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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오흑흑(天下五黑黑)
천하에 다섯 가지 어둡고 어두운 것이 있다는 뜻으로, 임금이 통치를 잘못하는 5가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줄여서 오흑론(五黑論)이라고 한다.
天 : 하늘 천(大/1)
下 : 아래 하(一/2)
五 : 다섯 오(二/2)
黑 : 검을 흑(黑/0)
黑 : 검을 흑(黑/0)
세상에는(天下) 다섯 가지의 어둡고 어두운 나쁜 것이 있다(五黑黑)는 뜻의 성어다. 어찌 나쁜 것이 다섯 가지뿐이겠는가 만은 그것마저도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에게는 보여도, 눈을 다 뜬 정상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사물을 살펴 앞을 내다보는 마음의 눈 심안(心眼)을 가진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악사 사광(師曠)이 통치를 하는 임금이 보지 못하는 다섯 가지를 지적한 데서 나온 얘기다.
중국의 악성(樂聖)이라 칭송받는 사광(師曠)은 눈이 보이지 않고, 서양의 악성 베토벤(Beethoven)은 귀가 들리지 않았으니 마음으로 음을 다스린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진(晉)나라 평공(平公) 때의 유명한 궁정악사 사광은 가장 귀가 밝고 시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지만 솜씨가 정밀하지 못한 것은 마음을 집중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 그는 쑥 잎을 태운 연기로 눈에 씌어 멀게 했다.
이후로는 음악에 전념하여 마침내 소리만 듣고도 기후의 변화를 살피고 미래의 길흉까지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사광지총(師曠之聰)이란 말이 귀가 밝음의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앞이 안 보이면서도 최고 관직 태사(太師)가 되어 왕을 수행하고 전장 터마다 수행했다. 그가 새소리만 듣고 예측한대로 주둔하고 적군이 물러갔으니 더욱 신임을 받았다.
중국 전한(前漢) 말기의 학자인 유향(劉向)이 편집한 고사집 신서(新序) 卷一 잡사(雜事)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 나온다.
晉平公閒居, 師曠侍坐.
진평공한거, 사광시좌.
춘추시대 진(晉)나라 평공(平公)이 유명한 음악가 사광(師曠)과 대좌하게 되었다.
平公曰; 子生無目眹, 甚矣! 子之墨墨也.
평공왈; 자생무목진, 심의! 자지묵묵야.
평공이 사광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볼 수 없이 고통이 심하겠소! 얼마나 답답하고 어둡겠소.”
師曠對曰; 天下有五墨墨, 而臣不得與一焉.
사광대왈; 천하유오묵묵, 이신부득여일언.
사광이 대답했다. “세상의 다섯 가지 어둡고 어두운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平公曰; 何謂也?
평공왈; 하위야?
평공이 “무슨 말이오?”하니
師曠曰; 群臣行賂, 以采名譽, 百姓侵冤, 無所告訴, 而君不悟, 此一墨墨也.
사광왈; 군신행뇌, 이채명예, 백성침원, 무소고소, 이군불오, 차일묵묵야.
사광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관리가 뇌물을 받고 백성을 수탈해도 하소연 할 곳이 없는데도 군왕이 모르고 있는 것이 첫 어두움입니다.
忠臣不用, 用臣不忠, 下才處高, 不肖臨賢, 而君不悟, 此二墨墨也.
충신불용, 용신불충, 하재처고, 불초임현, 이군불오, 차이묵묵야.
충직한 신하는 등용하지 않고 발탁한 신하는 충성하지 않으며, 재주도 없고 불초한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해도 모르는 것이 둘 째 어두움이오.
奸臣欺軸, 空虛府庫, 以其少才, 覆塞其惡, 賢人逐, 奸邪貴, 而君不悟, 此三墨墨也.
간신기축, 공허부고, 이기소재, 복색기악, 현인축, 간사귀, 이군불오, 차삼묵묵야.
간신이 나라 창고를 비우고 악행을 저지르며 현인을 쫒아내며 간신만 부귀를 누르는데도 모르는 것이 셋째 어두움이오.
國貧民罷, 上下不和, 而好財用兵, 嗜欲無厭, 諂諛之人, 容容在旁, 而君不悟, 此四墨墨也.
국빈민파, 상하불화, 이호재용병, 기욕무염, 첨유지인, 용용재방, 이군불오, 차사묵묵야.
백성은 가난에 지쳐 있고 상하가 불화하는데도, 군주가 군대를 자주 사용하며, 욕망을 제지 못하며, 아첨하는 자가 곳곳에서 알랑대는데도 모르는 것이 그 넷째 어두움이오.
至道不明, 法令不行, 吏民不正, 百姓不安, 而君不悟, 此五墨墨也.
지도불명, 법령불행, 이민불정, 백성불안, 이군불오, 차오묵묵야.
도리가 불명하며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며 관리들이 부정을 저질러 백성이 불안한데도 알지 못하는 것이 다섯째 어두움입니다.
國有五墨墨而不危者, 未之有也.
국유오묵묵이불위자, 미지유야.
나라에 이런 어두움이 가득하면 위태롭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臣之墨墨, 小墨墨耳. 何害乎國家哉!
신지묵묵, 소묵묵이. 하해호국가재!
신이 앞을 못 보는 것은 작은 어두움입니다. 아 국가의 이런 해로움은 어떻게 합니까!”
新序卷第一 雜事
신서권제일 잡사
임금이 보지 못하는 것을 오묵묵(五墨墨)으로 표현했다. 관리가 뇌물을 받고 백성을 수탈해도 모르고, 사람을 바로 기용할 줄 모르며, 현인을 쫓아내고 간신이 부정축재해도 모른다고 했다. 또 전쟁을 자주 일으켜 백성을 힘들게 하고, 그러면서 그들의 어려운 삶에 관심이 없는 것이라 직언한 것이다.
앞이 안 보이는 사광에게도 백성이 귀하고 그들의 삶을 보살펴야 나라가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높은 자리의 임금은 자만하여 보이지 않는다.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거나 위정자들은 어떻게 아랫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할지 마음의 눈을 잘 가꿔야 한다.
사광은 단순히 음악에만 정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박학다식했고 총명했고 또 올곧았다. 이 때문에 수시로 임금의 정책에 자문 노릇을 했고, 어떤 기록에는 그가 재상에 해당하는 태재(太宰) 벼슬에 있었다고도 한다.
사광은 백성은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는 민귀군경(民貴君輕)을 맹자(孟子)보다 훨씬 앞서 최초로 주장한 민본주의자이기도 하다. 이런 그였기에 최고통치자 앞에서 거리낌 없이 그 잘못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상(宰相)은 역사적으로 정치 무대에서 줄곧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를 맡아왔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천하의 안위를 한 몸에 짊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재상권(宰相權)의 크기는 정치 판국의 안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즉, 재상권이 무겁고 크면 국력이 강했고, 그 반대면 국력이 쇠약했다는 점도 엄연한 사실이다.
나아가 재상은 최고통치자의 자질을 보완함과 동시에 통치자의 자질을 완성해주는 기능까지 수행했다. 일찍이 상(商)나라 탕(湯) 임금은 이윤(伊尹)이란 인재를 모셔오기 위해 다섯 번이나 청을 올렸다. 저 유명한 오청이윤(五請伊尹)이란 고사성어의 출전이다.
이윤은 탕 임금의 정성에 감복해 탕을 보좌해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윤은 나아가 탕 임금에게 요리를 가지고 통치의 이치를 설파했고, 탕 임금은 이윤의 도움으로 훌륭한 명군으로 그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었다.
최근 국무총리 지명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정말 우리가 21세기 개명된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총리 후보자의 자격 공방도 답답했거니와 현재 우리나라에서 총리가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인가, 통치자가 과연 총리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고 인정하고 그에 맞는 권력을 부여하는가 등등 모든 점을 다시금 곱씹어보게 했다. 솔직히 지금 이 시대 총리의 현실은 수천 년 전 왕조 체제에서 재상이 가졌던 존재감에도 못 미치는 수준 아닌가.
엄연한 역사적 사실 하나가 가슴속으로 비수처럼 날아왔다. 역대로 현명한 통치자 밑에 현명한 재상, 즉 성군현상(聖君賢相)은 가능했어도, 못난 제왕 밑에 현명한 재상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맹인 재상 사광은 정치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만 하는 임금 도공 앞에서 오흑론으로 그를 질타한 것은 물론 끝내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거문고를 그를 향해 내던졌다고 한다. 기록에 따라서는 사광이 도공을 거문고로 내리쳤다고도 한다.
못난 통치자 밑에 명재상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2200년 전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천하 패권을 다투던 초한쟁패(楚漢爭覇) 때 유방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절묘한 계책을 내놓아 난관을 헤쳐나가게 도운 진평(陳平)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이 지낭(智囊), 즉 꾀주머니였다. 진평은 그저 그런 꾀돌이가 아니었다.
진평은 젊어서부터 포부가 대단했다. 한번은 마을 제사에서 사람들에게 고기를 나눠주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진평은 정말이지 모두에게 공평하게 고기를 나눠줬고,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칭찬했다. 여기서 '진평이 고기를 나눠준다'는 유명한 고사성어 '진평분육(陳平分肉)'이 나왔다.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동네 어른들은 모두 진평을 칭찬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이 그다지 마음에 안 들었던지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하를 나누라고 해도 그렇게 공평하게 잘 나눌 텐데!" 자신은 마을 제사에서 고기나 나누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말이기도 하고, 천하의 일을 맡겨도 얼마든지 잘 처리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함께 묻어나는 한탄이기도 했다.
"재상 하는 일은 무엇이오?"
진평이 마을 제사에서 고기 나누는 일을 맡은 것을 '주재(主宰)'라고 한다. 고기 나누는 일을 주도했다는 뜻이다. 재상(宰相)이란 단어에서 '재(宰)'는 본래 고기를 고루 나눈다는 이 글자 뜻에서 기원한다. 제사에서 고기를 고루 공평하게 잘 나누듯이 나라 일도 그렇게 공평하게 잘 처리하는 자리가 바로 재상이라는 것이다. 다음 글자인 '상(相)'은 돕다, 보좌하다는 뜻이다. 합쳐 보자면 제왕을 도와, 또는 보좌해 천하의 일을 주재하는 자리가 바로 재상이다.
꾀돌이 진평은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건국하자 일등공신의 반열에 올랐고,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을 거쳐 여태후(呂太后) 때 마침내 자신이 호언장담한 대로 천하의 일을 주재하는 재상(당시 명칭은 승상/丞相) 자리에 올랐다. 여태후 집권 때는 공신들에 대한 감시와 박해가 심했다. 진평은 여태후의 경계를 풀기 위해 늘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다가, 그가 죽자 바로 여씨 세력들을 소탕한 다음 문제(文帝)를 추대해 주발(周勃)과 공동 재상 자리에 앉았다.
문제는 덕정(德政)과 인정(仁政)으로 정국을 안정시켜갔고, 이로써 한나라를 정권 초기에 흔히 나타나는 병목 위기에서 구했다. 하루는 문제가 조회석상에서 우승상 주발에게 1년에 형사 사건으로 판결하는 건수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주발은 당황하며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어 문제는 1년의 재정 수입과 지출 상황을 물었다. 주발은 이 질문에도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자 문제는 좌승상 진평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진평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건 담당하는 관리가 따로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문제가 담당 관리는 누구냐고 묻자 진평은 "폐하께서 형사 사건 판결에 대해 궁금하시면 정위(廷尉)에게 물으시면 되고, 재정이 궁금하시다면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물으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문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렇다면 재상이 하는 일은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진평은 문제에게 절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께서 어리석은 신에게 재상 자리를 맡겨주셨습니다. 무릇 재상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며 음양을 다스려 사시(四時)를 순조롭게 하고, 아래로는 만물이 제때에 성장하도록 살피며, 밖으로는 사방 오랑캐와 제후들을 진압하고 어루만지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가까이 따르게 하며, 경대부(卿大夫)로 하여금 그 직책을 제대로 이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평의 이 대답에 문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승상 주발은 크게 부끄러워하여 조회에서 물러나온 다음 진평을 원망하며 "그대는 어째서 내게 진작 가르쳐주지 않았소?"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진평은 웃으면서 "그대는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승상의 임무를 모르시오? 만약 폐하께서 장안(長安)의 도적 수를 물으셨다면 그대는 억지로 대답하려고 하였소?"라고 면박을 주었다.
주발은 자신의 능력이 진평에 훨씬 못 미침을 알고는 병을 핑계 삼아 재상의 자리를 내놓았다. 이로써 진평은 유일한 재상이 됐다.
임금보다 부자였던 관중
중국 역사에서 재상에 해당하는 자리가 생긴 이래로 약 80개 왕조에 1000명이 넘는 재상이 있었다는 통계가 있다. 이들 중 재상 본연의 직무를 훌륭히 수행한 사람들을 일컬어 명재상이라 하는데 대체로 다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개혁 혁신형 재상으로 전국시대 최고 개혁가로 꼽히는 상앙(商앙)을 비롯해 송나라 때 신정(新政)을 주도한 왕안석(王安石), 명나라 때의 개혁 재상 장거정(張居正)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 최고 통치자에게 바른말을 잘 하는 직간(直諫)형으로 삼국시대 촉한의 제갈량(諸葛亮), 당나라 태종 때의 위징(魏徵), 청나라 때의 범문정(范文程), 저 멀리 하나라 때의 관용봉(關龍逢), 은나라 때의 비간(比干) 등을 들 수 있다.
셋째는 곧은 심지를 지킨 절개형으로 나라가 망했음에도 끝까지 원나라에 투항하기를 거부하다 죽은 남송의 문천상(文天祥), 망한 명나라를 끝까지 지키려 한 육수부(陸秀夫)와 사가법(史可法)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당 태종 때의 명재상 위징은 직간의 대명사였다. 그가 죽자 태종은 자신의 언행을 바로잡아주던 거울 하나를 잃었다며 통곡했다.
이 밖에 춘추시대 제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끈 관중(管仲) 같은 재상은 경륜이 뛰어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관중은 제나라 군대를 최강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제나라 백성을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만드는 부민(富民)을 실현해 역대 모든 재상 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관중이 남긴 "창고가 넉넉해야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衣食足卽知榮辱)"는 명언은 2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관중은 그 자신도 대단히 부유해 임금 환공(桓公)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는 관중의 호화로운 생활을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나라 백성 누구도 관중을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백성을 모두 부유하게 만드느라 죽을 때까지 40년 이상을 나라에 봉사한 관중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제갈량은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재상이다. 재상으로서 제갈량은 '삼공(三公)'으로 대변되는데, 공개(公開), 공평(公平), 공정(公正)이 바로 그것이다. 제갈량은 모든 정책을 공개적으로 논의했다. 공개한 이상 공정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고, 공정하게 처리했으니 공평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은 법가(法家)사상의 영향을 받아 상벌을 엄격하게 집행했다. 하지만 그의 법집행 역시 삼공의 원칙에 입각해 처리됐다. 이 때문에 제갈량이 상을 내리면 어느 누구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으며, 그가 벌을 내려도 누구 하나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궁진력(鞠躬盡力)
제갈량은 재상 중의 재상으로 길이 이름을 남겼다. 말하자면 명재상의 전형(典型)이었다. 현대 중국인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또 한 사람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가 죽자 '국궁진력(鞠躬盡力)'이란 네 글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것은 제갈량이 출정에 앞서 유선에게 바친 저 유명한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 제갈량은 이 글에서 "신은 죽을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할 것입니다"라며 비장한 결의를 표시했다. 전·후 2편의 '출사표'는 역대 수많은 뛰어난 문장 가운데서도 명문으로 꼽히는데, 제갈량의 인간됨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주는 글은 없다는 평가가 많다.
제갈량은 또 북벌에 앞서 유선에게 올린 글에서 재산을 공개했다. 얼마 되지 않은 재산이나마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며 자신은 오로지 촉과 백성들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할 뿐이라고 했다. 그가 죽은 뒤 집안을 정리하려고 보니 당초 제갈량 자신이 밝힌 재산에서 한 뼘의 땅도, 한 푼의 돈도 늘지 않았다고 한다.
제갈량은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북벌에 나섰다가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사했다. 말하자면 과로사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뒷일까지 대비한 다음 촉나라 군대를 철수시켰다.
제갈량의 충정과 청렴 정신은 후손에게도 유전됐다. 아들 제갈첨(諸葛瞻)은 후주(后主) 유선(劉禪)의 딸과 결혼한 부마라는 귀한 신분이었지만 위나라 장수 등애(鄧艾)와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고관대작의 회유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자결했다. 제갈첨의 아들 제갈상(諸葛尙)도 면죽관(綿竹關) 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음은 제갈량의 '출사표' 중에서 한 대목이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여 중용하고 소인들을 멀리하여 내친 일, 이것은 바로 전한의 고조· 문제· 경제· 무제 때에 한창 흥성해 잘 다스려졌던 까닭입니다. 소인배를 가까이하여 등용하고 어진 신하들을 멀리하여 내친 일, 이것은 바로 후한의 환제와 영제가 천하를 망하게 한 까닭으로 이를 논하면서 일찍이 환제와 영제를 두고 탄식하며 가슴 아파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습니다.”
무능한 통치 5가지
1000명이 넘는 역대 재상 중 제갈량같은 명재상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대부분 최고 통치자의 눈치나 보는 복지부동(伏地不動)형이었고, 무능한 재상도 많았다. 또 간신 유형의 재상도 수두룩했다.
송나라 때 황제와 짜고 명장 악비(岳飛)를 모함해서 죽인 것은 물론 금나라에 나라를 송두리째 팔아넘기려 한 진회(秦檜) 같은 재상은 매국형 재상, 명나라 때 환관으로서 실질적인 재상 노릇을 했던 위충현(魏忠賢)은 공안통치로 백성을 잔인하게 탄압한 잔혹형 재상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청나라 건륭제 때의 재상 화신(和?)은 탐욕의 화신이었다. 그는 재상으로 있으면서 무지막지한 부정부패로 자신의 배를 불린 탐관오리였다. 가경제가 즉위해 그의 재산을 몰수해 조사해보니 청나라 18년간의 재정과 맞먹었다고 하니 그의 부정축재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안 갈 정도다. 그가 죽자 항간에서는 '화신이 쓰러지자 가경제가 배불리 먹었다'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춘추시대 진(晉: 지금의 산시성 지역)나라에는 음악에 정통한 사광(師曠)이란 악사(樂師)가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무렵에 활동한 사광은 맹인이었다. 그에 얽힌 전설을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다는 설에서 음악에만 전념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눈을 멀게 했다는 설까지 다양하다.
여기서 '사광의 귀밝음'을 뜻하는 '사광지총(師曠之聰)'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또 사광이 천리 밖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고 해서 순풍이(順風耳)란 단어도 파생됐다. 역사에서는 2500년 넘게 사광을 악성(樂聖)이라 부르며 존중해왔다.
그런데 사광은 단순히 음악에만 정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박학다식했고 총명했고 또 올곧았다. 이 때문에 수시로 임금의 정책에 자문 노릇을 했고, 어떤 기록에는 그가 재상에 해당하는 태재(太宰) 벼슬에 있었다고도 한다.
한번은 당시 진나라 임금이던 도공(悼公)이 사광에게 눈이 그렇게 어두운데도 어쩌면 그렇게 소리와 음악에 뛰어나냐며 칭찬했다. 그러자 사광은 노기 띤 목소리로 "내 눈 어두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임금이 어두운 게 문제"라며 유명한 '천하오흑흑(天下五黑黑)' 논리를 설파했다. 즉, 천하에 다섯 가지 어둡고 어두운 것이 있다는 뜻으로 임금이 통치를 잘못하는 5가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줄여서 '오흑론(五黑論)'이라고 한다. 사광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첫째, 군왕이 신하가 뇌물이나 도박·투기 따위로 유명한데 이를 모르는 것입니다.
둘째, 군왕이 사람을 제대로 바르게 기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군왕이 어진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넷째, 군왕이 군대를 자주 사용하여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군왕이 백성의 삶이 어떤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광은 백성은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는 '민귀군경(民貴君輕)'을 맹자(孟子)보다 훨씬 앞서 최초로 주장한 민본주의자이기도 하다. 이런 그였기에 최고통치자 앞에서 거리낌 없이 그 잘못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맹인 재상 사광의 오흑론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통렬하다 못해 가슴 아프다.
재상의 존재감, 총리의 현실
재상은 역사적으로 정치 무대에서 줄곧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맡아왔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천하의 안위를 한 몸에 짊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재상권(宰相權)의 크기는 정치 판국의 안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즉, 재상권이 무겁고 크면 국력이 강했고, 그 반대면 국력이 쇠약했다는 점도 엄연한 사실이다.
나아가 재상은 최고통치자의 자질을 보완함과 동시에 통치자의 자질을 완성해주는 기능까지 수행했다. 일찍이 상(商)나라 탕(湯) 임금은 이윤(伊尹)이란 인재를 모셔오기 위해 다섯 번이나 청을 올렸다. 저 유명한 '오청이윤(五請伊尹)'이란 고사성어의 출전이다.
이윤은 탕 임금의 정성에 감복해 탕을 보좌해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윤은 나아가 탕 임금에게 요리를 가지고 통치의 이치를 설파했고, 탕 임금은 이윤의 도움으로 훌륭한 명군으로 그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었다.
최근 국무총리 지명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정말 우리가 21세기 개명된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총리 후보자의 자격 공방도 답답했거니와 현재 우리나라에서 총리가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인가, 통치자가 과연 총리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고 인정하고 그에 맞는 권력을 부여하는가 등등 모든 점을 다시금 곱씹어보게 했다. 솔직히 지금 이 시대 총리의 현실은 수천 년 전 왕조 체제에서 재상이 가졌던 존재감에도 못 미치는 수준 아닌가.
엄연한 역사적 사실 하나가 가슴속으로 비수처럼 날아왔다. 역대로 현명한 통치자 밑에 현명한 재상, 즉 성군현상(聖君賢相)은 가능했어도, 못난 제왕 밑에 현명한 재상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맹인 재상 사광은 정치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만 하는 임금 도공 앞에서 오흑론으로 그를 질타한 것은 물론 끝내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거문고를 그를 향해 내던졌다고 한다(기록에 따라서는 사광이 도공을 거문고로 내리쳤다고도 한다).
▶ 天(천)은 회의문자로 사람이 서 있는 모양(大)과 그 위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一)의 뜻을 합(合)한 글자로 하늘을 뜻한다. 天(천)은 인도에서 모든 신을 통들어 이르는 말이다. 또한 천지 만물을 주재하는 사람 곧 조물주나 상제 등이나 인간세계보다 훨씬 나은 과보를 받는 좋은 곳 곧 욕계친(欲界責), 색계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 등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天(천)은 하늘, 하느님, 임금, 제왕, 천자, 자연, 천체, 천체의 운행, 성질, 타고난 천성, 운명, 의지, 아버지, 남편, 형벌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하늘 건(乾), 하늘 민(旻), 하늘 호(昊), 하늘 궁(穹),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흙 토(土), 땅 지(地), 땅 곤(坤), 흙덩이 양(壤)이다. 용례로는 타고난 수명을 천수(天壽), 하늘과 땅 또는 온 세상이나 대단히 많음을 천지(天地), 타고난 수명 또는 하늘의 명령을 천명(天命), 사람의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를 천연(天然),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이 곧 황제나 하느님의 아들을 천자(天子), 우주에 존재하는 물체의 총칭을 천체(天體), 부자나 형제 사이의 마땅히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천륜(天倫), 타고난 성품을 천성(天性), 하늘 아래의 온 세상을 천하(天下), 천체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천문(天文), 하늘과 땅을 천양(天壤),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재주를 천재(天才), 하늘에 나타난 조짐을 천기(天氣), 하늘이 정한 운수를 천운(天運), 자연 현상으로 일어나는 재난을 천재(天災),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과 땅 사이와 같이 엄청난 차이를 천양지차(天壤之差), 선녀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천의무봉(天衣無縫), 세상에 뛰어난 미인이라는 천하일색(天下一色) 등에 쓰인다.
▶ 下(하)는 지사문자로 丅(하)는 고자(古字)이다. 밑의 것이 위의 것에 덮여 있는 모양이며, 上(상)에 대한 아래, 아래쪽, 낮은 쪽, 나중에 글자 모양을 꾸며 지금 글자체가 되었다. 下(하)는 아래나 밑 또는 품질이나 등급을 上과 下 또는 上, 中, 下로 나눌 때의 가장 아래 끝째를 말한다. 그리고 일부 한자로 된 명사 다음에 붙이어 ~밑에서, ~아래서의 뜻으로 그 명사가 조건이나 환경 따위로 됨이나, 나타내어 ~하에, ~하에서, ~하의 형으로 쓰인다. 그래서 아래, 밑(물체의 아래나 아래쪽), 뒤, 끝, 임금, 귀인의 거처, 아랫사람, 천한 사람, 하급, 열등 조건, 환경 등을 나타내는 말, 내리다, 낮아지다, 자기를 낮추다, 못하다, 없애다, 제거하다, 물리치다, 손대다, 착수하다, 떨어지다, 항복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낮을 저(低), 낮을 비(卑), 내릴 강(降), 항복할 항(降), 낮출 폄(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윗 상(上), 높을 존(尊), 높을 고(高)이다. 용례로는 공중에서 아래쪽으로 내림을 하강(下降), 값이나 등급 따위가 떨어짐을 하락(下落), 어떤 사람의 도급 맡은 일을 다시 다른 사람이 도거리로 맡거나 맡기는 일을 하청(下請), 아래쪽 부분을 하부(下部), 강이나 내의 흘러가는 물의 아래편을 하류(下流), 산에서 내려옴을 하산(下山), 낮은 자리를 하위(下位), 공부를 끝내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옴을 하교(下校), 한 달 가운데서 스무 하룻날부터 그믐날까지의 동안을 하순(下旬), 정오로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하오(下午), 차에서 내림을 하차(下車), 위에서 아래로 향함을 하향(下向),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라는 하석상대(下石上臺), 붓만 대면 문장이 된다는 하필성장(下筆成章), 아랫사람의 사정이나 뜻 등이 막히지 않고 위에 잘 통함을 하정상통(下情上通),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버릇은 고치지 못한다는 하우불이(下愚不移) 등에 쓰인다.
▶ 五(오)는 지사문자로 乄(오)와 동자(同字)이다. 숫자는 하나에서 넷까지 선을 하나씩 늘려 썼으나 다섯으로 한 단위가 되고 너무 선이 많게 되므로 모양을 바꿔 꼴로 썼다. 五(오)는 나중에 모양을 갖춘 자형(字形)이다. 다섯, 다섯 번, 다섯 곱절, 오행(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제위(제왕의 자리), 별의 이름, 다섯 번 하다, 여러 번 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떳떳한 도리를 오륜(五倫), 한 해 가운데 다섯째 달을 오월(五月), 그 달의 다섯째 날 또는 다섯 날을 오일(五日), 음률의 다섯 가지 음을 오음(五音), 다섯 가지 곡식(쌀 보리 조 콩 기장)을 오곡(五穀), 다섯 가지의 감각(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오감(五感), 다섯 가지 빛깔 곧 푸른빛 누른빛 붉은빛 흰빛 검은빛의 다섯 가지 색을 오색(五色), 다섯 가지 계율이나 계명을 오계(五戒), 퍽 많은 수량을 나타내는 말을 오만(五萬), 다섯 가지 욕심이라는 오욕(五慾), 사람이 타고 난 다섯 가지 바탕을 오사(五事), 짙은 안개가 5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오리무중(五里霧中), 오십보 도망한 자가 백보 도망한 자를 비웃는다는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오십이 되어 천명을 안다라는 오십천명(五十天命), 다섯 수레에 가득 실을 만큼 많은 장서라는 오거지서(五車之書), 좀 못하고 좀 나은 점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오십소백(五十笑百), 닷새에 한 번씩 바람이 불고 열흘만에 한번씩 비가 온다는 오풍십우(五風十雨) 등에 쓰인다.
▶ 黑(흑)은 회의문자로 黒(흑)은 통자(通字)이다. 불을(火) 피워 창이 검게 그을린다는 뜻이 합(合)하여 검다를 뜻한다. 黑(흑)은 흑색 또는 흑지의 뜻으로 검다, 거메지다, 거멓게 되다, 사리에 어둡다, 나쁘다, 악독하다, 고약하다, 사악하다, 모함하다, 횡령하다, 착복하다, 검은빛, 흑색, 저녁, 밤, 은밀한, 보이지 않는, 비밀의, 비공개적인, 돼지, 양(羊: 솟과의 동물) 따위의 뜻이 있다. 뜻을 가진 한자는 검을 려/여(黎),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흰 백(白)이다. 용례로는 검은빛과 흰빛을 흑백(黑白), 검은 빛의 글자나 먹으로 쓴 글자를 흑자(黑字), 분필로 글씨를 쓰게 만든 칠을 한 널조각을 흑판(黑板), 흑색 인종의 준말을 흑인(黑人), 검은 빛을 흑색(黑色), 털빛이 검은 소를 흑우(黑牛), 검은 빛깔의 돌을 흑석(黑石),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음흉한 내막을 흑막(黑幕), 몹시 껌껌하고 어두움을 흑암(黑暗), 캄캄한 밤을 흑야(黑夜), 검은 팥을 흑두(黑豆), 껍질 빛깔이 검은 콩을 흑태(黑太), 부정한 욕심이 많고 음흉한 마음을 흑심(黑心), 터무니없이 또는 출처를 밝히지 않고 비밀리에 하는 선전을 흑색선전(黑色宣傳), 머리가 검은 재상이라는 뜻으로 젊은 재상을 이르는 흑두재상(黑頭宰相), 모든 문제를 흑이 아니면 백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방식의 두 가지로만 구분하려는 논리를 흑백논리(黑白論理), 검은 것과 흰 것이 뒤섞여 나눌 수 없음 흑백불분(黑白不分), 흑풍이 몹시 부는 가운데 쏟아지는 소낙비를 흑풍백우(黑風白雨),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