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묵향 진주라 천리길: 風流와 색향(色鄕) 감상
손석우 작사 손석우 작곡 남인수 노래 내 고향 진주 묵향 진주라 천리길: 風流와 색향(色鄕) 감상 풍류와 색향(色鄕), 진주 <오비 최이락 書 > 고려대 평생교육원 교수 오비의 고향 진주를 자랑한 글인데, 내용이 좀 깁니다만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진주에 고향을 둔 사람이면, 더욱 그러하구요.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특정한 지역을 가리킨 것들이 있다. 조선시대 때부터 전해오던 ‘함흥차사’와 ‘안성맞춤’이 있고 한국전쟁때 생긴 ‘원산폭격 (군바리 대가리 박아)’과 '낙동강 오리알'도 있다. 또 사천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졌다’라는 말도 있다. 천년고도 진주에는 이런 말이 없을까? '진주라 천리길'이 있고 '진주난봉가'라는 노래도 있다. '진주라 천리길'은 한양에서 천리나 떨어져 멀다는 것이다. 옛날의 진주는 경상우도로서 도시가 제법 컸다. 신라때는 9주5소경 중 하나였고 일제시대에는 진주가 도청소재지였다. 선비가 진주에 올 때는 관직에 임명받고 내려오는 곳이지 유배지가 아니었다. 그러니 '진주라 천리길'이란 말은 오지의 대명사인 '삼수갑산'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천리길 진주'란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대중가요의 영향이 크다. 이규남이 부른 ‘진주라 천리길’은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 뒤 진주가 낳은 불세출의 가황 남인수와 이미자, 김용임이 같은 노래를 리메이커 했다. 한때 진주의 관문인 새벼리 도로변에 ‘천리길 진주, 잘 오셨습니다’라는 대형 입간판이 세워졌던 적도 있다. 진주는 미인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오비도 진주출향인으로서 어디가도 인물은 빠지지 않는데(?) 진주에 가면 에나로 명함찾는데 2박3일이 걸린다. 전해오는 말에 '남진주(南晋州) 북평양(北平壤)'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진주는 미인의 고장인 색향(色鄕)이다. 인걸은 지령이라 진주와 평양은 공통점이 많다. 풍수지리적으로는 진주는 S자형의 남강이 수태극(水太極)을 그리며 뒤벼리와 새벼리를 만들었고 진주성 천하절경 벼랑위에 矗石樓를 세웠다. 평양은 행주형(行舟形)으로 대동강을 끼고 부벽루(浮碧樓)가 있다. 진주냉면과 평양냉면, 진주 기생과 평양 기생, 진주 검무와 평양 검무, 그리하여 진주 교방문화와 평양 교방문화로 연결된다. 혈기왕성한 젊은 사대부는 평양감사 아니면 진주 목사로 발령받아 가고 싶었던 게 당시 한양 남정네들 로망이었다. 왜냐하면 교방소속의 관기(官妓)가 모두 관할 아래에 놓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잘 났다는 것을 재색(才色)이 구비되었다고 한다. 재색을 '달란트'라고 하는데 오늘날의 탈렌트(talent)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요즘 탈렌트를 옛날말로 하면 기생(妓生)이다. 기생은 비록 신분이 천민이지만 아는 것이 많고 교양이 있는 문화인이었다. 이들은 노래, 춤, 악기, 학문, 시, 서화를 알고, 말씨나 행동이 고상하여야 했다. 기생은 선배인 퇴기로부터 기본적인 춤과 노래, 시조 등을 배웠으며, 높은 관리를 대하는 매너와 에티켓도 배웠다. 물론 교양과목 외에 필수전공인 사내 애간장을 녹이는 테크닉과 팜므파탈의 요술도 익혔다. 기생의 세계에도 등급이 있다. 晉州敎坊(진주교방) 일패: 궁중에 출입하는 최고등급의 관기로서 얼마전에 인기리에 방영한 '대장금'과 같은 의녀를 말한다. 현대적 표현으로 탈렌트, 영화배우에 해당된다. 이패: 지방 관아에 속해있는 기녀다. 춘향전에 나오는 대로 관리나 선비, 양반자제가 주 고객이다. 요즘말로 하면 룸싸롱의 언니다. 삼패: 이 부류는 생활기생이라고 한다. 약속다방의 김양이나 퇴폐주점의 마담이다. 진주에는 일패와 이패가 주류를 이루었다. 당연히 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인 교방이란 것이 있었다. 성리학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조선시대의 특목고로서 관기(官妓)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있었다고 하니 진주가 확실히 교육도시인 것이 사실이다. 일제시대에는 권번이라고 불렀고 그 후로 기생조합으로 변천했다. 현재 KT진주지사 자리가 조선 시대 진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관청이었다. 진주 목사 관사 맞은편에 '진주교방'이 있었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시청옆에 시청소속 룸싸롱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갤러리아백화점 주차장이 바로 교방터이다. 그 곳은 풍수지리상 음기(陰氣)가 가득한 곳으로 먼 옛날 선비들을 유혹하는 도화기운(桃花氣運)이 있기 때문에 감수성이 예민한 남학생들이 그곳을 다녀오면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정신집중이 안 된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이후의 남정은 음기를 받아 좋다. 이곳에서는 풍류가 넘치고 문화가 있다. 진주교방에서 전승한 무형문화재중에 진주검무, 진주포구락무, 진주교방굿거리춤, 진주한량무가 있다. 조선 말기에 진주교방이 폐지되자 진주 관기들이 생업을 위해 기생조합을 결성했다. 조합을 일본용어로 권번이라 했는데 전국적으로 많이 생겼다. 지금의 우리은행 진주지점 뒤편 차없는 거리에 권번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세워져 있는데 온갖 좋은 소리만 써 놨다. 일본인이 쓴 <진주대관>에서 따르면 시내 중심가인 대안동에 '진주예기 권번'이 있었다. 그 곳은 평양에 겨룰 수 있을 만큼 규모가 대단했는데 500평 가량의 대지에 큰 기와집과 넓은 마당, 대청마루, 소리, 가야금과 춤을 배우던 큰 연습방이 3개나 됐다고 하니 지금의 SM 타워 정도 되지 않았을까? 진주 기생의 대표격으로 논개(論介)가 있다. 논개를 칭할 때 반드시 의기(義妓)라고 한다. 기생이 갖추어야 할 핵심역량이 미(美), 가(歌), 무(舞), 창(唱) 인데, 논개가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췄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영정사진을 보면 수심이 가득차있는 40대의 중년으로 보인다. 논개가 순국할 때 19세이니 황진이나 춘향과 비교하면 노숙해 보인다. 논개는 전북 장수 출신으로 4갑술생 사주를 가졌다.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로서 굉장히 드문 사주를 가졌다. 경상도 사투리로 '낳다'를 '놓다'라고 하는데 논개가 태어날 때 서당의 훈장을 하던 아버지가 만세력을 놓고 사주를 계산해보니 온통 개판이어서 '개를 놓았다'고 해서 논개라고 불렀단다. 진주에서는 '논개제'와 '논개시장' 등 논개 브랜드로 의기(義妓)의 기백을 이어가고 있다. 의기 논개 말고도 역대 진주기생으로는 승이교(勝二喬), 계향(桂香), 매화(梅花), 옥선(玉仙) 등 빼어난 명기(名妓)들이 있었다. '조선해어화사'등에 진주기생에 대한 기록들이 보인다. 해어화(解語花)란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란 뜻이다. 진주 최초의 妓女 月精花 월정화(月精花)는 기록상 나타나는 진주 최초의 기녀다. 당시 진주 사록(司錄) 벼슬에 있던 위제만(魏齊萬)을 유혹해 그의 부인을 결국 울화병으로 죽게 만든 기녀다. 진주 사람들이 위제만의 부인을 추모하고 위제만의 방탕한 생활을 풍자하기 위해 불렀다는 '월정화'라는 고려가요의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진주난봉가'의 내용과 월정화의 이야기가 설화적 배경이 유사하다. 또다른 이야기로 강혼과 기녀의 로맨스가 있다 목계(木溪) 강혼(姜渾)은 젊은 시절 한때 아리따운 관기와 깊은 사랑을 불태운 일이 있다. 강혼이 기녀와의 사랑에 빠져 있을 무렵, 공교롭게도 진주목사가 부임해왔다. 강혼의 연인이 목사의 눈에 들어 수청을 들게 되었다. 강혼은 사랑하는 기녀를 속절없이 빼앗기게 되었다. 더욱이 관기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혼은 북받쳐 오르는 분함과 연정을 주체할 수 없어 수청을 들러 가는 기녀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한 수의 시를 소매에 써주었다. 기녀의 소맷자락에 쓰인 시를 발견한 목사는 그 연유를 물었다. 시의 작자가 누구냐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기녀는 밝히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는 잡아들이라는 호통이 떨어졌다. 강혼이 붙들려 왔다. 수청 기녀는 말할 것도 없고 아전들은 큰 변이 일어났다며 몸둘 바를 몰라 하는데, 사또는 뜻밖에도 주안상을 준비케 하고 백면서생 강혼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사또는 기생의 소맷자락에 쓰인 시를 보고 그의 글재주와 호기에 마음이 끌려 한 잔 술은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수청을 들 뻔한 기생도 되돌려 주고자 작정한 것이다. 목사가 멋지다. 이만한 러브 스토리이면 로미오와 쥴리엣보다 더 심금을 울린다. 강제로 수청을 들게 했으면 진주판 변사또가 되는 것이고 춘향이는 빛을 보지 못 했을 뻔했다. 춘향이 하나로 울겨먹고 사는 남원시는 이 목사의 공덕비라도 세워 찬양해야 한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진주기생 스토리도 있다. 진주 남강 변에서 1919년 3월 19일 진주기생들이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山紅 진주를 상징하는 또하나의 기생이 있다. 바로 매국노를 꾸짖은 진주기생 산홍(山紅)이다 '매천야록' 에 “진주기생 산홍(山紅)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이때 을사오적의 하나로 지목되는 매국노 이지용(李址鎔)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사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글도 잘 쓰고 얼굴도 예쁜 진주기생 산홍이 이지용의 첩이 되길 거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으며 기생들의 자존감을 높혀주는 일이었다. 이지용이 누구인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적극 찬성하여 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다.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니, 그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하였다. 1906년 을사오적 이지용이 진주를 방문했다. 그가 진주를 방문한 흔적은 촉석루 벼랑에 그의 이름을 새겨 놓은 데서 알 수가 있다. 산홍이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고 거절한 일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절개를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매천야록'에 그때의 일을 기록해 두었다. 蘭珠 그 밖에 문헌상에 나오는 진주기녀들은 문신 안민영은 진주 기녀 난주(蘭珠)를 무척 총애했다. 그가 진주에 왔을 때 그녀를 위해 시조 2수를 지었으니, '진양기녀 난주를 칭찬하다 (讚晋陽蘭珠)'와 '진양기녀 난주를 시제로 함 (題晋陽妓蘭珠)'이다. 영변땅에서 망향가를 부른 진주기녀 채란도 있다. 김소월(金素月)은 오랜 방황 끝에 고향 영변으로 돌아와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한 기녀를 만나게 된다. 이 기녀가 바로 진주가 고향인 채란이다. 고향과 천리나 떨어진 영변 땅의 채란은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멀리 남쪽 고향 진주 땅을 바라보며 처연한 목소리로 '팔베개의 노래'를 부른다. 이때 김소월은 문득 담을 사이에 두고 골목길 저편에서 들려오는 슬프고 절절한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채록하여 '팔베개의 노래조(調)'라는 민요시를 지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김소월의 시밖에 없으므로 채란이 불렀던 노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김소월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歌舞 무릇 가무(歌舞)가 있는 곳에 음식이 없을소냐? 바로 기방음식인 비빔밥과 냉면이 있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지방이름을 붙인 많은 음식이 있지만 비빔밥은 전주와 진주요, 냉면은 평양과 진주다. 인근 사천의 재건냉면이 있다. 비쥬얼은 비슷하지만 재료가 다르다. 냉면이라면 평양냉면 밖에 모르는 서울촌놈들에게 알려준다. 김정일이 생전에 그토록 먹고싶어했다는 것이 '진주랭면'이다. 평양냉면은 서민음식으로서 육수는 고기를 쓴다. 진주냉면은 양반의 음식으로서 해산물 육수가 베이스다. 흔히 평양냉면의 맛을 '슴슴하다'고 표현하는데 잘못되었다. '싱겁고 닝닝하다'의 북한식 버전이다. 값은 더럽게 비싸다. 진주냉면의 유래는 1800년대 후반 진주목의 숙수가 관영에서 나와 옥봉동 개울가 일대에서 냉면을 뽑으면서 출발했다. 그 이후로 진주의 노포인 수정식당, 은하식당에서 냉면의 명맥을 이왔으나 6.25전쟁과 중앙시장의 대 화재로 맥이 끊어진 것을 식생활문화가인 김영복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었다고 한다. 허영만화백의 식객이라는 만화와 수요미식회 등에서 앞다투어 소개하면서 조금 알려지게 되었다. 서울에는 강남역에 있던 진주냉면집이 없어지고 올림픽공원옆에 생겼다가 다시 문을 닫아 아쉬웠는데 최근에 위례와 석촌호수 근처에 진주냉면집이 문을열었다. 최근에 본토 진주에 기생이름을 딴 '산홍냉면'이 생겼다고 한다. 비쥬얼이 기녀의 화초머리채처럼 높고 고명도 실하다. 진주를 방문하는 길손들은 꼭 이집에 들러서 냉면맛과 기생 산홍에 얽힌 스토리를 알고 오시라. 이 집이 잘 돼야 된다. 서울사람에게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오비입맛에는 맛있다. 여유가 있다면 육전을 시켜 소주 한잔을 곁들이면 그 맛이 쏠쏠하다. 선주후면(先酒後麵)을 꼭 제키도록... 색향 진주에 빠진 것이 있다. 색(色)이 있으면 주(酒)가 따라야 하는데, 진주의 높은 기방문화와 구색을 갖출만한 명주가 없다. 빨리 명주를 개발해 주길 바란다. 주명은 풍류주(風流酒), 한량주(閑良酒)라고 하자. 맛있는 술만 만들어 주면 스토리는 오비가 책임지고 분칠해주겠다. 색향 진주를 풍류와 명기의 고장으로 도시를 리메이커하자. 色香 晉州 ***************** 묵향 진주라 천리길: 風流와 색향(色鄕) 감상 옮껴온 글 편집 |
|
첫댓글 군생활을 진해에서 복무를 하여서 귀대시 당시 부산행시외버스를 타면 진주를 걸처가지요. 그래서 진주를 대략 아는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