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백자(靑華白磁)
목차
1. 개요
2. 내용
3. 가장 오래된 청화백자 발견
4. 기타
5. 청화백자 고미술품 목록
5.1. 국가 지정 문화재
5.1.1. 국보
5.1.2. 보물
1. 개요
청화백자(靑華白磁)는 본래 14세기 초 중국에서부터 생산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세조시기부터 18~19세기까지 만들어진 조선백자의 일종으로 알려졌다. 순도 높은 백자에 청색의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투명유약을 입혀 환원염(還元焰)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말한다. 청자와는 전혀 다르니 혼동하지 말 것.
2. 내용
조선말까지 만들어진 조선백자의 일종이며, 한반도에서 최초의 기록은 세조실록 세조 9년 8월조에 나오기 때문에 조선세조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봐야 옳다. 왜냐하면 당시 세조는 명나라에서 이따금씩 들어오는 청화백자를 보고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상을 걸고 전국에 포고를 내려 우리나라 내에서도 이를 완벽하게 만들어 구워바치라는 명을 내렸는데 전라도 순천에 사는 구치동(丘致峒)이라는 인물이 1464년에 이를 완수하였다는 기록이 최초의 것이다. 1968년에 이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분청화기 제작 지석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후 전라도 경차관이 순천부에서 회회청과 유사한 광물을 채취하여 처음으로 청화를 구웠고, 1467년(세조 13)에는 도자기 제조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옹방(司饔房)이 사옹원(司饔院)으로 개칭되어 그 기구가 확대되었다. 1468년에는 경기도 광주에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던 청색 코발트 안료는 페르시아-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전량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매우 비쌌고 국고 낭비도 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때문에 맨 처음 청화백자의 국내제작을 성공시킨 세조는 강진군과 순천에서 코발트광을 발견한 후 토청(土靑)이라고 하는 국내산 청화 안료를 개발하였고 이후 울산지역에서 심중청(深重靑), 삼청(三靑) 등을 발견, 개발하였다.
하지만 세조가 개발한 국산 코발트 안료인 토청(土靑)은 회청만큼 선명한 파란색이 아니라 검푸른색이 나온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때문에 훌륭한 가성비, 쉬운 조달, 풍부한 양, 국부 해외유출 방지 및 국내경기 향상 등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종 대부터는 국산 안료 개발을 포기하고 그냥 중국으로부터 회회청을 전량 수입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만력년간부터는 수입가격 절감을 위해 중국산 회청을 혼합하면서 색이 점차 나빠졌다.
이후 임진왜란 때 청화백자 제작 기술 및 설비가 큰 타격을 받고 한동안 침체기에 놓이게 된다. 대신 검은색 산화철로 대체한 철화백자가 유행한 것이다. 특히 1754년 영조는 회청의 사용을 사치라며 용항아리외에는 금지하기도 했다. 그러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페르시아의 회청보다 훨씬 값이 싸고 품질도 좋은 서양의 청화가 수입되면서 다시금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조선시대 말기까지 유행하였다.
현재 청화백자 생산지의 주요 유적지로는 광주의 번천리, 도마리, 우산리, 무갑리, 학동리 등의 가마터가 현존하고 있다. 대부분 처음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세조 때부터 광주분원을 설립하며 왕실에서 전격적으로 밀어준 곳들이다. 현재 광주에서는 광주분원요지, 광주분원 백자가마터, 광주분원백자관 등의 시설을 만들고 마지막까지 남은 조선 왕실의 가마터 지역이라는 표지 아래 홍보 중이다.
지금까지 청화백자가 문화재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에서 홀대받았던 이유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도자기 양식이라는 민족주의적 관점의 영향이 컸다. 실제로 청화백자를 저평가하는 글에 항상 들어가던 말이 너무 중국스런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고평가받는 고려청자 같은 작품은 양식 자체는 똑같이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것이지만 중국의 용천청자와는 다른 확연하게 구분되는 특징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진짜 우리나라만의 독창적 양식은 신라시대 토우 및 토기나 조선 분장회청사기(보성 덤벙이) 정도다. 고려청자를 고평가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송대 청자 양식을 그대로 받아왔지만 점차 우리나라 고유의 아름다운 청자로 발전시킨 공로가 크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진화과정은 사실 청화백자도 마찬가지다.
일부에서는 한국 백자가 화려함과 기교가 부족하다며 아쉬워하지만, 남겨진 유물과 기록을 보면 화려함을 갖춘 것 역시 많이 존재한다.
상술된 인식과는 달리 한국의 청화백자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실제로 한중일 삼국의 청화백자 사진을 같이 올려보면 바로 어느나라 것인지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확연히 다르다. 한국 청화백자의 특징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여백의 미이다.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는 갈수록 화려함만을 추구하다보니 후기로 갈수록 아예 이 항아리의 기본 베이스가 백자라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청화안료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반면에 한국은 흰색과 조화를 추구하는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청화안료로 그린 문양과 백자의 바탕을 조화롭게 살리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때문에 한국의 청화백자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백자 자체의 예술성을 전혀 잃지 않으면서도 청화백자 특유의 화려함을 함께 간직할 수 있게 세심히 만들어져 있다. 때문에 해외에서도 한국 청화백자가 언급될 때 조선의 성리학적 철학과 절제미가 언급한다.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백자 특유의 담백한 청백색 유약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런 사람들은 다른 국가의 청화백자보다 한국의 청화백자를 더 고평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제로 서양 유명 고도자 경매 사이트를 가보면 한국의 청화백자가 중국, 일본의 청화백자와 가격 경쟁순위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낙찰가가 억대는 기본이고 수십억을 넘나들 때도 있다. 진짜로 중국 청화백자의 아류 정도로만 취급받는 베트남 및 동남아 청화백자들과는 취급이 다른데 서양의 이런 분위기가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한국 국내에서도 점차 조선 청화백자를 재평가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3. 가장 오래된 청화백자 발견
2003년에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장모인 흥녕부대부인 인천 이씨(1383~1456)의 무덤에서 청화백자로 만든 묘지석을 찾아냈으며, 이 묘지석이 세조 2년(1456년) 만들어진, 국내 최고(最古)의 청화백자로 확인되었다.
현존 청화백자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르고 양질의 흙과 유약으로 구은 최상급 백자이며, 국내 청화백자의 첫 제작시기가 1456년까지 올라갔음을 확인시켜준 국보급 유물임을 인정받았다.
그 전까지 가장 오래된 한국의 청화백자였던 '백자상감 묘지석’(세조 12년·1466년·대한민국 국보 172호·호암미술관 소장)보다 10년 앞서 만들어진 문화재로, 세조 때 처음 만들어진 조선 청화백자의 뿌리를 찾는 결정적 실마리로 평가받았다.
4. 기타
2014년 9월, 조선 세조 시기부터 조선말까지 수백여년간 만들어진 한국의 청화백자 중 약 500여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었다.
5. 청화백자 고미술품 목록
5.1. 국가 지정 문화재
5.1.1. 국보
국보 제170호 백자 청화매조죽문 유개항아리
국보 제176호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국보 제219호 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
국보 제222호 백자 청화매죽문 유개항아리
국보 제258호 백자 청화죽문 각병
국보 제263호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국보 제294호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5.1.2. 보물
보물 제240호 백자 청화투각모란당초문 항아리
보물 제644호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
보물 제659호 백자 청화매조죽문 병
보물 제785호, 보물 제786호 백자 청화운룡문 병
보물 제788호 백자 청화잉어문 항아리
보물 제1064호 백자 청화운룡문 항아리
보물 제1056호 백자 청화철화삼산뇌문 산뢰
보물 제1057호 백자 청화 ‘망우대’명 초충문 접시
보물 제1058호 백자 청화칠보난초문 병
보물 제1059호 백자 청화초화문 필통
보물 제1329호 백자 청화소상팔경문 팔각연적
보물 제1390호 백자 청화동정추월문 항아리
보물 제1448호 백자 청화보상당초문 항아리
보물 제1768호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