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 정부는 유학생들을 미국과 유럽으로 꾸준히 보냈습니다. 사무라이 출신 야마카와 겐지로도 그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1871년 그는 “물리학이야말로 서양 학문의 왕”이라고 한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감명받아 예일대학으로 가서 물리를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4년 뒤 돌아와 일본의 첫 물리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도쿄제국대학 교수와 총장을 지낸 그가 가장 역점을 둔 일은 미국의 물리학을 일본에 이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수많은 제자를 키워내는 한편, 서양의 물리학 용어를 번역하고 전국 대학에 물리학과를 개설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제자 나가오카 한타로를 자신이 그랬듯 외국으로 보냈습니다. 통계역학의 창시자인 루트비히 볼츠만의 연구실이었습니다. 이 나가오카의 제자가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니시나 요시오입니다.
니시나 역시 두 스승의 대를 이어 해외로 나갔다. 바로 양자역학의 본고장 코펜하겐대학이었습니다. 니시나는 그곳에서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과 함께 연구했습니다. 특히 지도교수인 보어는 니시나를 위해 이곳저곳에 추천서를 써줄 정도로 그를 신뢰했습니다.
양자역학의 선구자들이 차례로 일본을 방문한 배경에는 바로 이런 끈끈한 네트워크가 존재했습니다. 귀국 후 이화학연구소에 연구실을 꾸린 니시나는 코펜하겐의 동료들을 초청해 제자들에게 강의하도록 했다는데, 그 제자들이 바로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입니다.
이때쯤 되자 일본의 물리학도들에게 더는 해외 유학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유카와와 도모나가는 유럽의 양자역학을 재해석해 독창적인 분야 – 장의 양자론, 양자전기역학 – 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조국에 첫 번째와 두 번째 노벨상을 안겼습니다. 두 선각자는 그대로 일본 과학도의 롤 모델로 자리잡았고, 현재까지도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 국내파라고 합니다.
저는 위에 나온 사람들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일본의 과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위의 글은 다음사이트의 부런치에서 옮겨왔습니다. “알아두면 피와 살이 되는 일본의 과학 문화”
<조선은 전쟁 없이 식민지로 전락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군대 해산은 물론 외교권·사법권 등을 야금야금 침탈당한 끝에 1910년 8월 22일 ‘한국 황제는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게 양여한다’는 조약이 체결되고, 일주일 뒤 공포됐다. 국치일(8월 29일)은 다 잘린 나무에 마지막 도끼질이 가해진 날일 뿐이다.
해방도 독립전쟁의 결실이 아니라 태평양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한 결과로 주어졌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 주석은 ‘백범일지’에 “왜적이 항복한다는 소식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광복군)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심경을 남겼다. 이런 사정 때문에 독립기념일 또는 건국일이 아니라 광복절이 됐고, 한일관계에도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파란만장한 한일 관계사를 돌아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확고한 반일 대통령이었다. 6·25전쟁 당시 미국은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일본군 전역자들을 유엔군에 편입시키려 했는데, “국군은 일본군부터 격퇴한 다음 공산당과 싸울 것”이라며 거부했다. 부산 임시수도 시기임에도 평화선을 선포해 무력 충돌을 불사하며 동해를 지켰다.
일본은 6·25 특수에 힘입어 빨리 일어섰다. 전쟁 중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하고, 미·일 안전보장조약으로 국방비용을 줄였으며, 병참 기지 역할을 하면서 경제는 급성장했다. 반면, 대한민국은 전쟁의 상처가 깊었다. 그나마 이 대통령이 ‘광인 전술’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교육에 투자해 문맹을 퇴치하고 고등교육도 대폭 확대했다. 역설적으로 4·19 혁명은 그런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5·16이 일어났던 1961년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9달러로 125개국 중 101위로 최빈국 그룹에 속했으며, 북한은 320달러로 50위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의 기술과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한일 수교를 결단한다. 대국민 담화에서 “어제의 원수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위한 현명한 대처”라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느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느냐는 우리의 자세와 각오에 달렸다”고 호소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지지층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 국민과 문화의 저력을 믿는다”며 일본 대중문화 개방 결단도 했다. 그런 점에서 김 대통령은 가장 친일적 대통령이다.
3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한일관계는 국력 측면에서 대등해졌고, 문화 국경은 사실상 사라졌다. 후쿠시마 원전 방류수 논란에도 상반기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444만 명으로, 하루 평균 2만5000명 가까이 된다. 일반 국민, 특히 미래 세대에게 대일 콤플렉스는 없다. 이승만과 김구의 항일, 박정희와 김대중의 극일 꿈이 실현된 것이다.
시대정신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구한말에는 조선의 근대화 혁명,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항일 독립투쟁, 해방 뒤엔 자유민주 국가 수립, 6·25 시기엔 호국, 1960년대엔 빈곤 탈피와 산업화, 1980년대엔 민주화, 4차 산업혁명시대엔 경제·기술 일류국 만들기가 시대정신이다. 반일·친일의 개념과 정당성도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
21세기 정세는 식민지 때와는 상전벽해가 됐다. 북한 중국 러시아 등 비정상 국가에 맞서 일본과 안보·경제·기술 등 전방위로 협력해야 한다. 그런데 밀정, 내선일체, 조선총독 등 교활한 구호와 근거 없는 괴담이 난무한다. 과거사를 잊어선 안 되지만, 미래의 발목을 잡게 해선 더욱 안 된다.
죽창가 배경은 동학농민전쟁의 우금치전투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농민군은 죽창으로 맞섰다.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 살육이었다. 부적을 태워 마시고 총탄 피하는 주문을 외우며 돌격했다. 국민을 위하는 지도자라면 해선 안 될 일이다.
뼈저린 피지배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교훈을 얻고, 그 시대를 견뎠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과의 정도를 제대로 따져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할 때다. 국가 지도자에 대한 평가 역시 당대에 필요한 일을 제대로 해냈느냐가 최대 기준이 돼야 한다.
침소봉대 식의 닥치고 친일 몰이야말로 역사를 왜곡하고 제2 국치를 부를 사악한 매국 행태다.>문화일보. 이용식 주필
출처 : 문화일보. 오피니언 이용식의 시론], 죽창가 반일은 제2 국치 부를 매국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의 8.15경축사를 보고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쯤 되면 윤 대통령은 뉴라이트, 친일파 숙주가 아니라 몸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인, 제가 보기엔 대부분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제발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 정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