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67] ‘1천년 의견비’ 앞에 울려 퍼진 ‘폭포 목청’
8월 5일(토) 오후 5시, 1천년 이상 된 의견비가 의연하게 서있는 임실군 오수면 원동산(오수공원)의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 염천지하, 삼복더위임에도 불구하고(어지간히 뜨거워야지, 너무 심하다. 잼버리대회는 개판이 되고), 동네 어르신들을 비롯하여 삼삼오오 100여명의 인파가 모여 들었다. 이미 플래카드를 보셨으리라. <지리산 7년 독공 ‘폭포 목청’ 명창 배일동 판소릴 거리공연>. 그렇다. 해외에 더 이름이 알려진 소리꾼 배일동이 한양에서 이곳을 찾았음에야.
배명창, 소락때기를 지르기 전에 멋진 모시한복(그날 처음으로 입었다한다)으로 갈아입고 의견비 앞에서 먼저 공손히 절을 하며 예의를 차렸다. 일성一聲이 “천년 전에 주인을 구하고 숨진 의롭고 충직한 개의 혼을 달래려 이 비를 세웠다니 놀랍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비의 전면에 글자 하나 없이 새겨진 개의 문양과 개 발자국 네 개다. 보고 있어도 믿기 어렵다. 아무래도 이 비 앞에서 개의 ‘천년의 넋’을 달래며 이 ‘개만한 못한 세태世態’를 꾸짖으라고 하는 것만 같다. 인연이 닿았으니 최선을 다해 보겠다”였다. 멀리 진도에서 국립국악원 피리의 명인 나영선 박사도 새로 장만한 태평소를 들고 달려왔다. 두 명인이 엮어낸 그날의 퍼포먼스는 완벽했다. 언제 이런 호사스런 행사가 의견비 앞에서 있었던가.
사회자인 ‘엉겅퀴 박사’도 얼굴이 상기됐다. 오수면 여러 단체(오수의견문화제위, 지역개발위, 오수개연구소)의 자발적인 협조로 ‘냉 엉컹퀴 막걸리’가 마련되고, 임실군청의 앰프와 마이크 협조 (이용할 필요가 없었지만) , 부채와 의자 100여개, 냉동 물병 등 준비도 완벽했다. 5시가 조금 넘자 바람도 좀 불기 시작해 ‘개판’을 벌이기에 딱 좋았다.
이 날의 행사는 청중 중의 한 명이 개인 인연으로 명창을 초대한 것인데, 오수개연구소 회장인 사회자의 보름 전 돌연한 제안으로, 흔히 말하는 ‘버스킹(거리공연)’이 되어 판이 커진 것이다. 아무튼 ‘기회는 찬스’라는 말이 있듯, 의미가 깊은 행사가 되어 오수와 오수면민을 위해 너무 좋았다. 대한민국에서 목청으로 2등이라면 서러울(오죽하면 별칭이 ‘폭포 목청’일까?) 배일동 명창이 누군가가 써준 '오수의 의견설화'(1254년 고려 최자가 지은 '보한집'에 실린 실화)을 바탕으로 한 대본을, 졸지에 창작 판소리화化하는데, 추임새 대신 박수가 여러 번 터져나왔다.
내용인즉슨, 은혜를 모르고 배신을 일삼거나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들은 이 오수개의 실화를 듣고, 의견비 앞에서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 어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이 개보다 못해서야 되겠냐는 것과 함께 누천년 박해와 핍박만 받아온 개들의 원통절통한 사연을 줄줄이 늘어놓는데, 모두가 혀를 찼다. 인간을 적어도 지켜줄 줄 아는 우리 개들을 더웁다고 불에 꼬실려가며 ‘배바지가 맛있네’ 어쩌네하며 복날만 되면 몬도가네처럼 게걸스려 잡아먹어치우면서도, 어찌하여 못된 일에는 ‘개’(개살구, 개나리, 개망나니, 개소리, 개죽음, 개기름, 개가죽, 개망신 등)자를 접두사로 붙이는 까닭이 무엇이냐? 이 못된 인간들아! “오수개가 기가 막힌다/오수개가 기가 막힌다/오수개가 기가 막혀” 애절하고 짜안한 피리소리와 함께 공중에 소락때기를 ‘생얼’로 질러대는 저 소리꾼은 대체 누구인가.
곧바로 개보다 못하거나 개같은 사람이, 개보다 조금 나은 사람들보다 훨 많은 이 세상을 바로잡을 '대안代案'이 있다고 큰소리를 친다. 오수개를 보고 배우라. 당신들은 청맹과니인가? 눈뜬 봉사인가? 개의 무덤을 만들어놓고, 당신이 갖고 다니던 지팡이를 무덤 위에 꽂았는데, 이렇게 큰 느티나무로 자란 까닭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리하여 이 땅의 이름의 유래가 '큰 개 오獒'자에 '나무 수 樹' 자, 오수인 것을. 그 개를 그리워하며 불렀던 ‘견분곡犬墳曲’이란 노래가 제목만 전하고 노랫말이 전하지 않는 것이 어찌 비극이 아니란 말인가? 그 개의 주인 ‘김개인金蓋仁’의 이름을 보라. '덮을 개'자에 '어질 인'자라니, 어질고 인자한 성품이 충견의 죽음을 덮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조선 정조때 어느 문집에 '오수야말로 김개인과 찰방 최주하 등을 낳은 의롭고 훌륭한 고장'이라고 언급돼 있음이 최근 밝혀졌다). 오수를 이처럼 훌륭한 '개판의 고장'으로 만들자고 소리친다. 목이 멘다. 이 뒤에 있는 의견비야말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못될 이유가 어디 하나라도 있단 말인가. 세계적인 반려동물의 성지로 만들어 오수의 미래를 만들어가자고 호소한다. 어어-세상 사람들아, 오수 사람들아, 이 소리꾼의 비원悲願을 잊지 말라며 마무리를 맺는구나.
오수개에 대한 '축문'을 이쯤 하고, 분위기가 익어가자 명창은 피리 명인을 졸라 즉석에서(리허설이 없었고 행사 직전 둘이 만났다) <쑥대머리>로 들어가는데, 구슬프다. 애절하다. 춘향이의 넋이 돌아오는 듯하다. 명창 임방울 소리가 부럽겠는가. 추임새가 이어지니 소리꾼이 신이 났다. 원동산 앞 '3.1운동 함성터' 자리가 왕년의 명창 이화중선이 묵었다는 주막집이 아니던가. 인연은 인연으로 이어지는 법. 어찌 10여분짜리 쑥대머리 한 소절로 행사를 끝낼 수 있으랴. 재청이요! <사철가>를 들려주겠다면서 들어가기 전에 ‘우리 소리와 장단’에 대한 짧은 ‘강연’을 하는데,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로 일리가 있다. 왜 우리의 소리가 중국보다, 일본보다 몇 배 더 심오한 지, 우리의 훈민정음 창제와 말법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알기 쉽게 설명을 해주는구나. 고마운 일일진저.
사철가 한 대목을 들어보자.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 이로구나/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드라/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하구나/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 때가 있나/봄아 왔다가 갈려거든 가거라/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녹음방초 승화시라/옛부터 일러 있고/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삭풍寒露朔風 요란해도/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黃菊丹楓도 어떠헌고/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落木寒天 찬바람에/백설만 펄펄휘날리어 으으은세계 되고보면은/월백 설백 천지백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무정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다시 청춘은 어려워라/어화 세상 벗님네들아/이 내 한 말 들어보소/인생이 모두가 백년을 산다고해도/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단 사십도 못 산 인생/아차 한 번 죽어지면/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사후에 만반진수滿盤珍羞는/불여생전 不如生前 일배주一杯酒만도 못하느니라/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어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세월아 가지마라/가는 세월 어쩔거나/늘어진 계수나무 끝끝트리다가 대랑 메달아 놓고/국곡투식國穀偸食허는 놈과/부모 불효허는 놈과 형제화목 못허는 놈/차례로 잡어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고/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여 앉어/한잔 더 먹소 그만 먹게 허면서/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참 노랫말 한번 죽인다. 어디 하나 틀린 말, 억지말이 있는가? 모두가 다 맞는 말이지 않는가. 임실군에서 어쩌면 최고령일 어르신이 앞좌석에서 노랫말을 모두 따라부를 뿐만 아니라 추임새까지 놓고 있어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97세, 최세태옹). 이윽고 잔치(행사)는 끝났다. 명창은 후딱 한복을 갈아입더니 청중들이 모두 나와 의견비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채근을 한다. 부탁을 해도 부족할 터이니 “좋을씨구”가 절로 나온다. 오수 만세! 오수개 만세!를 삼창으로 끝을 내니, 어느 청중이 잽싸게 “배일동 명창 만세”를 외치는구나.
그는 근래 드물게 대단한 명창이다. 남원의 명창 강도근선생과 성우향 선생으로부터 춘향가, 심청가 등의 기초를 배우고 지리산 어느 폭포 밑에 움막을 짓고, 홀로 7년 동안 독공獨功을 했다는 소리꾼이 아니던가. 그때 그 기록들을 『독공』이라는 탁월한 저서에 소상하게 기록해 놓았다. 즉석에서 10여명이 그 책을 구입, 저자인 명창 사인 받기에 바쁘다. 오직 후학後學들을 위해서 80일간 스마트폰 메모 애플에 쏟아부었다는 그 책을 보시라. 우리의 소리가 얼마나 무궁무진하고 심오한지, 소리를 얻기(득음得音)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를 여실히 알 수 있을 터.
후기1 : 소찬小餐일망정 저녁은 대접해야 ‘개보다 낫다’는 소리는 들을 터, 일행은 소머리곰탕으로 3대째 내려온다는 <장안집>에서 그날의 행사 후일담을 나눴다던가. 명창과 피리명인이 사회자 앞에서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오수개와 닮았다”고 하는 바람에 폭소가 터졌다. ‘아하- 그래서 오수개와 '천년의 연緣'이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만찬 일행중에서 이 동네 출신으로 시각장애인에도 불구하고 고비사막과 남극지역에서 마라톤을 완주한 송경태라는 분이 있어 뜨거운 박수를 받기도 했다.
후기2: 행사의 주역들(명창, 피리고수, 매니저부부)은 만찬 후 사회자의 선물(가시엉겅퀴 골드 제품)를 몽땅 안고 전남 장성의 축령산으로 향했다. 늦은 밤(9시 30분), 축령산 ‘세심공화국’의 도인道人 청담 변신령 선생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서 청새치와 함께 행사 때문에 마시지못한 막걸리를 새벽 2시까지 실컷 통음痛飮했다는 후문이다. 또한 당연히 축령산 휴림의 토주대감을 위로하는 판소리 한 가락과 절절한 피리소리를 한밤중 한데에서 달빛을 맞으며 토해냈다고 한다.