늘을 지붕 삼은 따뜻한 모래바닥이 훨씬 편안한 잠자리였고 사막의 모래찜질은 샤워 못지않게 위생적인 목욕법이었다.
벡텔 등 굵직한 컨설팅업체들은 지난 20여년간 OPEC국가 지도층들을 호화파티에 초대해 산업화와 도시화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입해 왔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그 방식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도로와 항만을 건설하고 서구식 도시를 세우자 주장하는 공무원들은 미국 회사에서 얼마나 받아먹었느냐는 식의 비난을 듣기 마련이었다. 서구의 브레인들은 만만히 여겼던 중동 지도자들에게 접대비만 날렸다.
그들은 미개부족에 불과한 이 자들이 왜 이렇게 다루기 어려워졌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도 물과 에너지, 그리고 유목민의 습성을 감안한 지금의 개발방식이 더 효과적일뿐 아니라 지혜롭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미 없는 서구화에 낭비되던 오일달러가 전통 생활방식을 살린 경제개발에 사용되면서 이들의 결속은 공고해지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체제도 서서히 민주화되어갔다. 가장 이슬람적인 방식으로 평화혁명이 번져가고 있었다.
문제는 중동으로 흘러들어간 돈이 되돌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런 경우에 닥칠 다음 사태는 군사행동 밖에 없다.
아랍국가들의 고민은 군사력이었다.
이들은 궁여지책으로 문화전쟁 -- 서구에 중동문화를 알리는 -- 을 선택했다.
이들은 카지노와 연예산업 육성을 국가 차원에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요는 노는 일이었다.
노는 일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것이 유목민족이었고 하렘과 술탄의 나라들이었다.
아랍국가들의 개발방향이 정립되자 남은 것은 팔레스타인 문제였다.
극동 연구소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면 과연 중동에 평화가 올 것인가? 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스라엘 대책은 이미 구상이 나와 있었다.
1세대 내에 이스라엘을 사라지게 하고 그 땅이 팔레스타인에게 돌아오게끔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알라의 섭리인가? 라는 것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유수프의 메기론이 상당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메기다.
알라의 자비로 열린 오아시스에서 게으른 미꾸라지처럼 살던 무슬림을 노리는 메기.
그 덕분에 이슬람은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이는 곧 알라의 축복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이야말로 저주받은 존재. 사방이 천적으로 둘러 싸였다.
벗어날 가능성? 한 푼어치도 없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집착하는 한 저주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
그들을 없애기보다는 이 상태로 묶어두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복수가 아닌가?
4년전,
많은 지도자를 배출해 온 예일대 로스쿨이 있는 뉴헤이븐에 도착한 파이잘은
높이 솟은 회갈색 로스쿨 건물에 주눅이 들었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예일 로스쿨 주소는 월가 127번지다.
월가와 요크가가 만나는 곳.
로스쿨 앞 초록색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월 스트리트와 요크 스트리트.
이름만 보면 꼭 뉴욕 같다. 불안했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와 닿는지 모른다.
열심히 공부해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 뉴욕에서 사회 첫발을 내딛는 것이 꿈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도 모르고 확신도 없던 그에겐
그 작은 표지판이 그렇게 힘이 될 수가 없었다.
아마 좋은 징조일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얘기해주면서 로스쿨 정문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여러 해가 흘렀다. 졸업. 그리고 세상 속으로.
예일 로스쿨에는 졸업반 학생들의 단체사진을 공중촬영하는 전통이 있다.
로스쿨 학장과 학생들이 로스쿨 안 뜰courtyard 한 켠에 모여
위를 올려다보면서 웃는 모습을 건물 위에 자리한 사진사가 찍어 남긴다.
학생들은 주로 평상복 차림.
공식적인 졸업 사진이라곤 이것 한 장뿐이지만, 이렇게 찍으면 앞쪽 뒤쪽 없이
학생들의 얼굴과 몸이 잘리지 않고 고루 나오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 사진은 그 해 예일 로스쿨 입학 원서에도 실린다.
파이잘의 졸업반도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안뜰에 모였다.
마침 졸업논문 최종 본을 마무리 지어 제출한 후 밀린 잠을 자다 나온 터라 멍한 표정으로 뚱하게 서 있는 파이잘을 살피던 친구 빅터가 말을 걸어왔다.
“그래. 그렇게 애매한 표정을 짓는 게 좋지.
이 사진이 입학 원서에도 실리잖니.
울상을 하고 있으면 누가 우리 학교에 들어오려고 하겠어.
하지만 너무 헤헤거려도 안 돼.
예일 로스쿨에 정이 들어 영원 히 떠나고 싶지 않다는 아쉬움을 비쳐야하기 때문이지.
계속 어중간한 표정을 유지하도록 해.
조가 씩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뭐?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다고? 지금 허위광고를 하자는 거냐?
지붕 위에서 카메라 렌즈를 조절하고 있던 사진사가 외쳤다.
“자, 찍습니다!
그날 찍은 사진은 파이잘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다. |
첫댓글 종횡무진,
상상력을 많이 키워주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