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일 토요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알폰소 성인은 1696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변호사로 일하다가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1726년 사제품을 받은 알폰소는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설립하고, 올바른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설교와 저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나폴리 근처에 있는 고티의 교구장 주교로 사목하다가 다시 수도회로 돌아가 1787년에 선종하였다. 1839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던 알폰소 주교를 시성하였다.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폐영폐성의 개와 같은 사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체면과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아주 중요시합니다. 사실 인간관계는 참으로 중요한 것으로 잘 살고 못 살고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 되기도 하는데, '폐영폐성'(吠影吠聲)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한 마리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주위의 모든 개가 덩달아 짖어댄다.’는 말입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에 대하여 물고 늘어지고 얽히고설킨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누가 잘했느냐 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떤 관점으로 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해결의 가장 큰 관건이 됩니다.
예언자 요한을 두려워하면서도 세상의 체면이나 헛된 약속 때문에, 또 자신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제거하려는 헤로데는 폐영폐성의 개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옳은 말은 감춰지고, 바르게 사는 사람은 박해를 받아도 바로잡아줄 사람이나 제도가 없는 것입니다. 언론도 군중의 외침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쪽으로 몰고 간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이나 언론 또한 군중이 잘못된 쪽으로 몰고 간다면 정말 폐영폐성의 결과가 생기게 되고 대세가 기울어집니다. 며칠 전 교실에서 극단 선택을 한 초등학교 교사에 관해서 말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각각 다릅니다. 또 새만금에서 열리는 세계 잼버리 대회에 대해서도 말이 많습니다. 내가 잘하면 그만이지 전 정부의 잘못은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올바른 귀가 있고, 올바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옳게 판단할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몰고 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항상 옳은 쪽으로 판단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약속은 지키려고 있는데 헛된 약속은 우리를 참으로 어렵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구약과 신약의 약속을 지키셨지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약속을 지키셨고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신의(信義)라고 하는데 믿음과 옳음이 근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헤로데는 의붓딸의 춤에 반해서 나라의 반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요한을 죽게 하는 약속을 합니다. 그는 헛된 약속으로 추악한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합니다. 우리의 일생도 사실은 약속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수많은 약속들이 매 순간 일어나고 그 약속들 중에서 얼마나 지키고 약속대로 이행하였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거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온 자신을 발견합니다. 약속들을 가볍게 생각하고 지키지도 못할 것을 약속하면서 살았고 지키려고 노력하지 못하면서 살았습니다.
신앙생활의 근간도 약속입니다. 하느님과 우리들의 삶 속에 하나하나 약속으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날 하루를 주님께 봉헌한다고 약속하고, 저녁에 눈을 감으면서 그날 삶을 반성하면서 얼마나 주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며 살았는지 생각해 봅니다. 기도도 약속이고, 결혼도 약속이고, 사랑도 약속입니다. 계약도 약속이고, 수업시간도 약속입니다. 모든 교육은 약속입니다. 사업도 일도 모두 약속입니다. 그 중에 자신과의 약속은 가장 어려운 약속입니다. <서비스 삼각형>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비스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와 고객 간에 약속을 정합니다. 그리고 서비스 주체는 그 약속을 이행할 종업원들에게 약속을 이행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조성해줍니다. 그리고 종업원들은 고객들에게 그 약속을 이행합니다.
이 공식은 모든 교회에서 성취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주시어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로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뽑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그 약속을 이행하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지요.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도구로 교회를 세워주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할 수 있는 조직도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복음 선교에 총력을 다 하도록 불림을 받은 사람들은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우리는 얼마나 잘 지키고 있나요? 많은 이가 구원과 행복을 찾아서 교회에 오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가슴에 응어리 진 것을 풀기 위해서 교회를 찾지만 그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냉담한 마음으로 다시 교회를 떠납니다. 지금 냉담한 신자들이 46%를 상회한다고 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군가 교회를 떠난다고 하면 같이 떠나고자 하는 나약한 신앙인으로 폐영폐성의 효과가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지 않았고 주님 말씀을 소홀이하여 가르치심을 무시하고 약속한 것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얄팍한 신심에 대하여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